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江의 남쪽 가에 있는 풍납토성은 漢나라 진번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漢水, 漢城 그리고 漢山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한수는 한강으로 명칭이 변했고 한산은 남한산으로 변했으며 북한산으로 불리던 산은 지금 아차산으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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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 「三國誤記」 百濟
비류는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로 돌아가 살았고 온조는 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그 후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百濟로 고쳤다.
1905#4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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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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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馬韓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1905#30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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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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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이후 三國誤記 三國志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마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마한 8국은 진번군이 폐지될 때 낙랑군으로 합쳐지지 않고 남은 8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이 자리에 세워졌었다.
1905#4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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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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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05 ⁻ ❰❰ -0018 「三國誤記」 百濟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고,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않겠나?”라고 하였다.
1905#13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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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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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05 ❰❰ -0006 三國誤記 百濟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東有樂浪 北有靺鞨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漢水之南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1905#13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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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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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古典記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髙句麗南平壤 都漢城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
▐ -18년으로부터 389년이 지난 후는 371년이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것으로 보아 이 해에 백제가 공격한 곳은 한강변의 남평양이 아니라 대동강변의 평양이 어울린다. 또 백제가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이 기록은 당시의 정황과 맞지 않는다.
1905#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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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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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三國誤記」 百濟
移都漢山✘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 古典記의 取髙句麗南平壤都漢城(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과 이 해에 있었던 백제의 평양성 침공을 연결하여 만든 이야기인 듯하다.
그러나 이전에 就漢山下立柵移慰禮城民戸(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라고 하여 이미 漢山下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이 기록은 잘못되었다.
1905#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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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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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阿旦城(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으로 비정된다.) ...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가 곤핍해져, 남녀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
1905#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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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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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漢城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阿且城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1905#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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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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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 日本書紀(720)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³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³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平壤을 대동강 유역의 平壤²으로 보기에는 정황상 무리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서울 광진구에 있었던 平壤³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1905#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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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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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의 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北漢山城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1905#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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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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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漢州
於故髙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말한다.
▐ 이 지역은 고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었다. 또 고려가 점유하기 전에는 백제의 영토였었고 그 전에는 마한의 영토였었다. 한성만 놓고 보자면 백제가 도읍한 기간이 500여년에 달하는데 비해, 고려가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1905#4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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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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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5.01 三國史記(1145)
春正月 憲昌子梵文與髙逹山賊夀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³ 攻北漢山州 都督聦明率兵 捕殺之 平壤³今楊州也 太祖製□義寺齋文 有高麗舊壤平壤³名山之句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 산적 수신 등 1백여 명과 반역을 모의하고 평양³에 수도를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니, 도독 총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를 잡아 죽였다. 평양³은 지금의 양주이다. 왕건이 지은 장의사 제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³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1905#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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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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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남경유수관 양주는 본래 고구려의 北漢山郡(南平壤城이라고도 한다)으로 백제의 근초고왕이 차지하였다. 근초고왕 25년에 南漢山에서 도읍을 옮겼다. 개로왕 20년에 이르러 고구려 자비왕이 쳐들어와서 漢城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나와 도망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그 해 아들 문주왕이 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뒤에 신라 진흥왕 15년에 北漢山城으로 와서 국경을 정하였다. 진흥왕 17년에 北漢山州를 창설하고 軍主를 두었다. 경덕왕 14년에 漢陽郡으로 고쳤다
1905#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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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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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水·漢城·漢山 고찰
백제는 '북쪽으로는 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힌'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고려는 백제의 漢城을 함락시킨 뒤 漢山 남쪽에 漢山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곳은 신라가 차지하는데 경덕왕은 이곳을 漢州로 바꾸었다.
그전에 고려는 漢水 이북을 차지하고 北漢山郡을 설치하였는데 신라는 이를 北漢山州로 바꾸었다.
이러한 명칭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 ...
1905#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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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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