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 백성 그리고 영토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고려가 망한 후 고려 왕조를 구성했던 지배세력은 대부분 당나라의 귀족이나 관리로 편입되었고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 일반 사람들도 대부분 당나라로 사민을 당했다. 그러나 맥, 예, 옥저, 부여 등 대부분의 고려 영토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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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 三國史記(1145) 三國
노인이 이에 “자네는 어리지만 삼국을 병합할 마음(并三國之心)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장하지 아니한가?”라고 하며 곧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게. 만약 의롭지 못한 데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네.”라고 말하였다. 말을 끝마치고 작별하였는데 2리 정도 갔을 때 쫓아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있어 오색과 같이 찬란하였다.
1940#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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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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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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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1940#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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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12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高麗本五部 一百七十六城 戶六十九萬七千 其年十二月 分高麗地為九都督府 四十二州 一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統之 用其酋渠為都督刺史縣令 令將軍薛仁貴以兵二萬鎮安東府
고려는 본래 5부 176성 697,000호다. 그해 12월에 고려 땅을 갈라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만들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 우두머리를 도독, 자사 그리고 현령으로 기용하고 령장군 설인귀로 하여금 2만 병력으로 안동부를 뒷받침하게 하였다.
1940#20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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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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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9 新唐書(1060)
고려민 3만명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고려의 대장 겸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에서 쳐부수고 신라의 원병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로하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 수가 1만에 이르렀다. 평양의 패잔병들은 신라로 망명하였다.
1940#26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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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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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 舊唐書(945) 安東都護府
去京師四千六百二十五里 至東都三千八百二十里
장안에서 4625리고 낙양에서 3820리다.
▐ 동일 사서에서 장안에서 평양까지 거리가 5100리라 하였으므로 장안에서 4625리는 분명 평양까지가 아니다. 신당서(1060)에서 양평을 안동도호부의 대표 치소로 여긴 것으로 보아 이 4625리도 양평까지의 거리인 듯하다. 후한서(445)에서 낙양에서 양평까지 3600리라 되어 있어 여기에 나오는 3820리와 비슷하므로 이를 뒷받침한다.
1940#3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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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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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7 新唐書(1060)
보장왕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보장왕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여 공주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들은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노약하고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예전의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1940#3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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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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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79 고려유민 묘지명
▐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후손인 천남생, 천남산 그리고 천헌성의 무덤은 모두 낙양에 있다. 이들의 성이 泉인 이유는, 당나라에 투항한 후 당나라 초대 황제 李淵의 이름으로 쓰인 한자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 천남생에 대해서는 遼東郡平壤城人이라 하고 천남산에 대해서는 遼東朝鮮人이라 하였으며 천헌성에 대해서는 其先高句驪國人이라 하여 고려를 요동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40#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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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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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0.29 김정일
신라는 당나라침략자들과 결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하나의 통일적인 주권국가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땅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이 창건되여 200여 년 동안 존재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령토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주권국가인 발해와 신라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1940#3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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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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帶方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자, 신라는 694년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고 713년에 개성을 쌓았으며 735년에 당(唐)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통치를 허용받은 뒤, 748년에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이어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6개 성을 쌓고 782년에는 한산주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826년에는 우잠 태수로 하여금 패강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194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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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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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통일인가?
앞서 삼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의미는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였고 두 번째 의미는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를 통틀어 일컫는 의미였다.
신라의 통일영역은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의 영역을 합친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첫 번째 의미의 삼한을 적용하여 삼한통일이라 부르는 게 타당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676년 당시에는 이미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은 없어진 지 수 백 년이 지난 후였 ...
1940#3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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