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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백선엽의 6·25 징비록
피어 드 실바. 그는 1959년 한국에 부임한 미 중앙정보국의 지국 책임자였다. 사무실을 찾아온 피어 드 실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4.19가 벌어지기 며칠 전쯤으로 기억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의표를 찔렀다. “백 장군…, 나서지 않으시겠느냐?” 나는 즉답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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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백선엽의 6·25 징비록
나는 그에게 실바의 제안을 말했던 모양이다. 비서실장은 내 말을 듣더니, “각하, 실바의 제안을 받아들이시죠”라고 했다. 나는 비서실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좀 더 기다려 보자. 3일만 더 기다려 보자….” 그 3일의 대답이 어떻게 나왔던 것일까. 나도 어느새 실바의 제안에 기울었던 것인가. 뚜렷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 때 어떤 결심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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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백선엽의 6·25 징비록
1979년 12.12 사태 직후 당시 미 8군을 이끌고 있던 사령관 존 위컴은 아주 흥분한 표정으로 육두문자를 사용하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쿠데타 주역 2명을 거론하며 “□□□은 그냥 나쁜 X이고 가장 나쁜 X은 ○○○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할 군부대를 쿠데타를 위해 이동시킨 것을 미국적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국가 내의 정변 수준을 뛰어넘어 국가의 명운을 담보로 군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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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백선엽의 6·25 징비록
12·12에 이어 이듬해 5·18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5공화국이 출범하고 말았다. 그들이 출범하고 난 뒤 나름대로 결실을 맺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대, 국가의 간성으로 작용해야 할 대한민국 군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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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백선엽의 6·25 징비록
개전 초 3개월이 지난 뒤 우리의 진정한 싸움 대상은 중공군이었다. 화력에서는 미군과 유엔군에 미치지 못했지만 내전과 항일전쟁의 10년에 걸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술을 펼치며 다가서던 군대였다. 국군은 사실 그들의 우회와 매복, 기습과 야습 등의 현란한 전술 때문에 기록적인 패배에 직면하곤 했다. 당시의 전쟁터에서는 “중공군이 공격해 오면 밥을 먹던 국군이 숟가락을 던지고 도망친다”는 말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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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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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백선엽의 6·25 징비록
나는 3일 만에 다시 1사단장으로 복귀했다. 2군단장으로 있다가 육군참모본부 차장으로 갔던 유재흥 소장이 불쑥 돌아와 “그냥 있던 데로 돌아가라고 그러네”라고 했다. 다급한 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매우 이상한 인사 조치였다. 당시로서는 그 영문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급했던 2군단의 상황을 유재흥 군단장에게 넘기고 다시 1사단으로 돌아왔다. 압록강의 물을 뜨는 일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압록강 물 뜨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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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백선엽의 6·25 징비록
국군 2군단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덕천과 영원으로 진출한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과 8사단은 하루 밤 사이에 사단이 주저앉았다. 앞에서 미리 소개한 대로 2군단의 주력이랄 수 있었던 6사단은 압록강에 선착해 물을 뜨다가 적의 포위에 말려 사단이 무너졌다. 한 달 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는 나머지 2개 사단이 전력을 상실함으로써 2군단 전체가 없어지는 결과를 빚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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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백선엽의 6·25 징비록
중공군은 우선 기율이 엄격했다. 여러 가지 행동수칙이 있었겠지만, 우선 민가 등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꽤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또 실제 그렇게 행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점령지에서 가능한 한 민가에서 숙영(宿營)하는 일을 피했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가에 숙영하더라도 머문 뒤의 장소를 깨끗이 정리했으며, 반드시 화장실을 청소한 뒤 떠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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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나(백선엽)는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였던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내고 있었다. 정일권 장군은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김일성이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정일권에게 “형님, 그런 생각은 얼른 접으세요. 소련을 등에 업고 있어서 저들은 공산주의를 할 겁니다. 그들은 잔인합니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마시고 남쪽으로 가시는 게 좋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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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김종필 중위는 당시 육본 정보국에 속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문관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등과 함께 1949년 12월 북한의 기습 남침 가능성에 관한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그랬던 까닭에 그는 전선 상황에 매우 민감했다. 심지어 6월 24일 38선 동향이 아주 심각해지자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에게 긴급 적정(敵情)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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