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128 濊·沃沮史 > 1107~1109 曷懶甸 침공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1107.10.20 열병
23055#21339 SIBLINGS CHILDREN 21339
 
1107.12.15 雄州·英州·福州·吉州에 성을 쌓다.
23055#22963 SIBLINGS CHILDREN 22963
 
1108.02 咸州와 公嶮鎭에 성을 쌓다.
23055#23183 SIBLINGS CHILDREN 23183
 
1108.02.11 여진이 雄州를 포위하자 나가 격파하다.
23055#14649 SIBLINGS CHILDREN 14649
 
1108.02.13 대도독부와 방어사를 설치하다.
23055#23186 SIBLINGS CHILDREN 23186
 
1108.02.27 公嶮鎭
비를 세우다.
23055#23271 SIBLINGS CHILDREN 23271
 
1108.03.30 宜州·通泰·平戎에 성을 쌓다.
23055#23241 SIBLINGS CHILDREN 23241
 
1108.04.08 雄州
여진이 성을 포위하다.
23055#23150 SIBLINGS CHILDREN 23150
 
1108.04.09 윤관과 오연총이 돌아오다.
23055#20971 SIBLINGS CHILDREN 20971
 
1108.04.23 오연총을 보내 雄州를 구원하게 하다.
23055#23428 SIBLINGS CHILDREN 23428
 
1108.07.07 윤관에게 다시 여진을 정벌하게 하다.
23055#26174 SIBLINGS CHILDREN 26174
 
1108.08.10 오연총이 돌아오다.
23055#29281 SIBLINGS CHILDREN 29281
 
1109.05.16 ⁻ 吉州
여진이 포위하다.
23055#23260 SIBLINGS CHILDREN 23260
 
1109.05.16 公嶮鎭
오연총이 패하다.
23055#30629 SIBLINGS CHILDREN 30629
 
 曷懶甸 침공
曷懶甸 침공
23055#23258 SIBLINGS CHILDREN 23258
 
1107.10.20 ⁻ 高麗史(1451)
왕이 여진을 정벌하려고 오연총을 윤관의 부관으로 삼았다. 그 때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나 오연총은 자못 의심스럽게 여겨 작은 소리로 윤관에게 말하니 윤관이 말하기를,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라 하였다. 오연총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었으며,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여진을 격파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9성을 쌓았다.
23055#30618 SIBLINGS CHILDREN 30618
 
1107.10.20 高麗史(1451)
장차 여진을 정벌하려고 순천관 남문에 나아가 열병하였으며 은과 포,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23055#20666 SIBLINGS CHILDREN 20666
 
1107.10.20+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3055#22984 SIBLINGS CHILDREN 22984
 
1107.10.20+ ꜛ 金史(1344)
고려가 허락하면서 “국경에서 데려가라.”고 하니 강종은 완안부 아괄, 오림답부 승곤 등에게 데려오게 하고 마기령 을집촌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아괄, 승곤 등이 국경에 이르자 고려는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23055#17550 SIBLINGS CHILDREN 17550
 
1107.10.20+ ꜛ 金史(1344)
고려가 망명한 시람들의 송환을 약속하므로 아괄과 승곤으로 하여금 가서 인수하게 하였는데 고려가 약속을 어기고 두 사람을 죽인 뒤 갈라전에 9성을 쌓았다.
23055#23313 SIBLINGS CHILDREN 23313
 
1107.10.20+ 高麗史(1451)
❶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❷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❸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❹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❺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송, 원흥도부서사 정숭용, 진명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이 선병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3055#23387 SIBLINGS CHILDREN 23387
 
1107.10.20+ 高麗史(1451)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23055#23388 SIBLINGS CHILDREN 23388
 
1107.12.15 高麗史(1451)
윤관이 여진을 쳐서 크게 패배시키자, 여러 장수를 보내 경계를 정하고 雄州·英州·福州·吉州의 4주에 성을 쌓았다.
23055#20667 SIBLINGS CHILDREN 20667
 
1107.12.15ꜛ 高麗史(1451)
윤관이 蒙羅骨嶺 아래에 성랑 950칸을 쌓아 英州라 하고, 火串山 아래에 992칸을 쌓아 雄州라 하였다. 吳林金村에 774칸을 쌓아 福州라 하였다. 弓漢伊村에 670칸을 쌓아 吉州라 하였다.
23055#21323 SIBLINGS CHILDREN 21323
 
1107.12.15ꜛ 高麗史(1451)
윤관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 최자호을 보내어 몽라골령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 950칸을 짓고 英州라고 불렀고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불렀으며 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福州라고 불렀고 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吉州라고 불렀다. 또 護國仁王寺와 鎭東普濟寺 두 절을 英州城 안에 창건하였다.
23055#22973 SIBLINGS CHILDREN 22973
 
1107.12.15ꜛ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7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몰아내고 경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 火串嶺까지 북쪽으로 弓漢嶺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蒙羅骨嶺까지를 우리 강토로 삼았다. 火串山 아래에 성곽 952간을 쌓고 이름을 雄州라 하고, 吳林金村에 774간을 쌓고 이름을 福州라고 하고, 蒙羅骨嶺 아래에 952간을 쌓고 이름을 英州라 하고, 弓漢村에 674간을 쌓고 이름을 吉州라고 하였는데, 吉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가 남쪽에 있다.
23055#23012 SIBLINGS CHILDREN 23012
 
1107.12.15ꜛ ◾ 英州 1404
李朝 太宗 奏(1404)┆1258년에 이르러 ...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를 해양이라 칭하고, 단주를 독로올이라 칭하고, 英州를 三散이라 칭하고, 웅주를 홍긍이라 칭하고, 함주를 합란이라 칭하였습니다.
23055#21600 SIBLINGS CHILDREN 21600
 
1107.12.15ꜛ ◾ 英州 1451
高麗史(1451)┆英州는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防禦使를 두었고 安嶺軍이라 불렀다. 1109년에 城을 철수하여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吉州에 합병하였다.
23055#23269 SIBLINGS CHILDREN 23269
 
1107.12.15ꜛ ◾ 英州 1454
世宗實錄地理志(1454)┆본래 參散이다. 오래 호인에게 점거되어 왔는데 고려 대장 윤관이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였으나 그 이름은 미상이다. 1356년에 雙城의 옛 지경을 수복하고 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다가 1372년에 北靑州萬戶府로 고쳤다. 1398년에 靑州로 고쳤다가 1416년 병신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니 淸州牧과 이름이 같은 까닭이었다. ┆蒙羅骨嶺 → 英州 → 參散 → 安北 → 北靑州 → 靑州 → 北靑
23055#23238 SIBLINGS CHILDREN 23238
 
1107.12.15ꜛ ◾ 福州
世宗實錄地理志(1454)┆吳林金村 ➔ 福州防禦使 → 豆乙外·禿魯兀 → 端州安撫使 → 知端州郡事 → 端川┆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었는데 별호를 豆乙外라 하고 또는 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여 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1398년 무인에 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14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3055#22988 SIBLINGS CHILDREN 22988
 
1107.12.15ꜛ ◾ 雄州 1451
高麗史(1451)┆1390년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23055#22987 SIBLINGS CHILDREN 22987
 
1107.12.15ꜛ ◾ 雄州 1454
世宗實錄地理志(1454)┆長德山이 주의 동쪽에 있다. 浮瑞川이 주의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78리, 서쪽으로 白頭山의 내맥인 大山에 이르기 90리인데 甲山과 접경이 되며, 남쪽으로 端川 磨天嶺에 이르기 91리, 북쪽으로 鏡城 雲加委의 大川에 이르기 89리이다. 驛이 5인데 雄平은 1422년에 두었다.
23055#23247 SIBLINGS CHILDREN 23247
 
1107.12.15ꜛ ◾ 雄州 1856~1861
東輿圖(1856~1861)┆雄州란 명칭은 1393년에 雄吉州만호부를 吉州牧으로 바꾸며 사라졌다. 30여년 후 1422년에 吉州² 남쪽에 雄平驛이 만들어지는데, 이 雄平驛이 옛 雄州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390년에 雄吉州만호부를 설치할 때 吉州²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吉州²와 雄平驛의 위치 관계가 그 묘사와 같기 때문이다.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친 사례를 볼 때, 雄州가 雄平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23055#23277 SIBLINGS CHILDREN 23277
 
1107.12.15ꜛ ◾ 雄州┆火串山
東輿圖(1856~1861)┆고려사(1451)에는 火串山 아래에 992칸을 쌓아 雄州라 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火串山은 동여도의 長德山이 된다.
23055#23267 SIBLINGS CHILDREN 23267
 
1107.12.15ꜛ ◾ 雄州┆火串嶺
東輿圖(1856~1861)┆고려사(1451)에는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火串嶺은 동여도의 地境峴이 된다.
23055#23244 SIBLINGS CHILDREN 23244
 
1107.12.15ꜛ ◾ 吉州¹ 1451
高麗史(1451)┆길주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이라 불렀다. 1111년에 州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09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海洋(三海陽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90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23055#23256 SIBLINGS CHILDREN 23256
 
1107.12.15ꜛ ◾ 吉州² 1454
世宗實錄地理志(1454)┆1393년에 吉州牧으로 고쳤다. 예전에는 주치가 西之委에 있었으나 지금은 夫瑞坪 남쪽으로 옮겼는데 구치와의 거리가 40리이다. 서쪽으로 백두산의 내맥인 大山에 이르기 90리인데, 甲山과 접경이 된다. 사철이 주의 동남쪽 40리 되는 多信浦項의 바닷가에서 난다.
23055#23002 SIBLINGS CHILDREN 23002
 
1107.12.15ꜛ ◾ 吉州¹
1107.12.15ꜛ ◾ 吉州¹
吉州¹는 윤관이 점령한 지역의 북쪽 경계이고 雄州는 동쪽 경계이므로 吉州¹는 雄州의 서북쪽에 있었다. 吉州¹(西之委)와 吉州²(夫瑞坪南)의 거리는 40리로 夫瑞坪南에서 多信浦項까지의 거리와 같다. 따라서 夫瑞坪南에서 多信浦項까지의 거리만큼 서북쪽으로 떨어진 곳이 바로 西之委다. 그리고 夫瑞坪南에서 多信浦項까지의 거리가 40리면 夫瑞坪南에서 豆里山까지의 거리가 90리가 되므로, 이 산이 吉州²에서 90리 떨어져 있고 甲山과의 접경에 있다는 大山이 된다.
23055#22968 SIBLINGS CHILDREN 22968
 
1107.12.15ꜛ ◾ 吉州¹┆弓漢嶺
東輿圖(1856~1861)┆왕고가 1107년에 차지한 영토는 동으로는 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弓漢嶺에 이르는데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村에 吉州¹를 설치했다고 하므로, 弓漢嶺과 弓漢村은 雄州의 서북쪽에 있었다. 압록강 유역에서 길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起雲嶺을 넘어야 하는데, 이 起雲嶺이 弓漢嶺의 조건에 부합한다. 246년에 있었던 동천왕의 도주로로도 어울린다.
23055#23114 SIBLINGS CHILDREN 23114
 
1107.12.15ꜛ ◾ 吉州¹┆弓漢村
起雲嶺을 넘어 浮瑞川을 따라 내려오다 吉州²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이르면, 그곳이 바로 초기에 吉州¹를 설치했던 弓漢村이자 훗날의 西之委일 것이다. 왕고는 弓漢里 밖의 산이 연달아 있고 작은 길 하나로만 통행할 수 있어 關城을 쌓아 그 길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弓漢村에 성을 쌓았을 것이다.
23055#23398 SIBLINGS CHILDREN 23398
 
1107.12.15ꜛ ◾ 吉州¹┆弓漢村
1101년에 弓漢伊忽村 도령 麻浦 등 55인이 왕고에 입조하였고, 1104년에 오아속이 弓漢村을 토벌했을 때는 왕고에서 국경을 침범한 것으로 오해하였으며, 1108년에 9성을 쌓았을 때는 거란에 '女眞의 弓漢里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우리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弓漢里 추장 중에는 요나라의 벼슬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이처럼 弓漢村은 이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吉州를 설치한 듯하다.
23055#21319 SIBLINGS CHILDREN 21319
 
1107.12.15ꜛ ◾ 吉州¹┆曷懶水
東輿圖(1856~1861)┆윤관이 合懶에 咸州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吉州 또한 曷懶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吉州를 지나는 浮瑞川은 曷懶水가 된다.
23055#23264 SIBLINGS CHILDREN 23264
 
1107.12.15ꜛ 高麗史(1451)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지난해에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우리의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9성을 설치하였습니다.
23055#23298 SIBLINGS CHILDREN 23298
 
1108 高麗史(1451)
6성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鎭東軍 咸州대도독부고 두 번째는 安嶺軍 英州방어사며 세 번째는 寧海軍 雄州방어사고 네 번째는 吉州방어사다. 다섯 번째는 福州방어사고 여섯 번째는 公嶮鎭방어사다.
23055#23010 SIBLINGS CHILDREN 23010
 
1108.02 高麗史(1451)
咸州 및 公嶮鎭에 성을 쌓았다. ▐ 雄州·英州·福州·吉州 4주에 성을 먼저 쌓고 이때 咸州·公嶮鎭에 성을 쌓아 6성이 되었다.
23055#23052 SIBLINGS CHILDREN 23052
 
1108.02 世宗實錄地理志(1454)
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으로써 咸州대도독부사를 삼아서 비로소 英州·福州·雄州·吉州의 4주와 公險鎭에 방어사를 두었다.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咸州를 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를 두고, 英州를 安嶺軍이라 하고, 雄州를 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를 두고, 吉州·福州·宜州의 3주에는 각각 7천 호를 두었고, 公險鎭·通泰鎭·平戎鎭 3진에는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23055#23253 SIBLINGS CHILDREN 23253
 
1108.02 世宗實錄地理志(1454) 咸州
東暆·合懶·咸州·合蘭·咸興 ┆1108년 2월에 鎭東軍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고 큰 성을 쌓아서 남계의 정호 1천 9백 48호를 이주시켜 이를 채웠다. 1416년에 함흥부로 승격시켜 도순문찰리사로 하여금 관청을 이곳에 옮기게 하고 토관을 두었다.
23055#23240 SIBLINGS CHILDREN 23240
 
1108.02 ◾ @함흥 @咸興
@합라 @合懶 @함주 @咸州 @합란 @合蘭
23055#372 SIBLINGS CHILDREN 372
 
1108.02.11 高麗史(1451)
여진이 雄州를 포위하자 최홍정이 성문을 열고 나가 격파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포로로 잡은 80명의 머리를 베고 수레와 말과 무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획득하였다.
23055#20763 SIBLINGS CHILDREN 20763
 
1108.02.13 高麗史(1451)
상서 유택을 咸州대도독부사로 임명하고 英州·福州·雄州·吉州 4개 주와 公嶮鎭에 방어사를 설치하였다.
23055#20764 SIBLINGS CHILDREN 20764
 
1108.02.13 高麗史(1451)
6성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鎭東軍 咸州大都督府로, 병민이 1,948정호이다. 두 번째는 安嶺軍 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寧海軍 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23055#21325 SIBLINGS CHILDREN 21325
 
1108.02.27 高麗史(1451)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새로 6성을 쌓았으므로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였다. 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 경계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公嶮鎭은 경계에 인접한 곳으로 보인다. 신라의 황초령비나 마운령비의 사례를 볼 때, 왕고의 경계비도 마땅히 火串嶺, 弓漢嶺 또는 蒙羅骨嶺에 세워야 할 듯한데, 이 세 고개에는 경계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23055#20765 SIBLINGS CHILDREN 20765
 
1108.03.29 高麗史(1451)
여진이 英州城 밖에 진을 치자 관군이 나아가 싸워 그들을 격퇴하였다. 20명의 목을 베고 무기와 말 8필을 노획하였다.
23055#20766 SIBLINGS CHILDREN 20766
 
1108.03.30 高麗史(1451)
윤관이 宜州·通泰·平戎에 세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을 이주시켜 새로 쌓은 9성을 채웠다. ▐ 咸·英·雄·福·吉·宜六州 及公嶮·通泰·平戎三鎭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23055#20907 SIBLINGS CHILDREN 20907
 
1108.03.30 高麗史(1451)
宜州·通泰·平戎의 세 성을 쌓았다.
23055#23242 SIBLINGS CHILDREN 23242
 
1108.04.02 高麗史(1451)
윤관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로, 오연총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 내시낭중 한교여를 보내 조서와 고신, 자주색으로 수를 놓은 안장과 구마 2필을 가지고 雄州에 이르러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3055#20909 SIBLINGS CHILDREN 20909
 
1108.04.08 高麗史(1451)
여진이 목책을 설치하고 雄州城을 포위하였다. ▐ 6성을 설치할 때, 雄州에는 성랑 992간을 짓고 병민 1,436정호를 두었고 吉州에는 성랑 670간을 짓고 병민 680정호를 두었으므로, 吉州보다 雄州가 더 큰 규모였다. 또 동쪽끝인 火串嶺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雄州는 9성을 설치한 후 가장 먼저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
23055#20963 SIBLINGS CHILDREN 20963
 
1108.04.08ꜛ 金史(1344)
以兵數萬來攻 斡賽敗之 斡魯亦築九城 與高麗九城相對
23055#23065 SIBLINGS CHILDREN 23065
 
1108.04.08ꜛ 金史(1344)
강종이 돌아오자 모두가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를 탓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태조만이 홀로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갈라전만 잃어버리겠는가? 여러 부가 모두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강종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알새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도록 하여 고려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6월에 고려가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 도전하자 알새가 패전시키고 진격하여 그 성을 포위하였다.
23055#23068 SIBLINGS CHILDREN 23068
 
1108.04.09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왔다. 왕이 고취와 군위를 갖추어 그들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 帶方侯 왕보와 齊安侯 왕서를 보내 동교에서 위로연을 베풀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에 이르러 복명하고 부월을 반환하여 바치자, 왕이 문덕전에 나아가 윤관과 오연총, 여러 재추를 불러 전각 위로 오르게 하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었는데,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23055#23067 SIBLINGS CHILDREN 23067
 
1108.04.23 高麗史(1451)
병마부원수 오연총을 보내 부월을 주고 가서 雄州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23055#20972 SIBLINGS CHILDREN 20972
 
1108.05.05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와서 땅을 다투며 雄州를 포위하니 왕이 오연총에게 부월을 주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웅주가 포위된 지 27일이 되었는데 도지병마영할사 임언, 도순검사 최홍정 등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무너지려고 하였다. ▐ 4월 8일에 포위되었으니 27일 후는 5월 5일이 된다.
23055#23292 SIBLINGS CHILDREN 23292
 
1108.05.05 高麗史(1451)
오연총이 문관·김준·왕자지 등으로 하여금 정예 1만을 이끌고 네 길로 나누어 수륙으로 함께 전진하게 하였다. 烏音志嶺·沙烏嶺의 2령 아래 이르렀는데, 적이 먼저 고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 군사가 다투어 올라가 급습하여 191명의 목을 베었다. 적이 북쪽으로 도망가 다시 진을 치고 싸우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승기를 타고 힘을 다해 싸워서 크게 패배시키고 291명의 목을 베니 적이 드디어 목책을 불사르고 도망갔다.
23055#23367 SIBLINGS CHILDREN 23367
 
1108.05.05 高麗史(1451)
오연총이 성으로 들어가 성 안의 장수와 군사 가운데 구원병을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출전하여 사상자를 많이 내서 군사들의 사기를 잃게 한 책임을 물어 차등 있게 벌을 내렸다. 개선하고 돌아오자 왕이 문덕전으로 불러 보고 변방의 일을 물었으며 잔치를 내려 위로하였다.
23055#23394 SIBLINGS CHILDREN 23394
 
1108.07.07 高麗史(1451)
행영병마원수 문하시중 윤관에게 다시 여진을 정벌하라고 명령하였다.
23055#20998 SIBLINGS CHILDREN 20998
 
1108.07.25 高麗史(1451)
행영병마판관 어사 신현 등이 수군으로 寧仁鎭에서 적을 물리치고 20명의 머리를 베었다.
23055#21046 SIBLINGS CHILDREN 21046
 
1108.08.10 高麗史(1451)
오연총이 돌아왔다. 왕이 문덕전에서 불러 보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었으며 잔치를 베풀어 그를 위로하였다.
23055#21264 SIBLINGS CHILDREN 21264
 
1108.08.11 高麗史(1451)
병마판관 왕자지와 척준경이 咸州와 英州에서 여진과 싸워서 33명의 머리를 베었다.
23055#21265 SIBLINGS CHILDREN 21265
 
1108.08.16 高麗史(1451)
병마판관 유익과 장군 송충, 신기군 박회절 등이 여진과 吉州에서 싸우다가 죽자, 유익에게는 병부시랑 지어사대사를, 송충에게는 상장군 병부상서를 추증하였다.
23055#21271 SIBLINGS CHILDREN 21271
 
1108.09.16 高麗史(1451)
행영병마판관 왕자지와 척준경이 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하여 27명의 머리를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
23055#21274 SIBLINGS CHILDREN 21274
 
1109 공험진 전투
23055#23363 SIBLINGS CHILDREN 23363
 
1109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9년에 동계의 崇寧鎭·通泰鎭·眞陽鎭의 3진과 英州·福州의 두 주성을 철폐하고 또 咸州·雄州 2주와 宣化鎭의 성을 철폐하였다.
23055#23254 SIBLINGS CHILDREN 23254
 
1109.01.04 高麗史(1451)
동계행영병마녹사 왕사근과 하경택 등이 咸州에서 여진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23055#21275 SIBLINGS CHILDREN 21275
 
1109.02 高麗史(1451)
이여림을 遼에 보내 東界에 9성을 신축한 것을 알리고 반서대 1개를 보냈다.
23055#21280 SIBLINGS CHILDREN 21280
 
1109.03.11 高麗史(1451)
行營兵馬判官許載·金義元等與女眞 戰于吉州關外 斬三十級 獲其鐵甲牛馬 행영병마판관 허재와 김의원 등이 吉州의 관문 밖에서 여진과 싸워 30급을 베고 철갑과 소와 말을 포획하였다.
23055#21281 SIBLINGS CHILDREN 21281
 
1109.04.30 高麗史(1451)
東女眞이 다시 史顯을 우리의 국경으로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23055#21282 SIBLINGS CHILDREN 21282
 
1109.05 高麗史(1451)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女眞弓漢里 乃我舊地 其居民 亦我編氓 여진의 궁한리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민들도 역시 우리의 백성입니다. 근래에 변방을 노략질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수복하고 그 성을 쌓았습니다.’라 하였습니다. 표문에 말을 그렇게 하였으나 궁한리의 추장에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에 9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거란이 반드시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23055#23293 SIBLINGS CHILDREN 23293
 
1109.05 高麗史節要(1452)
여진의 弓漢里 밖에는 산이 연달아 벽처럼 서 있어 오직 작은 길 하나만이 통행할 수 있으니, 만약 관성을 세워 작은 길을 막는다면 우환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23055#23297 SIBLINGS CHILDREN 23297
 
1109.05.06 高麗史(1451)
행영병마에서 아뢰기를, “여진이 宣德鎭을 침략하여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해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23055#21283 SIBLINGS CHILDREN 21283
 
1109.05.06┆宣德鎭
정평군 선덕리.
23055#23117 SIBLINGS CHILDREN 23117
 
1109.05.09 高麗史(1451)
東蕃의 적은 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1104년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적의 잔당은 場寨를 설치하고 吉州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를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23055#21285 SIBLINGS CHILDREN 21285
 
1109.05.16 ⁻ 高麗史(1451)
女眞圍吉州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였다.
23055#23283 SIBLINGS CHILDREN 23283
 
1109.05.16 ⁻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멀거나 가까운 여러 부족을 모아 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니 성이 거의 함락되었다. 병마부사 이관진 등이 사졸을 독려하여 一夜更築重城(하룻밤 사이에 다시 겹겹이 성을 쌓고) 또한 지키면서 한편으로 싸웠으나 싸움이 오래되자 형세가 어렵게 되고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23055#23056 SIBLINGS CHILDREN 23056
 
1109.05.16 ⁻ 高麗史(1451) 許載
9성의 役에 중군녹사로서 길주성을 지키다가 여진이 와서 공격하니, 허재는 병마부사 이관진 등과 함께 수개월을 굳게 지켰다. 성이 거의 함락되려고 하자 사졸을 독려하여 一夜更築重城(하룻밤에 다시 중성을 쌓고) 그들을 막아내니 적이 마침내 물러났다. ▐ 吉州城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055#25358 SIBLINGS CHILDREN 25358
 
1109.05.16 高麗史(1451)
吳延寵引兵救之 師大敗 오연총이 군사를 이끌고 구하려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23055#29282 SIBLINGS CHILDREN 29282
 
1109.05.16 ꜛ 金史(1344)
6월에 고려가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 도전하자 斜塞가 패전시키고 진격하여 그 성을 포위하였다.
23055#23066 SIBLINGS CHILDREN 23066
 
1109.05.16 ꜛ 金史(1344)
斜卯阿里 父渾坦 穆宗時內附 數有戰功 阿里年十七 從其伯父胡麻谷討詐都 獲其弟沙里只 高麗築九城於曷懶甸 渾坦攻之 遇敵於木里門甸 力戰久之 阿里挺槍馳刺其將於陣中 敵遂潰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 阿里首敗敵兵 取其二城 사묘아리의 아버지는 혼탄이다. 고려가 갈라전에 9성을 쌓자 혼탄이 목리문전에서 오래 싸웠다. 사묘아리가 그 장수를 찌르자 적이 무너졌다. 혼탄은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군대를 합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앞장서서 성 2개를 획득하였다.
23055#23356 SIBLINGS CHILDREN 23356
 
1109.05.16 ꜛ 金史(1344)
高麗入寇 以我兵屯守要害 不得進 乃還 阿里追及于曷懶水 高麗人爭走冰上 阿里乘之 殺略幾盡 遂合兵於石適歡 道遇敵兵五萬 擊走之 又與石適歡遇敵七萬 阿里先登 奮擊大敗之 石適歡曰 汝一日之間 三破重敵 功豈可忘 乃厚賜之 고려가 쳐들어왔으나 요해처를 지키니 돌아갔는데, 사묘아리가 추격하여 갈라수에서 거의 다 죽이고 석적환과 군대를 합쳤다. 길에서 적병 5만여 명을 만나자 쫓아버렸고 또 7만 명의 적병을 만났는데, 사묘아리가 나서 대파하였다.
23055#23357 SIBLINGS CHILDREN 23357
 
1109.05.16 ꜛ 高麗史(1451)
오연총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3055#23261 SIBLINGS CHILDREN 23261
 
1109.05.16◾公嶮鎭 ①
1109.05.16◾公嶮鎭 ①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공험진 전투다. ① 力戰久之(힘써 오래 싸웠다)가 圍吉州數月(길주를 몇달간 포위하였다)와 비슷하고 ②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혼탄이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합류하였다)가 聚遠近諸部(원근의 여러 부족을 모았다)와 비슷하며 ③ 取其二城(그 두 성을 빼앗았다)가 웅주성과 공험진성이 인접한 상황과 어울리고 ④ 무엇보다 高麗築九城於曷懶甸 이후 수만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전투는 공험진 전투 밖에 없기 때문이다.
23055#23369 SIBLINGS CHILDREN 23369
 
1109.05.16◾公嶮鎭 ②
그러나 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갈라수까지 추격하니 왕고인들이 다투어 얼음 위로 달아났다)는 5월에 벌어졌던 공험진 전투와 어울리지 않고 하루에 수만명이 참여하는 전투를 세 번이나 벌였다는 점도 비현실적이다.
23055#23370 SIBLINGS CHILDREN 23370
 
1109.05.16◾公嶮鎭 ③
1109.05.16◾公嶮鎭 ③
吉州¹를 구원하려는 오연총의 군대는 雄州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雄州에서 吉州¹에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정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은 수백년 후 吉州²가 설치되어 남쪽의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된 곳이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 @길주 @吉州 @웅주 @雄州 @부서평 @夫瑞坪 @화곶령 @火串嶺 @공험진 @公嶮鎭
23055#23275 SIBLINGS CHILDREN 23275
 
1109.06.12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군대를 이끌고 吉州를 구원하려다가 여진이 화친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定州로 되돌아왔다.
23055#21286 SIBLINGS CHILDREN 21286
 
1109.06.12 ꜛ 高麗史(1451)
오연총이 스스로를 탄핵하는 장계를 갖추어 올리고는 윤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吉州로 나아가려 하였는데, 마침 적이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여 결국 돌아왔다.
23055#23187 SIBLINGS CHILDREN 23187
 
1109.06.23 高麗史(1451)
재상과 대간 및 6부 관리를 불러 9성의 반환을 의논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등 28인은 그렇게 하자고 하였으나 예부낭중 박승중과 호부낭중 한상은 반대하였다.
23055#21287 SIBLINGS CHILDREN 21287
 
1109.06.26 高麗史(1451)
東蕃의 사신 褭弗과 史顯 등이 내조하였다.
23055#21288 SIBLINGS CHILDREN 21288
 
1109.06.27 高麗史(1451)
褭弗과 史顯 등 6인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옛날 우리 太師인 盈歌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大邦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烏雅束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3055#21289 SIBLINGS CHILDREN 21289
 
1109.07 金史(1451)
7월에 고려가 화친을 요청하면서 전후에 망명한 자들과 침략한 옛 땅을 모두 돌려주고 9성 방어에서 퇴각함으로써 드디어 고려와 화친하였다.
23055#23087 SIBLINGS CHILDREN 23087
 
1109.07 ꜛ 金史(1344)
高麗約以還逋逃之人 退九城之軍 復所侵故地
23055#23321 SIBLINGS CHILDREN 23321
 
1109.07.02 高麗史(1451)
재추 및 대성·제사·지제고·시신·도병마판관 이상과 문무 3품 이상의 관리를 선정전에 모이게 하여 9성의 반환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모두 돌려주는 것을 옳다고 하였다.
23055#21290 SIBLINGS CHILDREN 21290
 
1109.07.03 高麗史(1451)
선정전 남문에 거둥하여 褭弗 등을 접견하고 9성의 반환을 허락하자, 요불이 감격하여 울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왕이 물품을 하사하고 돌려보내면서 내시 김향에게 명령하여 국경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이어서 원수 등에게 조서를 내려 9성을 반환하려는 뜻을 타일렀다.
23055#21291 SIBLINGS CHILDREN 21291
 
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과 문관이 여진 추장 居熨伊 등에게 “너희가 9성의 반환을 요청했으니 마땅히 이전에 했던 약속처럼 하늘에 대해 맹세하라.”라고 하였다. 추장 등은 咸州 성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지금 이후 대대손손까지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弘正等始自吉州 以次收入九城戰具資粮于內地 최홍정 등은 길주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3055#21292 SIBLINGS CHILDREN 21292
 
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 등은 吉州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3055#23206 SIBLINGS CHILDREN 23206
 
1109.07.19 高麗史(1451)
東界의 崇寧鎭과 通泰鎭 2진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3055#21293 SIBLINGS CHILDREN 21293
 
1109.07.21 高麗史(1451)
英州·福州의 2주와 眞陽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3055#21294 SIBLINGS CHILDREN 21294
 
1109.07.21 高麗史(1451)
英州·福州의 2주와 眞陽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3055#23165 SIBLINGS CHILDREN 23165
 
1109.07.22 高麗史(1451)
咸州·雄州의 2주와 宣化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 9성에서의 철수는 여진의 호감을 샀고 그들의 협력을 받으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먼 곳부터 철수할 필요가 없었던 듯하다.
23055#21310 SIBLINGS CHILDREN 21310
 
1109.07.22 高麗史(1451)
咸州·雄州의 2주와 宣化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3055#23161 SIBLINGS CHILDREN 23161
 
1109.08.02 高麗史(1451)
신기군 군사들이 東界에서 돌아왔다. 왕이 중광전 서루에 거둥하여 그들을 위로하며 이르기를, “동계 전투에서의 패배는 장수의 잘못이니 내가 어찌 너희의 노고를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23055#21312 SIBLINGS CHILDREN 21312
 
1109.09 金史(1344)
九月 乃罷兵 9월에 군대를 해산했다.
23055#23284 SIBLINGS CHILDREN 23284
 
2024.10.03 公險鎭의 위치
公險鎭(공험진)의 위치는 지금의 吉州(길주)다.
23055#31746 SIBLINGS CHILDREN 3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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