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012 高句麗 > 0668 고려의 해체

왕조, 백성 그리고 영토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고려가 망한 후 고려 왕조를 구성했던 지배세력은 대부분 당나라의 귀족이나 관리로 편입되었고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 일반 사람들도 대부분 당나라로 사민을 당했다. 그러나 맥, 예, 옥저, 부여 등 대부분의 고려 영토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高句麗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 邊衆
중국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 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여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여만 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여만 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여만 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4617 SHARED COMMENT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유민의 동향
고려 유민을 (1) 당에 의해 중국 내지로 끌려간 사람, (2) 신라로 넘어간 사람, (3) 요동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 (4) 부여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 (5)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4639 SHARED COMMENT
 
0668 舊唐書(945)
고려국은 지난날에 5부로 나뉘어져 176성 69만 7천호가 있었다.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하고 또 안동도호부를 두어 총관케 하였다. 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 자사 및 현령을 제수하여 화인(華人)과 함께 백성을 참리하게 하였다. 이어서 좌무위대장군 설인귀를 보내어 군사를 통괄하고 진무케 하였다. 그 뒤에 흩어져 도망간 자가 상당히 있었다.
15078 SHARED
 
0668 舊唐書(945)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即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고려는 부여의 별종에서 나왔다. 도읍은 평양성인데 한나라 낙랑군 옛 땅이다. 장안에서 5100리다.
15992 SHARED
 
0668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總章元年九月 司空李勣平高麗 高麗本五部 一百七十六城 戶六十九萬七千 其年十二月 分高麗地為九都督府 四十二州 一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統之 用其酋渠為都督 刺史 縣令 令將軍薛仁貴以兵二萬鎮安東府
39629 SHARED COMMENT
 
0668.09 新唐書(1060)
장(藏 보장왕)과 남건 등을 사로잡고 5부의 176성과 69만호를 몰수하였다. 조서를 내려 적(勣)에게 지름길을 택하여 소릉(당태종의 무덤)에 헌부하고 개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39630 SHARED COMMENT
 
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4513 SHARED COMMENT
 
0668.12 舊唐書(945)
總章元年九月 司空李勣平高麗 高麗本五部 一百七十六城 戶六十九萬七千 其年十二月 分高麗地為九都督府 四十二州 一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統之 用其酋渠為都督刺史縣令 令將軍薛仁貴以兵二萬鎮安東府
20393 SHARED
 
0668.12 舊唐書(945)
668년 9월에 사공 이적이 고려를 평정하였다. 고려는 본래 5부 176성 697,000호다. 그해 12월에 고려 땅을 갈라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만들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 우두머리를 도독, 자사 그리고 현령으로 기용하고 령장군 설인귀로 하여금 2만 병력으로 안동부를 뒷받침하게 하였다.
15991 SHARED
 
0668.12 新唐書(1060)
그 나라의 땅을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분할하였다.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추거(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 자사, 령에 각각 제수하여 화관(華官)과 더불어 참치하게 하였다. 설인귀를 도호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케 하였다.
39631 SHARED COMMENT
 
0668.12 舊唐書(945)
初置領羈縻州十四 戶一千五百八十二 처음 설치했을 때는 기미주가 14주였고 호가 1582호였다.
20642 SHARED
 
0668.12 舊唐書(945)
▐ 茂州都督府 羈縻州十(무주도독부 기미주 10)이나 戎州都督府 羈縻州十六(융주도독부 기미주 16)의 사례를 볼 때, 初置領 羈縻州十四는 668년의 설치를 말하는 듯하다.
20435 SHARED
 
0669 新唐書(1060)
고려민 3만명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고려의 대장 겸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에서 쳐부수고 신라의 원병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로하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 수가 1만에 이르렀다. 평양의 패잔병들은 신라로 망명하였다.
26575 SHARED COMMENT
 
0669.05 舊唐書(945)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車一千八十乘,牛三千三百頭,馬二千九百匹,駝六十頭,將入內地,萊、營二州般次發遣,量配于江、淮以南及山南、並、涼以西諸州空閒處安置。고려의 2만 8천호와 수레 1천 80승, 소 3천 3백두, 말 2천 9백필, 낙타 60두를 내지로 끌고 왔다. 내주, 영주 2주 백성을 보내어 강회 이남과 산남에 병주, 양주의 서쪽 빈터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34917 SHARED COMMENT
 
0670.04 三國史記(1145) 문무왕 10년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大兄) 모잠(牟岑)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 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大臣)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26574 SHARED COMMENT
 
0676 舊唐書(945)
上元三年二月 移安東府於遼東郡故城置 요동군 옛 성으로 안동부의 치소를 옮겼다.
15079 SHARED
 
0676 舊唐書(945)
去京師四千六百二十五里 至東都三千八百二十里 장안에서 4625리고 낙양에서 3820리다. ▐ 동일 사서에서 장안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5100리라 하였으므로 장안에서 4625리는 분명 평양까지가 아니다. 신당서(1060)에서 양평을 안동도호부의 대표 치소로 여긴 것으로 보아 이 4625리도 양평까지의 거리인 듯하다. 후한서(445)에서 낙양에서 양평까지 3600리라 되어 있어 여기에 나오는 3820리와 비슷하므로 이를 뒷받침한다.
1940#16006 SHARED
 
0676.686 舊唐書(945)
676년과 678년 사이에 보장왕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서 살며 본번을 진무하는 주로 삼았다. 보장왕은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로 유배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과 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39627 SHARED COMMENT
 
0677 新唐書(1060)
보장왕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보장왕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여 공주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들은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노약하고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예전의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26576 SHARED COMMENT
 
0677 舊唐書(945)
儀鳳二年 又移置於新城 신성으로 치소를 옮겼다.
15080 SHARED
 
0679~0779 고려유민 묘지명
▐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후손인 천남생, 천남산 그리고 천헌성의 무덤은 모두 낙양에 있다. 이들의 성이 泉인 이유는, 당나라에 투항한 후 당나라 초대 황제 李淵의 이름으로 쓰인 한자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 천남생에 대해서는 遼東郡平壤城人이라 하고 천남산에 대해서는 遼東朝鮮人이라 하였으며 천헌성에 대해서는 其先高句驪國人이라 하여 고려를 요동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40#1749 SHARED COMMENT
 
0685.820 新唐書(1060)
685년과 688년 사이에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698년과 699년 사이에 좌응양위대장군에 진수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에 봉하여 안동구부를 통섭시키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이듬해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이 뒤로 조금씩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806년과 820년 사이에 사자를 보내어 악공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26577 SHARED COMMENT
 
0690.691 舊唐書(945)
당시의 혹리 내준신이 일찌기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여 답을 아니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준신의 원한을 사게 되어 모반했다고 무고하므로 목졸라 죽였다. 뒤에 측천무후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에 추증하고 예을 갖추어 개장하였다.
39628 SHARED COMMENT
 
0698 舊唐書(945)
698년에 (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에 진수시키고 충성국왕에 봉하였다. 안동의 구호를 맡겨 통섭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699년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동에 있는 고려의 구호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과 말갈 등에게로 흩어지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34915 SHARED COMMENT
 
0698 舊唐書(945)
聖歷元年六月 改為安東都督府 안동도독부로 고쳤다.
6534 SHARED
 
0705 舊唐書(945)
神龍元年 復為安東都護府 안동도호부로 되돌렸다.
15082 SHARED
 
0714 舊唐書(945)
開元二年 移安東都護於平州置 안동도호의 치소를 평주로 옮겼다.
15086 SHARED
 
0741
0741
20643 SHARED
 
0743 舊唐書(945)
天寶二年 移於遼西故郡城置 요서의 옛 군성으로 치소를 옮겼다.
15101 SHARED
 
0758+ 舊唐書(945)
至德後廢 758년 이후 폐지했다.
15111 SHARED
 
0926 貊·濊·沃沮·夫餘
0926 貊·濊·沃沮·夫餘
漢五郡 = 樂浪郡+眞番郡+臨屯郡+玄菟郡+遼東郡 ➔ 高麗 = (貊+濊+沃沮+夫餘) + (樂浪+帶方+遼東) ➔ 渤海 = 高麗 - (樂浪+帶方+遼東) + 靺鞨 = (鴨淥府+南海府+柵城府+扶餘府) + 靺鞨 ➔ 女眞
8555 SHARED
 
帶方
帶方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자, 신라는 694년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고 713년에 개성을 쌓았으며 735년에 당(唐)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통치를 허용받은 뒤, 748년에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이어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6개 성을 쌓고 782년에는 한산주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826년에는 우잠 태수로 하여금 패강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2537 SHARED COMMENT
 
고려와 百濟 사민
李正己王思礼王毛仲高仙芝黑齒常之
 
안동도호부
13831 SHARED
 
¦고려인의 사민
패망 당시 고려에는 69만 호가 있었는데 이중 15만 호가 고려인이었다. 인구로는 70여만 명이 되는데, 이 중 30여만 명은 당나라 내 각지로 흩어지고 10여만 명은 신라로 왔으며 10여만 명은 말갈로 갔고 1만여 명은 돌궐로 갔다.
2536 SHARED COM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