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1145)의 초기 기록은 삼국지(289)나 진서(648) 등에 나오는 정황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 기록들을 300년 뒤로 물리면 중국 사서에 나오는 정황과 잘 어울린다.
옛날에는 연도를 간지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사서를 편찬할 때 60년의 배수만큼 착오가 있을 수 있었다.
서진의 패망을 전후해서 반도의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백제와 신라 중심으로 재편되던 시기의 기록들이 300년 앞당겨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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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後漢書(445)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2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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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동부도위 폐지
광무제는 30년에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縣에 있던 우두머리를 縣侯로 삼았다. 이때 불내·화려·옥저 등의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5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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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後漢書(445)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使 屬樂浪郡 四時朝謁
한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16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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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3- 潛夫論
其後韓西亦姓韓爲衛滿所伐遷居海中
그후 한서도 역시 韓씨 성을 사용하였는데, 위만의 침공을 받아 바다 가운데로 옮겨갔다.
▐ 韓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6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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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0245 曹魏의 고려 정벌
244년에 조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은 현도에서 나와 비류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동천왕은 달아났고 관구검은 환도성을 파괴하였다. 245년에 재차 공격하자 동천왕은 옥저로 달아났고 현도태수 왕기가 그를 쫓아 숙신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16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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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曹魏의 韓 정벌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29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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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6+ 三國志(289)
공손연까지 3대가 계속 요동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역을 포기하고 해외를 맡겼다. 그 결과 동이와의 관계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었다. 237~239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되찾았다. 그러자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먼 지방까지 쫓으니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
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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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6+ 三國志(289)
遂周觀諸國 采其法俗 小大區別 各有名號 可得詳紀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다.
29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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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6+ 三國志(289)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 倭와 접한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伯濟國을 비롯한 54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 천 집인데 합하면 10여만 집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斯盧國을 비롯한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변한도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이어서 합하면 4~5만 집이다.
27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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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7 三國志(289)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에 와서 조알하였다. 2군에 전역이 있어 조세를 거둘 일이 있으면 공급케 하고 사역을 시켜 마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19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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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1~0337 ❰❰ -0020~0037 ❷樂浪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은 -20년부터 37년까지 57년 동안 13회 등장한다. 이후 266년 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304년 2월과 10월에 잠깐 등장하고는 사라진다.
-20년부터 37년까지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1년에서 337년 사이의 기록이 되어 304년의 두 기록과 잘 어울린다.
이 樂浪은 춘천에 있었던 樂浪郡의 부용국이었던 듯하다.
337년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망한 樂浪이 바로 이 樂浪일 것이다.
29737#2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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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1~0361 ❰❰ -0020~0061 ❶馬韓
馬韓이 등장하는 기록은 -20년부터 61년까지 81년 동안 10회인데, 시기가 삼국지(289)와 맞지 않는다. 9년에 망했다고 하는 馬韓의 이 기록들을, 290년까지 조공을 왔다는 진서(648)의 기록에 맞추려면 최소 300년(5주갑)을 뒤로 물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281년에서 361년 사이의 기록이 되어 그 두 사서와 잘 어울린다.
29737#29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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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4~0529 ❰❰ -0017~0229 ❸靺鞨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靺鞨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과 서로 엮여 있으므로, 樂浪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靺鞨의 기록도 그렇게 해야 한다. 靺鞨은 백제와 얽혀 -17년부터 258년까지 275년 동안 26회 나오다 258년부터 387년까지 130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4년부터 558년까지의 사건이 되어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
이 靺鞨은 철원에 있었던 이름모를 소국으로 추정된다.
29737#1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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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資治通鑑(1084)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 서진의 몰락은 마한만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낙랑군과 대방군도 쫓겨나게 만들었다.
6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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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0365 일본서기·삼국사기 기록공백
▐ 일본서기는 334~363년의 기록이 없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비슷한 시기인 348~365년의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도 백제의 기록을 참고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백제의 기록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5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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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倭의 반도 개입
倭의 군사가 반도로 건너와 百濟의 군사와 함께 동부에 있는 新羅를 치고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7국을 복속시킨 뒤, 다시 서부로 돌아 忱彌多禮 및 比利·辟中·布彌支·半古 4읍의 항복을 받아 백제에게 주었다.
2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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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7~0512 ❰❰ 0077~0212 ❹加耶
加耶에 관한 기록은 77년부터 212년까지 136년 동안 13회 나오다 213년부터 480년까지 268년 동안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加耶 기록들을 300년 뒤로 물리면 377년부터 512년까지의 기록이 되어 기록의 분포가 자연스럽게 된다.
또 그렇게 하면 신라가 浦上八國의 침공을 받는 南加羅를 구원했다는 209년의 기록이 509년의 사건이 되므로, 신라가 532년에 南加羅를 병합했다는 기록과도 어울리게 된다.
29737#16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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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太平御覽(977~983)
진서에 이르기를 382년에 신라국왕 누한이 사신 위두를 파견하여 미녀를 바쳤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는데 머리를 아름답게 늘어뜨린 사람이 많다. 길이는 한 장이나 된다.
부견이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말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하고 명칭이 바뀌었으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3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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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廣開土王陵碑(414)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안라 등이 나타난다. 이들 나라의 존재는 일본서기(720)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들 나라들은 삼국지(289) 이후 성장하여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대체한 것이다.
7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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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0503 ❰❰ 0125~0203
靺鞨은 신라와 얽혀 125년부터 203년까지 79년 동안 8회 나오다 204년부터 395년까지 192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425년부터 503년까지의 사건이 되어 기록의 분포가 자연스럽게 된다. 또 백제의 북쪽에 있었던 靺鞨이 신라를 침공하는 일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던 樂浪이 망한 337년 이후가 자연스러운데, 그것과도 어울린다.
2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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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南齊書(537)
加羅國은 三韓의 한 종족이다. 479년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夷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輔國將軍 本國王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 이로써 신라는 없고 가라만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은 조공을 해야 비로소 존재를 알게 된다.
3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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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 三國史記(1145) 新羅
이찬 이사부가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포폄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니,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진실로 그렇다고 여겨서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선비들을 모아서 편찬케 하였다.
3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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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論曰
新羅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姓을 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없앨 수가 없었다.
▐ 삼국사기는 한국에 전해 내려오던 古記, 本國古記, 三韓古記, 新羅古事, 海東古記 등의 기록들을 참고로 하여 편찬되었다. 삼국사기의 편찬 작업에는 모두 11명이 참여하였다.
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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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 기록은, 현대 천문학으로 계산해 보면, 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중국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기록들은 중국 사서의 천문 기록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기 때문에, 중국 사서의 천문 기록을 옮겨적은 것이 분명하다.
사료가 부족하여 五周甲引上으로 후대의 기록들을 끌어다 채웠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중국의 천문 기록을 가져다 채운 것이 아닐까?
29737#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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