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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20+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3055#2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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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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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20+ 高麗史(1451)
❶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❷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❸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❹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❺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송, 원흥도부서사 정숭용, 진명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이 선병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3055#2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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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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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20+ 高麗史(1451)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23055#2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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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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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高麗史(1451)
윤관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 최자호을 보내어 몽라골령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 950칸을 짓고 英州라고 불렀고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불렀으며 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福州라고 불렀고 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吉州라고 불렀다. 또 護國仁王寺와 鎭東普濟寺 두 절을 英州城 안에 창건하였다.
23055#22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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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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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7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몰아내고 경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 火串嶺까지 북쪽으로 弓漢嶺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蒙羅骨嶺까지를 우리 강토로 삼았다.
火串山 아래에 성곽 952간을 쌓고 이름을 雄州라 하고, 吳林金村에 774간을 쌓고 이름을 福州라고 하고, 蒙羅骨嶺 아래에 952간을 쌓고 이름을 英州라 하고, 弓漢村에 674간을 쌓고 이름을 吉州라고 하였는데, 吉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가 남쪽에 있다.
23055#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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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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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英州 1454
世宗實錄地理志(1454)┆본래 參散이다. 오래 호인에게 점거되어 왔는데 고려 대장 윤관이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였으나 그 이름은 미상이다. 1356년에 雙城의 옛 지경을 수복하고 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다가 1372년에 北靑州萬戶府로 고쳤다. 1398년에 靑州로 고쳤다가 1416년 병신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니 淸州牧과 이름이 같은 까닭이었다.
┆蒙羅骨嶺 → 英州 → 參散 → 安北 → 北靑州 → 靑州 → 北靑
23055#2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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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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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福州
世宗實錄地理志(1454)┆吳林金村 ➔ 福州防禦使 → 豆乙外·禿魯兀 → 端州安撫使 → 知端州郡事 → 端川┆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었는데 별호를 豆乙外라 하고 또는 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여 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1398년 무인에 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14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3055#2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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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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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雄州 1856~1861
東輿圖(1856~1861)┆雄州란 명칭은 1393년에 雄吉州만호부를 吉州牧으로 바꾸며 사라졌다. 30여년 후 1422년에 吉州² 남쪽에 雄平驛이 만들어지는데, 이 雄平驛이 옛 雄州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390년에 雄吉州만호부를 설치할 때 吉州²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吉州²와 雄平驛의 위치 관계가 그 묘사와 같기 때문이다.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친 사례를 볼 때, 雄州가 雄平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23055#2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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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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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吉州¹
吉州¹는 윤관이 점령한 지역의 북쪽 경계이고 雄州는 동쪽 경계이므로 吉州¹는 雄州의 서북쪽에 있었다. 吉州¹(西之委)와 吉州²(夫瑞坪南)의 거리는 40리로 夫瑞坪南에서 多信浦項까지의 거리와 같다. 따라서 夫瑞坪南에서 多信浦項까지의 거리만큼 서북쪽으로 떨어진 곳이 바로 西之委다.
그리고 夫瑞坪南에서 多信浦項까지의 거리가 40리면 夫瑞坪南에서 豆里山까지의 거리가 90리가 되므로, 이 산이 吉州²에서 90리 떨어져 있고 甲山과의 접경에 있다는 大山이 된다.
23055#2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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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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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吉州¹┆弓漢嶺
東輿圖(1856~1861)┆왕고가 1107년에 차지한 영토는 동으로는 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弓漢嶺에 이르는데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村에 吉州¹를 설치했다고 하므로, 弓漢嶺과 弓漢村은 雄州의 서북쪽에 있었다. 압록강 유역에서 길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起雲嶺을 넘어야 하는데, 이 起雲嶺이 弓漢嶺의 조건에 부합한다.
246년에 있었던 동천왕의 도주로로도 어울린다.
23055#2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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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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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2.15ꜛ ◾ 吉州¹┆弓漢村
1101년에 弓漢伊忽村 도령 麻浦 등 55인이 왕고에 입조하였고, 1104년에 오아속이 弓漢村을 토벌했을 때는 왕고에서 국경을 침범한 것으로 오해하였으며, 1108년에 9성을 쌓았을 때는 거란에 '女眞의 弓漢里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우리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弓漢里 추장 중에는 요나라의 벼슬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이처럼 弓漢村은 이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吉州를 설치한 듯하다.
23055#2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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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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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2 世宗實錄地理志(1454)
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으로써 咸州대도독부사를 삼아서 비로소 英州·福州·雄州·吉州의 4주와 公險鎭에 방어사를 두었다.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咸州를 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를 두고, 英州를 安嶺軍이라 하고, 雄州를 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를 두고, 吉州·福州·宜州의 3주에는 각각 7천 호를 두었고, 公險鎭·通泰鎭·平戎鎭 3진에는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23055#2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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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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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4.08ꜛ 金史(1344)
강종이 돌아오자 모두가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를 탓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태조만이 홀로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갈라전만 잃어버리겠는가? 여러 부가 모두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강종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알새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도록 하여 고려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6월에 고려가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 도전하자 알새가 패전시키고 진격하여 그 성을 포위하였다.
23055#23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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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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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5.05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와서 땅을 다투며 雄州를 포위하니 왕이 오연총에게 부월을 주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웅주가 포위된 지 27일이 되었는데 도지병마영할사 임언, 도순검사 최홍정 등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무너지려고 하였다.
▐ 4월 8일에 포위되었으니 27일 후는 5월 5일이 된다.
23055#2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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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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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5.05 高麗史(1451)
오연총이 문관·김준·왕자지 등으로 하여금 정예 1만을 이끌고 네 길로 나누어 수륙으로 함께 전진하게 하였다. 烏音志嶺·沙烏嶺의 2령 아래 이르렀는데, 적이 먼저 고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 군사가 다투어 올라가 급습하여 191명의 목을 베었다. 적이 북쪽으로 도망가 다시 진을 치고 싸우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승기를 타고 힘을 다해 싸워서 크게 패배시키고 291명의 목을 베니 적이 드디어 목책을 불사르고 도망갔다.
23055#2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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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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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 高麗史(1451)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女眞弓漢里 乃我舊地 其居民 亦我編氓 여진의 궁한리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민들도 역시 우리의 백성입니다. 근래에 변방을 노략질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수복하고 그 성을 쌓았습니다.’라 하였습니다. 표문에 말을 그렇게 하였으나 궁한리의 추장에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에 9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거란이 반드시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23055#2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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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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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09 高麗史(1451)
東蕃의 적은 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1104년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적의 잔당은 場寨를 설치하고 吉州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를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23055#2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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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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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 ꜛ 金史(1344)
斜卯阿里 父渾坦 穆宗時內附 數有戰功 阿里年十七 從其伯父胡麻谷討詐都 獲其弟沙里只 高麗築九城於曷懶甸 渾坦攻之 遇敵於木里門甸 力戰久之 阿里挺槍馳刺其將於陣中 敵遂潰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 阿里首敗敵兵 取其二城
사묘아리의 아버지는 혼탄이다. 고려가 갈라전에 9성을 쌓자 혼탄이 목리문전에서 오래 싸웠다. 사묘아리가 그 장수를 찌르자 적이 무너졌다. 혼탄은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군대를 합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앞장서서 성 2개를 획득하였다.
23055#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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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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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 ꜛ 金史(1344)
高麗入寇 以我兵屯守要害 不得進 乃還 阿里追及于曷懶水 高麗人爭走冰上 阿里乘之 殺略幾盡 遂合兵於石適歡 道遇敵兵五萬 擊走之 又與石適歡遇敵七萬 阿里先登 奮擊大敗之 石適歡曰 汝一日之間 三破重敵 功豈可忘 乃厚賜之
고려가 쳐들어왔으나 요해처를 지키니 돌아갔는데, 사묘아리가 추격하여 갈라수에서 거의 다 죽이고 석적환과 군대를 합쳤다. 길에서 적병 5만여 명을 만나자 쫓아버렸고 또 7만 명의 적병을 만났는데, 사묘아리가 나서 대파하였다.
23055#2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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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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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公嶮鎭 ①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공험진 전투다. ① 力戰久之(힘써 오래 싸웠다)가 圍吉州數月(길주를 몇달간 포위하였다)와 비슷하고 ②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혼탄이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합류하였다)가 聚遠近諸部(원근의 여러 부족을 모았다)와 비슷하며 ③ 取其二城(그 두 성을 빼앗았다)가 웅주성과 공험진성이 인접한 상황과 어울리고 ④ 무엇보다 高麗築九城於曷懶甸 이후 수만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전투는 공험진 전투 밖에 없기 때문이다.
23055#23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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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公嶮鎭 ②
그러나 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갈라수까지 추격하니 왕고인들이 다투어 얼음 위로 달아났다)는 5월에 벌어졌던 공험진 전투와 어울리지 않고 하루에 수만명이 참여하는 전투를 세 번이나 벌였다는 점도 비현실적이다.
23055#2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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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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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5.16◾公嶮鎭 ③
吉州¹를 구원하려는 오연총의 군대는 雄州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雄州에서 吉州¹에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정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은 수백년 후 吉州²가 설치되어 남쪽의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된 곳이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
@길주 @吉州 @웅주 @雄州 @부서평 @夫瑞坪 @화곶령 @火串嶺 @공험진 @公嶮鎭
23055#2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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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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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6.27 高麗史(1451)
褭弗과 史顯 등 6인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옛날 우리 太師인 盈歌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大邦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烏雅束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3055#2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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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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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과 문관이 여진 추장 居熨伊 등에게 “너희가 9성의 반환을 요청했으니 마땅히 이전에 했던 약속처럼 하늘에 대해 맹세하라.”라고 하였다. 추장 등은 咸州 성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지금 이후 대대손손까지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弘正等始自吉州 以次收入九城戰具資粮于內地
최홍정 등은 길주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3055#2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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