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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水┆漢城┆漢山
漢水┆漢城┆漢山
1905#32217 SIBLINGS CHILDREN 32217
 
-0018 ❶① 慰禮城
1905#4257 SIBLINGS CHILDREN 4257
 
0295 ❷ 漢山下
1905#30677 SIBLINGS CHILDREN 30677
 
0371 ❸ 漢城
1905#32922 SIBLINGS CHILDREN 32922
 
0475 ❹ 熊津
1905#32926 SIBLINGS CHILDREN 32926
 
0537 ❺ 泗沘
1905#32934 SIBLINGS CHILDREN 32934
 
1834 ⑨ 古楊州
1905#32209 SIBLINGS CHILDREN 32209
 
 樂浪郡
樂浪郡
漢나라의 樂浪郡 東部都尉의 치소가 있던 昭明이 훗날 漢城이라 불린 것처럼 漢나라의 真番郡 치소가 있던 霅縣도 훗날 漢城이라 불렸을 듯하다.
1905#1895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5
 
-0018 慰禮城
-0018 慰禮城
1905#32210 SIBLINGS CHILDREN 32210
 
0245 三國志(289) 馬韓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1905#30672 SIBLINGS CHILDREN 30672
 
0245⁺ 솔까역사 三國志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마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마한 8국은 진번군이 폐지될 때 낙랑군으로 합쳐지지 않고 남은 8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이 자리에 세워졌었다.
1905#4298 SIBLINGS CHILDREN COMMENT 4298
 
0290.07 ❰❰ -0011 솔까역사 百濟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²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²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1905#4263 SIBLINGS CHILDREN 4263
 
0291
0291
1905#32925 SIBLINGS CHILDREN 32925
 
0292 ❰❰ -0009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1905#13494 SIBLINGS CHILDREN 13494
 
0293 ❰❰ -0008 04 솔까역사 百濟
樂浪²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905#13496 SIBLINGS CHILDREN 13496
 
0293 ❰❰ -0008 07 솔까역사 百濟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²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1905#13495 SIBLINGS CHILDREN 13495
 
0295 漢水之南
0295 漢水之南
1905#32211 SIBLINGS CHILDREN 32211
 
0395.11 「솔까역사」 三國史記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次於青木嶺下 㑹大雪 士卒多凍死 迴軍至(+北)漢山城 勞軍士 왕이 패수 전투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북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469년에 青木嶺에 목책을 세우고 北漢山城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한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의 漢山城은 北漢山城의 오기로 보인다.
1905#33004 SIBLINGS CHILDREN 33004
 
0396 廣開土王陵碑(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阿旦城(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으로 비정된다.) ...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가 곤핍해져, 남녀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
1905#4256 SIBLINGS CHILDREN COMMENT 4256
 
0469 三國史記(1145)
葺雙峴城 設大柵於青木嶺 分北漢山城士卒戍之 쌍현성을 수리하였다.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우고 북한산성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905#28772 SIBLINGS CHILDREN 28772
 
0475  ~ 0561 百濟의 남하
0475 ~ 0561 百濟의 남하
1905#5499 SIBLINGS CHILDREN COMMENT 5499
 
0475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漢城¹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阿且城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1905#1911 SIBLINGS CHILDREN COMMENT 1911
 
0475 古典記
歴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即位元徴三年乙卯 移都熊川(今公州) 105년을 지나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 371년으로부터 105년이 지난 후는 475(371+105-1)년이다.
1905#1907 SIBLINGS CHILDREN 1907
 
0537 古典記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63년을 지나 26세 성왕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 475년으로부터 63년이 지난 후는 537(475+63-1)년이다.
1905#4267 SIBLINGS CHILDREN 4267
 
0561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漢城¹軍主
1905#1902 SIBLINGS CHILDREN COMMENT 1902
 
0568.10⁺ 북한산新羅진흥왕순수비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문 중에 ‘南川軍主’란 표현을 단서로 하여 568년 10월 이후로 본다. 한편 일부 학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영토로 차지한 후인 555년에 북한산을 순행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555년에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비문의 일부를 '路過漢城'으로 판독하는 학자도 있다.
1905#38056 SIBLINGS CHILDREN COMMENT 38056
 
0661.0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의 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北漢山城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1905#1924 SIBLINGS CHILDREN 1924
 
0667.10.02 三國史記(1145)
영공이 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 촌주 대나마 강심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을 거쳐 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1905#1868 SIBLINGS CHILDREN COMMENT 1868
 
0668 高句麗 漢山州
漢城郡은 漢忽이라고도 하고 息城이라고도 하고 乃忽이라고도 한다.
1905#4311 SIBLINGS CHILDREN COMMENT 4311
 
0757       漢州
0757 漢州
1905#32213 SIBLINGS CHILDREN 32213
 
0757    九州五小京
0757 九州五小京
1905#30684 SIBLINGS CHILDREN 30684
 
0757 九州五小京 漢州
於故髙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 그 다음 동쪽을 삭주, 그 다음 동쪽을 명주라고 말한다. ▐ 이 지역은 고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부터 신라의 영토였었다. 또 고려가 점유하기 전에는 백제의 영토였었고 그 전에는 마한의 영토였었다. 한성만 놓고 보자면 백제가 도읍한 기간이 500여년에 달하는데 비해, 고려가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1905#4458 SIBLINGS CHILDREN COMMENT 4458
 
0757 九州五小京 漢州
漢山郡 → 漢州 → 廣州 ┆漢州 夲髙句麗漢山郡 新羅取之 景徳王改爲漢州 今廣州
1905#30675 SIBLINGS CHILDREN 30675
 
0757 九州五小京 漢州
南川縣(南買) → 黃武縣 → 利川縣 ┆黃武縣 本髙句麗南川縣 新羅并之 眞興王爲州 置軍主 景徳王改名 今利川縣
1905#5504 SIBLINGS CHILDREN 5504
 
0757 九州五小京 漢州
1905#5505 SIBLINGS CHILDREN 5505
 
0757 九州五小京 漢州
骨衣奴縣 ➔ 荒壤縣 → 豐壤縣┆荒壤縣 夲髙句麗骨衣奴縣 景徳王改名 今豐壤縣
1905#7509 SIBLINGS CHILDREN 7509
 
0757 九州五小京 漢州
皆伯縣 ➔ 遇王縣 → 幸州┆遇王縣 本髙句麗皆伯縣 景徳王改名 今幸州
1905#21948 SIBLINGS CHILDREN 21948
 
0757 九州五小京 漢州 漢陽郡
1905#30673 SIBLINGS CHILDREN 30673
 
0825.01 三國史記(1145)
春正月 憲昌子梵文與髙逹山賊夀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³ 攻北漢山州 都督聦明率兵 捕殺之 平壤³今楊州也 太祖製□義寺齋文 有高麗舊壤平壤³名山之句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 산적 수신 등 1백여 명과 반역을 모의하고 평양³에 수도를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니, 도독 총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를 잡아 죽였다. 평양³은 지금의 양주이다. 왕건이 지은 장의사 제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³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1905#1896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6
 
0918⁺ 楊州
0918⁺ 楊州
1905#32214 SIBLINGS CHILDREN 32214
 
2000.03.11 역사스페셜
1905#32899 SIBLINGS CHILDREN 32899
 
2002.05.22 역사스페셜
1905#32956 SIBLINGS CHILDREN 32956
 
...
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2005.06.17 풍납토성
1905#32812 SIBLINGS CHILDREN 32812
 
2016 아차산성 발굴
1990년대 두 차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漢, 北漢, 國, 官 등의 명문 자료와 함께 이번에 山城, 北漢山城이라고 쓰여진 기와가 처음으로 출토됐다. 신라가 아차산성을 점유한 후 북한산성으로 부르며 운영해 왔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명문자료다. 1884년 지도에 아차산 아래에 北漢山郡(平壤)→漢陽郡→楊州가 있었다는 기록과도 부합한다.
1905#1919 SIBLINGS CHILDREN COMMENT 1919
 
北漢山(20)
1905#28766 SIBLINGS CHILDREN 28766
 
慰禮(10)
1905#32901 SIBLINGS CHILDREN 32901
 
漢城(29)
1905#33017 SIBLINGS CHILDREN 33017
 
漢山(92)
1905#28765 SIBLINGS CHILDREN 28765
 
漢水(13)
1905#30718 SIBLINGS CHILDREN 30718
 
漢水·漢城·漢山 고찰
백제는 '북쪽으로는 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힌'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고려는 백제의 漢城을 함락시킨 뒤 漢山 남쪽에 漢山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곳은 신라가 차지하는데 경덕왕은 이곳을 漢州로 바꾸었다. 그전에 고려는 漢水 이북을 차지하고 北漢山郡을 설치하였는데 신라는 이를 北漢山州로 바꾸었다. 이러한 명칭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 ...
1905#4266 SIBLINGS CHILDREN COMMENT 4266
 
漢江(6)
1905#30717 SIBLINGS CHILDREN 30717
 
負兒(2)
1905#33045 SIBLINGS CHILDREN 33045
 
낙랑토성
성 안에서는 집터·관청·도로·하수도 등의 자취가 발굴되었고, 유물로는 막새기와·벽돌·封泥·거울·화폐와 화폐를 주조하였던 틀, 구리화살촉·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글자가 새겨진 기와·벽돌·거울·도장 등이 많이 나왔다.
1905#5513 SIBLINGS CHILDREN COMMENT 5513
 
남한산성 전망
남한산성 전망
가운데에 있는 높은 건물 왼쪽에 삼전도비가 있다. 인조가 여기에서 내려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禮)를 행한 곳이다. 오른쪽 가운데에 있는 산이 아차산이다. 장수왕의 장수가 그 아래서 개로왕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向王面三唾) 죽였다. 아차산 아래로 한강이 흐르는데, 건너면 바로 풍납토성이다. 아신왕이 광개토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跪王) 항복한 곳이다.
1905#32193 SIBLINGS CHILDREN 32193
 
말갈
말갈
1905#4278 SIBLINGS CHILDREN 4278
 
아차산성 장대지
아차산성 장대지
1905#6200 SIBLINGS CHILDREN COMMENT 6200
 
중국계 토성
중국계 토성은 중원지방으로부터 중국세력이 동북지방으로 뻗어나감에 따라 요동·만주지방에서 그들의 지방행정 중심지의 관아가 있는 치소에 만들어졌다. 대부분 벌판 가운데 위치하며 부근에 강이 흐르고 전망이 좋은 그리 높지 않은 둔덕에 자리잡고 평면 형태는 대부분 방형이다.
1905#5506 SIBLINGS CHILDREN COMMENT 5506
 
풍납토성
중국에서 신석기시대 이래 사용된 토루 축조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출토된 목탄 12점에 대해 방사성탄소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그 중심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 BC 199년으로 나왔고 가장 늦은 것은 AD 231년으로 나왔다.
1905#5514 SIBLINGS CHILDREN COMMENT 5514
 
한양이란 이름의 비밀
신라의 북독은 양나루인 漢山河(한산하)였고, 동독은 영일군의 곡강천 또는 형산강 하류로 추정되는 吐只河(토지하), 남독은 양산군 낙동강가의 가야나루에 있었던 黃山河(황산하), 서독은 공주의 금강에 있었던 熊津河(웅진하)였다.
1905#4293 SIBLINGS CHILDREN COMMENT 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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