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江의 남쪽 가에 있는 풍납토성은 漢나라 진번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漢水, 漢城 그리고 漢山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한수는 한강으로 명칭이 변했고 한산은 남한산으로 변했으며 북한산으로 불리던 산은 지금 아차산으로 명칭이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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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 三國史記(1145)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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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 三國史記(1145)
▐ 부아악은 지금의 북한산 인수봉이다. 이곳에 오르면 한강 전경이 이 기록에서처럼 한 눈에 보인다. 그런데 당시의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이다. 따라서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랐다(遂至漢山登負兒嶽)는 표현은 풀어야 할 문제다.
▐ 온조는 처음에 위례성에 도읍했다가 한수 남쪽으로 옮겼다. 따라서 한수 남쪽의 위례성(温祚都河南慰禮城)이란 표현도 풀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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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 @한수(漢水) @한성(漢城)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서울 송파는 북쪽으로는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남한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탄천변의 벌판을 바라본다. 다만 서쪽으로 황해가 조금 떨어져 있으나 그 사이에는 적대 세력이 살만한 공간이 없다.
이곳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자주 변경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없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묘사는 백제가 한수 이북 위례성에서 한수 이남으로 도읍을 옮길 때 했을 것으로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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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 三國史記(1145)
봄 2월에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이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서 한 번에 싸워 이겼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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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 三國史記(1145)
겨울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봉현(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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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三國史記(1145)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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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韓半島 古代史 槪念圖
서울 광진구는 영흥만에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내려오거나 춘천에서 한강을 따라 내려오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는' 조건에 부합한다. 다만 낙랑과 말갈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참고로 당시 영흥만에는 낙랑군 동부도위에 소속된 예가 있었고 춘천에는 맥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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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三國史記(1145)
‘동유낙랑(東有樂浪)’은 춘천의 토착 집단 즉, 군현의 부용 세력으로 있던 맥국(貊國)을 낙랑으로 호칭한 것과 관련이 있다(정약용, 여유당전서). 낙랑군은 춘천의 토착 세력을 내세워 분치하였는데 춘천 지역의 맥인들이 낙랑을 자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김기섭,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과 낙랑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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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이후 三國志(289)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진한 8국은 진번군이 폐지될 때 낙랑군으로 합쳐지지 않고 남은 8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이 자리에 세워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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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三國史記(1145)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 도읍을 옮기는 일은 기원전 6년에 있었을 수 있으나 여기에 기술된 백제의 강역은 삼국지(289), 진서(648) 등 중국 기록들과 모순된다. 따라서 5주갑 조정을 해서 294년의 상황으로 옮겨 생각할 필요가 있다.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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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고전기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 남쪽에 있는 평양(平壤)을 취하고 한성(漢城)에 도읍했다.
-- 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겼지만 점령하지는 않은 듯하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한지는 이때로부터 오래 전의 일이다.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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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아단성(阿旦城, 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으로 비정된다.) ...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가 곤핍해져, 남녀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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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阿且城)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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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 漢州
▐ 이 지역은 고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었다. 또 고려가 점유하기 전에는 백제의 영토였었고 그 전에는 마한의 영토였었다. 한성만 놓고 보자면 백제가 도읍한 기간이 500여년에 달하는데 비해, 고려가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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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水·漢城·漢山 고찰
백제는 '북쪽으로는 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힌'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고려는 백제의 漢城을 함락시킨 뒤 漢山 남쪽에 漢山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곳은 신라가 차지하는데 경덕왕은 이곳을 漢州로 바꾸었다.
그전에 고려는 漢水 이북을 차지하고 北漢山郡을 설치하였는데 신라는 이를 北漢山州로 바꾸었다.
이러한 명칭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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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토성
성 안에서는 집터·관청·도로·하수도 등의 자취가 발굴되었고, 유물로는 막새기와·벽돌·봉니(封泥)·거울·화폐와 화폐를 주조하였던 틀, 구리화살촉·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글자가 새겨진 기와·벽돌·거울·도장 등이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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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토성
중국계 토성은 중원지방으로부터 중국세력이 동북지방으로 뻗어나감에 따라 요동·만주지방에서 그들의 지방행정 중심지의 관아가 있는 치소에 만들어졌다. 대부분 벌판 가운데 위치하며 부근에 강이 흐르고 전망이 좋은 그리 높지 않은 둔덕에 자리잡고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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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중국에서 신석기시대 이래 사용된 토루 축조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출토된 목탄 12점에 대해 방사성탄소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그 중심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 BC 199년으로 나왔고 가장 늦은 것은 AD 231년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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