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89 삼국지(三國志)
| R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貊)·포목·생선·소금·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http://qindex.info/d.php?c=2605#850
|
|
0643 신당서(新唐書 1060)
| R
황제의 편지를 주어 보내 고려를 나무라고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자가 채 이르기 전에 개소문이 벌써 신라의 두 성을 탈취하였다. 현장이 태종의 유지를 알리자,
“지난 날 수(隋)의 침략을 받았을 적에 신라는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아갔소. 다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중지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현장이,
“지나간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요동(遼東)은 본시 중국의 군현이지만, 천자께서는 그래도 취하지 않으시었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http://qindex.info/d.php?c=2605#41914
|
|
0644 신당서(新唐書 1060)
| R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며, “요동(遼東)은 옛 중국 땅이며 도적 막리지가 그 군주를 죽였으므로 짐(朕)이 친히 경략하려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을 하겠는데 나를 따라 나서는 아들이나 손자들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하고 곧 포(布)·속(粟)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라고 하고, 곧 포(布)·속(粟)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http://qindex.info/d.php?c=2605#41910
|
|
고려에 대한 인식
| R
한국통일 이전에는 신라와 고려가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서로를 다른 종족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은 간혹 보인다.
고려가 요동 반도를 차지한 이후 중국은 고려를 요동으로 인식하였다.
고려왕에게 처음에는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또는 요동군공(遼東郡公)의 벼슬을 내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바꾸었다. 고려왕에 대한 호칭은 고구려왕(高句麗王)에서 고려왕(高麗王)으로 바뀌었고 때로는 요동왕(遼東王)이라고도 했다.
http://qindex.info/d.php?c=2605#74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