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浪 한족의 후예로 보이는 왕건이 궁예의 髙麗계승을 이은 것은 궁예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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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 西海若
居陀가 수심에 쌓여 섬에 서 있었더니 갑자기 한 노인이 못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나는 서쪽 바다의 신이오. 매번 한 중이 해가 뜰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떠오르는데 중은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취하여 다 먹어버리고 오직 우리 부부와 딸 아이 하나가 남았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또 반드시 올 것이니 청컨대 그대가 중을 쏘아주시오”라고 하였다.
1954#17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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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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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 太祖實錄에 의하면 始祖(元德大王)·貞和王后 → 懿祖(景康大王)·元昌王后 → 世祖(威武大王)·威肅王后로 계통이 이어진다.
● 金寬毅의 編年通錄에 의하면 虎景 → 康忠 → 寶育으로 계통이 이어지다 寶育(國祖)의 딸 辰義와 唐肅宗 사이에서 作帝建(懿祖)·翥旻義 → 龍建(世祖)·夢夫人 → 王建(太祖)의 계통이 나온다.
1954#14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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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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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1
고려세계.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신 정인지가 교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고려의 선대는 기록이 빠져 자세하지 않다. 太祖實錄에 “즉위 2년에 왕의 삼대조고를 추존하여 始祖의 존시를 책봉해 올리니 元德大王이라 하고 비는 貞和王后라 하였으며, 懿祖는 景康大王이라 하고 비는 元昌王后라 하였으며, 世祖는 威武大王이라 하고 비는 威肅王后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1954#1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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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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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3
虎景이 옛 부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늘 꿈같이 와서 교합하여 아들을 낳으니 康忠이라 하였다.
집안에 천금을 쌓아두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막내는 損乎述이라 부르다가 이름을 바꾸어 寶育이라 하였다. 일찍이 꿈에 곡령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三韓의 산천이 오줌에 잠겨 은빛 바다로 변하였다. 다음날 그의 형 伊帝建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제건이 자기 딸 德周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1954#14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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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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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4 꿈
보육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언니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오줌을 누자 천하에 흘러넘친다는 꿈을 꾸었다. 동생 辰義가 비단 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훗날 당나라 肅宗이 천하를 떠돌다 보육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肅宗의 터진 옷고름을 꿰매주러 언니가 들어가다 넘어져 동생 辰義가 그 일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辰義는 肅宗과 동침하고 作帝建을 낳았다.
▐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문무왕 이야기와 유사하다.
1954#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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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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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51
당 肅宗 황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자 하여 明皇 天寶 12년 계사년 봄에 바다를 건너 浿江의 서쪽 나루터에 이르렀다.
한 달을 머무르다가 임신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지면서 말하길, ‘나는 大唐의 귀한 가문 사람이오.’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말하길,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시오.’라고 하였다. 과연 아들을 낳아 作帝建이라 불렀다. 뒤에 보육을 추존하여 國祖 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를 貞和王后라 하였다.
1954#1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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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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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6 西海龍王
한 늙은이가 나타나 절을 올리며 말했다. ‘나는 서해의 용왕이오. 늘 해질녘이 되면 어떤 늙은 여우가 치성광여래상으로 변신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구름과 안개 사이에 해와 달과 별들을 쭉 벌여놓고는 패라를 불고 북을 치는 등 풍악을 울리며 와서 이 바윗돌에 앉아 옹종경을 읽어대면 내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오. 귀공자께서는 활을 잘 쏜다고 하니 나의 괴로움을 없애주기 바라오’ 이에 作帝建이 허락했다.
▐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거타지 설화와 유사하다.
1954#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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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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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8
용녀가 돌아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신의를 지킴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제 이미 다짐을 저버렸으니 저는 여기에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어린 딸과 더불어 다시 용으로 변해 우물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만년에 속리산의 장갑사에 살며 늘 불교 경전을 읽다가 죽었다. 후에 추존하여 懿祖 景康大王이라 하고 용녀를 元昌王后라 하였다.
1954#1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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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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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92
뒤에 松嶽에서 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용모가 매우 닮아 드디어 더불어 혼인하였다.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夢夫人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그녀가 三韓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드디어 성을 韓氏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威肅王后이다.
1954#14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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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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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094
道詵이 唐에 들어가 일행의 지리법을 얻고 돌아왔다. 白頭山에 올랐다가 곡령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을 심을 땅에다 어찌하여 마를 심었는가?’라 하고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王建이라 지으시오.'라고 하였다.
세조가 그의 말을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달 威肅王后가 임신하여 太祖를 낳았다.
1954#1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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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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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東史綱目
고려 태조는 궁예와 처음부터 군신 사이가 아니요, 다 신라의 백성으로서 어지러운 때를 틈타 까마귀떼처럼 한때 서로 만났었다. 신라왕실을 도와 추대하고 북을 치며 북진하였더라면, 대의는 밝아지고 왕업도 성취되었을 것이다. 이런 계책은 세우지 않고, 한밤중에 거사하여 창황하게 왕위에 올랐던 초라한 거동은 후세에 구실이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1954#2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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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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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
왕건의 뿌리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開城王氏는 황제 顓頊의 후손 祖明이 東海를 건너와 平壤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 受兢이 箕子로부터 王氏 성을 하사 받았으며 그 먼 후손이 王建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낙랑 유민들의 묘지명에 나오는 樂浪王氏 이야기와 유사하다.
거기에는 樂浪王氏가 箕子의 후손인데 周武王이 箕子를 朝鮮에 봉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王을 성씨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王建이 호족으로 있던 開城은 원래 ...
1954#5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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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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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氏源派記(車柳氏宗譜史由來)
황제 顓頊의 후손 祖明이 東海를 건너와 平壤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 受兢이 箕子로부터 王氏 성을 하사 받았다. ▐ 이 이야기는 樂浪(平壤)이라는 공간과 箕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낙랑 유민들의 묘지명에 나오는 樂浪王氏 이야기와 유사하다. 王建이 호족으로 있던 開城은 원래 樂浪郡에 속해 있던 곳이기 때문에, 開城王氏 이야기는 王建의 뿌리도 樂浪王氏처럼 樂浪의 귀족이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1954#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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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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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 開城王氏
중국 황제 헌원의 17세손 조명이 유누와 함께 건너와 지금의 평양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이 기자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후 수극의 57세손 왕염, 그의 13세손 왕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왕몽은 신라 건국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왕몽이 정쟁을 피해 일곱째 아들 왕림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수도하면서 전, 신, 차 등으로 성을 바꾸었고 이름도 차무일로 바꾸었다. 차무일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 왕건이다.
1954#2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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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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