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에 高句麗와 별개의 나라로 처음 나타난다. 고려는 광개토왕릉비에서 韓과 穢를 이민족으로 보았으며 중원비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했다. 신라 또한 고려를 이민족으로 보았으며 해동안홍기와 당시장군비 그리고 낭혜화상탑비에서 穢貊이라 했다.
중국은 고려왕에게 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내렸고 고려왕도 스스로를 遼東에 있는 신하라 했다.
당나라는 고려를 침공하기 전에 遼東은 본래 중국 땅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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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句麗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貊)·포목·생선·소금·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260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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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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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5 南齊書(537)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지난 490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 백제 동성왕의 표문인데, 여기서의 獫狁과 匈梨는 고려다.
2605#19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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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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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日本書紀(720)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즉이 장군을 수적신압산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伴跛國이 저희 나라 기문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伴跛는 가라다. 梁職貢圖(526~539)에는 叛波라 표기되어 있다.
2605#1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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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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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 日本書紀(720)
백제가 상부 나솔 과야신라와 하부 고덕 문휴대산 등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였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 여기에 나오는 狛國은 고려다. 狛은 이리라는 뜻이다.
2605#1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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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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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6 日本書紀(720)
소아대신도목숙녜 등을 왜국의 고시군에 보내어 韓人대신협둔창(여기에서 한인이란 백제를 이른다), 高麗人소신협둔창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국에 해부둔창을 두도록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각지의 한인을 대신협둔창의 전부로 삼았다. 고려인을 소신협둔창의 전부로 삼았다. 한인, 고려인을 전부로 삼은 것을 가지고 둔창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韓人과 高麗人이 구별되어 있다.
2605#4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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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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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漢世分為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為外域 故先帝疾焉 欲征之久矣 當陛下之時 安得不事 使此冠帶之境 仍為蠻貊之鄉乎
고려 땅은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누었으며 진나라 때는 요동군에 합쳤는데, 지금은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역이 되었으니 선제께서 근심하여 정벌하고자 한지 오래입니다. 폐하의 시대에 어찌 이 일을 도모하지 않고 중국 황제 땅을 오랑케 땅으로 둘 수 있겠습니까?
2605#1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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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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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0 新唐書(1060)
帝曰 高麗地止四郡 我發卒數萬攻遼東 諸城必救 我以舟師自東萊帆海趨平壤 固易 然天下甫平 不欲勞人耳
태종이 “고려의 땅은 4군 뿐이다. 우리가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면 다른 여러 성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다. 우리가 수군을 동원하여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들어 간다면 아주 쉬울 것이다.”고 하였다.
▐ 여기서 말하는 4군은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이다.
2605#14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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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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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3 新唐書(1060)
황제의 편지를 주어 보내 高麗를 나무라고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자가 채 이르기 전에 개소문이 벌써 신라의 두 성을 탈취하였다. 현장이 태종의 유지를 알리자
“지난 날 수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적에 신라는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아갔소. 다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중지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현장이
“지나간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遼東故中國郡縣 요동은 본시 중국의 군현이지만 천자께서는 그래도 취하지 않으시었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2605#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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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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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6 사기정의(사기正義 張守節)
方數千里(括地志云 朝鮮髙驪貊東沃沮五國之地國 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北至靺羯國千四百里)
괄지지에는 조선, 고려, 맥, 동옥저 등 다섯 나라의 크기가 동서 1300리고 남북 2000리인데 동쪽으로 400리를 가면 큰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 920리를 가면 영주의 경계에 다다르며 남쪽으로 600리를 가면 신라에 이르고 북쪽으로 1400리를 가면 말갈국에 이른다고 하였다.
2605#1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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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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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임의묘지명
是時 國家新破東女眞 置九城 而虜常來爭 我師屢北 元帥尹公瓘 吳公延寵 並罷就第 虜亦乞和 九年七月 授公節鉞 以今相國金公副之 往諭女眞 還侵地 諸將在外久苦戰 聞有命收兵 便雜燒器仗 欲棄城脫歸
▐ 당시 여진을 격파하고 9성을 설치하였으나 이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자 그 땅을 돌려주었는데, 이 때에 그가 사신으로 여진족을 잘 설득하여 그 후로 침입이 없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왕씨고려에서도 女眞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2605#17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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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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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 通鑑地理通釋
燕遼東郡 秦漢因之東通樂浪 晉置平州 後魏時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䕶府
연나라의 요동군은 진나라와 한나라가 계승하였고 동쪽으로 낙랑과 통한다.
晉이 평주를 설치하였다. 북위 시기의 고려가 그곳에 도읍하였으며 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 고려가 도읍하고 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곳은 낙랑이다.
2605#15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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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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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海東名賢安弘撰 東都成立記云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逰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犾(狄) 第九層獩㹮
해동의 명현 안홍이 편찬한 동도성립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이다.
▐ 日夲 日本 ┆ 中華 中華 ┆ 吳越 吳越 ┆ 乇羅 托羅 ┆ 鷹逰 鷹逰 ┆ 靺鞨 靺鞨 ┆ 丹國 丹國 ┆ 女真 女犾 ┆ 穢貊 獩㹮
2605#17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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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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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⑧ 女真
▐ 靺鞨이라는 말은 565년의 중국 기록에 사용된 것이 확인되고 있고 신라에서는 655년에 중국에 보낸 문서에서 사용된 것이 확인된다. 안홍은 615년에 수나라로 유학을 갔으므로 勿吉이 靺鞨로 불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8층도 靺鞨로 표기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6층을 靺鞨로 표기하고 8층을 靺鞨이 아닌 다른 명칭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신라가 靺鞨이라 부른 세력이 백제의 북쪽에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2605#19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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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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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⑧ 女真
▐ 女真은 구당서(945)는 물론 신당서(1060)에서도 나오지 않다가 송막기문(1156)에 와서야 나타난다. 삼국사기(1145)와 삼국유사(1281)에도 靺鞨만 나타나고 女真은 나타나지 않는데, 오직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 해동안홍기와 동도성립기에만 女真과 女犾이 나온다. 그러나 왕씨고려의 금석문에는 이미 1117년의 지석문에서 女眞이 사용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는 왕씨고려때 수정된 해동안홍기를 인용했거나 인용하면서 수정한 것이다.
2605#6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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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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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帝王韻紀
後王或號南扶餘 或稱鷹準與羅鬪 持盈日久及義慈 色醉聲酣失王度
후대의 왕이 혹 남부여라 부르기도 하였고 혹 응준이라 칭하며 신라와 겨루었네. 나라를 유지한 지 오래되어 의자왕에 미치니 여색에 취하고 음악에 흥겨워 왕의 법도를 잃었도다.
▐ 이 기록에 나오는 鷹準에 의해 삼국유사(1181)에 나오는 鷹逰가 백제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된다. 鷹準는 백제가 스스로 칭했다기보다 신라에 의해 그렇게 불려졌다고 보아야 한다.
2605#6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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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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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와 고려의 상호 인식
신라와 고려가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은 없다.
광개토왕릉비(414)에서는 광개토왕이 자신이 잡아온 韓과 穢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무덤을 돌보게 하라는 내용이 들어있고 중원고려비(449)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부르고 있으며 당시장군비(661~668)에는 穢貊이 신라를 잠식했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고 낭혜화상탑비(890~897)에는 獩貊을 도륙하기 위해 신라가 군사를 빌린다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 新羅 ➔ 高麗=穢貊 ┆ 高麗 ➔ 新羅=東夷
2605#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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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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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대한 중국의 인식
로마의 속지 Britannia와 낙랑군은 시기와 기간이 비슷하다.
중국은 435년부터 고려왕에게 遼東郡公의 작위를 내리고 있다. 고려가 옛 요동군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98년에 고려왕도 스스로를 遼東糞土臣이라 칭했다. 당태종은 640년에 高麗地止四郡이라 했고 644년에는 고려를 침공하면서 遼東故中國地라 했다. 연개소문의 두 아들 천남생과 천남산의 묘지명에는 각각 遼東郡平壤城人(679)과 遼東朝鮮人(702)이라 되어 있다.
2605#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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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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