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한국 민중들은 사회주의를 원했다.
이러한 염원을 반영하여 전국에 걸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미군은 이 인공을 뭉개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우익 폭력조직을 사주하여 좌익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하였다.
대구인민봉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고 제주인민봉기로 이어졌다.
이어서 한국전쟁까지 터지자 미국과 우익은 민중학살로 대응하며 이남 사회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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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 대구인민봉기
대구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일어났다.
9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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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마산 괭이바다
마산과 거제 칠천도 사이의 바다.
1681명의 민간인이 총살되거나 바다에 수장되었다.
'물 먹는다'는 말은 이 사건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인접한 거제도에서는 이씨조선이 건국될 때 왕씨들이 집단으로 수장되었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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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 대구형무소 - 재소자 1500여명 헌병에 인계
재소자 학살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1차시기는 7월 3일부터 9일까지고 2차시기는 7월 27일부터 31일까지였다. 1차시기에 대하여 재소자인명부에는 7월 3일부터 9일까지 모두 242명이 군 헌병대에 인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중 211명이 7월 7일에 인도된 것으로 되어 있다. 2차시기에는 인민군의 대구 접근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진주로 이감한다며 다시 군 헌병대에 인계되었는데 재소자인명부에 따르면 모두 1,196명이다.
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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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 대구형무소 - 보도연맹
7월 3일경부터 대구, 청도, 경산, 영천 등의 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연행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전쟁 직후에 대구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까지 합쳐 8,0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중 재소자가 4,000여 명이었으므로 나머지 4,000여 명이 국민보도연맹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소자 희생자 수가 1,500여 명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 역시 최소한 1,000여 명은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9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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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 가창 골짜기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대구, 경산, 영천, 청도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다. 경북경찰국 특경대원 오만수는 대장의 지시로 대원 80명과 함께 가서 100여명씩 묻혀있는 구덩이 3개를 확인하였다.
○1959년 가창댐 공사를 할 때 인골이 너무 많이 나오자 굴착기 기사가 일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골로 보낸다'는 말은 이 학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학살이 골짜기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꼭 이 학살에서 생긴 말이 아닐 수 있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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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 경산 코발트광산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대구, 경산, 영천, 청도의 보도연맹원은 주로 경산코발트광산과 가창골에서 학살되었으며 수성 못 인근 야산, 본리동, 송현동, 팔공산, 논공읍 남리 석밭 등에서도 학살된 사실이 확인된다.
○파티마재활요양병원과 인터불고경산CC 주차장 사이에 갱도 입구가 있다. 이전에는 안경공장이 있었으나 망해서 흉가로 남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정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이 학살당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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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 군위 비호골
전쟁이 발발하자 4~5명의 CIC 군인들이 일신여관에 주둔하면서 학살을 준비했다. 군위경찰서에 의해 예비검속된 주민들은 경찰서 유치장과 인근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갑, 을, 병으로 분류되어 1950년 7월 중․하순 무렵부터 8월 초에 우보면 나호동 비호골 계곡과 소보면 계곡 등에서 총살당했다. 주민을 총살한 자들은 육군정보국 산하 CIC 군위파견대와 군위경찰서 경찰이었고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100여 명에 이른다.
9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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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16ᑅ 김천 돌고개
김천형무소가 소개를 완료한 날이 7월 16일이었다. 그 전에 재소자 349명이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으며, 나머지 600여 명의 재소자가 김천지구CIC, 3사단 22연대 헌병대, 경찰에 의해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대항면 직지사계곡에서 학살당했다.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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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17 포항의료원 골짜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놓고 명단을 비교해가면서 사람들을 트럭에 실어서 보냈다. 트럭에는 최대한 많은 인원을 싣기 위해 바닥에 차례로 사람들을 눕게 한 후 그 위에 가마니를 하나 깔고 다시 사람들을 눕게 하는 식으로 여러 겹으로 쌓아서 실었다. 이렇게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포항의료원 뒷산에 길게 구덩이를 파고 죽 세워 총살했다고 한다. 희생된 수는 최대 2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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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24 비안 짝두골
다인지서는 7월 24일 2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을 연행하여 피밭제에서 총살했으며, 단북지서는 7월 25일 단북면 김달용 등 11명을 지서로 연행하여 안계면 또는 의성쪽에서 총살했다. 안계면 김호영 등 주민 50여 명은 7월 24일 군인들에 의해 연행당한 후 비안면 짝두골에서 총살당했고, 같은 시기에 안평면 주민 오근수 등 8명이 안평지서에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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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7~08 대전 골령골
미군이 현장에 버린 빈 담뱃갑과 탄피를 찍은 사진도 보인다. 위닝턴 기자는 당시 기사에서 "땅에 버려진 빈 담뱃갑들과 놓여 있는 수천 개의 탄약통은 모두 미제였다. 미군 장교들이 한국군 장교들과 매일 지프를 타고 와서 학살을 감독했다"며 "이런 살인극은 미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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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8.10 대구 신동재
“1950년 8월 10일 오후 3시에서 4시 30분 사이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13킬로미터(원문에는 8마일로 표기) 떨어진 야산 계곡에서 한국군 장교와 무장한 헌병들이 여성을 포함한 200~300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으며 확인 사살을 하는 등 3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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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02.11 거창 박산골
1951년 2월 11일에 수용된 주민들 중 군경가족, 공무원가족, 우익청년단 가족 등을 빼고 남은 주민 533명을 박산골 계곡, 홍동골 골짜기로 끌고 갔다. 이중 12명을 남겨 두고 기관총과 소총으로 모두 학살하였으며 남은 12명에게 희생자들의 사망여부를 확인시킨 후 다시 이들도 사살했다. 당시 1명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자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위협한 뒤 살려두고 그대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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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가창 대한중석 달성광산
1953년 오뉴월 쯤 당시 22살로 중석광산 경비였던 서상일씨가 종전을 앞두고 광산 근처에서 군복을 입은 이들이 민간인을 사살한 것을 직접 본 사실을 증언했다.
"계곡 가장자리 군복입은 이들이 사람들을 세우고 총을 쐈다. 그들이 떠나면 경비들이 땅을 파고 시신들을 묻었다. 누런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비녀 꼽은 아낙네,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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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십자가
2020년 통계지리정보서비스(SGIS)에서 뽑은 개신교인 비율이다. 옅은 색일수록 비율이 낮다. 분포는 건국 전후의 민중학살과 연결지어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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