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 良女 → 寡婦┆왕고때 召史는 집에서 딸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신분이 높은 여성은 시집간 후에 성씨에 氏가 붙여져 불리는 바람에 召史로 불리는 여성은 대부분 신분이 낮은 여성들이었다.
이조에 들어와 신분이 낮은 여성도 성씨를 가진 사람이 생겨나자 그 성씨에 氏처럼 召史를 붙였다.
그런데 여성이 사회적 관계의 주체가 되는 경우는 과부인 경우가 많아 召史로 불린 여성들 대부분은 과부였다.
그래서 일조시대에는 召史가 과부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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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 巴只·召史
┆故母高敞郡夫人吳氏┆故妻楊州郡夫人陳氏┆故母中原郡夫人梁氏┆一男信忠┆一女召史┆二女召史┆二男巴只改名信英┆三男巴只改名信和┆五男巴只改名信綏
❶ 왕씨고려때 巴只와 召史는 집에서 아들과 딸을 부르는 말이었다. 이름처럼 쓰였는데, 아들이 자라면 한자로 된 새 이름을 만들어 주고 딸이 시집을 가면 사람들이 성씨에 氏를 붙여 불렀다.
26157#26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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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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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 太宗實錄
전조의 제도를 승습하여 各司의 奴婢 童男을 巴只라고 칭하여 안에서 소제하고 여자를 水賜伊라고 칭하여 번갈아 출입하여 궁중의 말들을 외부에 들리게 하니, 내가 심히 미편하게 생각한다. 東殿의 파지는 일찍이 소녀로써 대신시켰으니 大殿의 파지도 다만 환자로 대신시키고 무수리도 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어떠하겠는가?
26157#2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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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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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 世祖實錄
▐ 98명의 난신에 연좌된 174명의 부녀가 등재되어 있다. 성씨에 氏를 붙여 부인을 표기하는 방식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연좌로 인해 신분이 떨어진 것을 반영한 듯하다.
이 기록에 나오는 부녀의 이름은 같은 이름이 많아 召史의 경우 전체의 10% 정도나 된다. 원래 召史는 집에서 딸을 부르던 말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자매간에는 중복되지 않도록 이름이 다양하게 변했으나 여전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26157#26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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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1557 孫光曙
▐ 奴子莫達妻召史의 召史는 남편이 奴라는 사실로 보나 妻+召史라는 표기의 구조로 보나 이름이 분명하다.
百姓朴軍才妻良女召史, 李承宗妻召史, 故孫寅妻驛女召史, 孫斤守妻乻非 그리고 故金待生妻召史(良女召史)의 召史는 남편의 신분이 奴보다 조금 높으나 역시 관계를 나타내는 보통명사 妻나 신분을 나타내는 보통명사 良女에 붙어 있어 이름일 듯하다.
26157#26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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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 召史
▐ 吏曹書吏 朴世榮이 처 金召史가 죽자 장례비를 마련하기 위해 처가 물려받은 밭을 파는 계약서다.
이 기록은 여성의 성씨에 召史가 붙는 사례로는 현재까지 확인된 것 중에서 가장 앞선다.
이후의 기록에서 여성의 성씨에 氏나 召史가 아닌 이름이 붙는 사례가 없기 때문에 여성의 성씨에 붙는 召史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6157#2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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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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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 召史 ⪢⪢
❷ 원래 召史는 신분에 상관없이 여성의 이름으로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높은 신분의 여성은 성씨에 氏를 붙여 부르고 성씨가 없는 낮은 신분의 여성은 이름으로 부르다 보니, 召史란 이름으로 표기되는 여성은 모두 신분이 낮은 여성이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召史를 신분이 낮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인식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성씨가 있는 여성들에게는 높은 신분의 여성에게 붙이는 氏를 붙이지 못하고 召史를 붙인 것이다.
26157#26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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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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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1860 氏·召史·姓
양반가를 중심으로 한 상류층 기혼 여성은 성 뒤에 氏라는 호칭을, 평민층은 召史, 향리와 중인을 위시한 중간층은 姓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1678년 각각 22%와 65.4%였던 召史로 불린 여성과 이름을 쓰는 여성은 1860년 각각 4.7%와 1%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16~7세기 하나의 계층으로 자리 잡은 중인들이 스스로를 평민층과 구분 짓기 위해 18세기 중엽부터 쓰기 시작한 姓도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사용비율이 크게 낮아졌다.
26157#26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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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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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1783 李召史→李姓→李氏→李姓
경상도 단성현(오늘날 경남 산청군) 도산면에 살았던 평민 남성 김광오의 부인은 1759년 李召史로 불리다가 3년 뒤 남편의 직역이 중간층인 業儒(유학을 닦는 서자)로 상승하면서 李姓으로 바뀐다. 1780년 남편이 상류층인 幼學(벼슬 없는 유생)이 되자 李氏로 불리다가 1783년 남편이 중간층 校生(평민 출신으로 향교에 다니던 생도)으로 신분이 낮아지자 다시 李姓으로 내려갔다.
26157#2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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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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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중추원 조사자료
上南面 禮林洞申月山은 아들이 일찍 죽고 과부는 있었지만 역시 뒤에 죽었다. 이에 다시 從姪인 鉉振을 次養하고 재산을 관리케 했다. 이번에 鉉振의 명의로 토지 소유를 신고하고, 戶主로 호적에 올렸다고 한다.
단, 옛 관습에 여자는 이름이 없었고, 양반가에서는 召史로 호적에 올리는 것을 꺼려해서 次養子의 명의로 올렸다고 한다.
▐ 山月은 기생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李山月처럼 일반인으로 보이는 이름도 있다.
26157#2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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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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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중추원 조사자료
絶家 후에 가족이 있어도 一家를 창립할 수 없다. 단 과부가 있으면, 과부가 金家이면 金召史라고 부르고, 그 家産을 승계하여 그 家를 유지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 경우 여자가 있으면 물론 金召史의 家에 입적한다고 한다. 여자는 호주로 될 수 없지만, 絶代일 경우에 한하여 호주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유산은 과부가 승계하고, 과부가 사망하면 亡夫의 근친이 승계하여 死者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26157#2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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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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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召史
❸ 남편이 있는 부인은 사회적 관계의 주체가 되지 못해 사회적으로 언급될 일이 적었다. 그러나 寡婦는 불가피하게 사회적 관계의 주체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사회적으로 언급될 일이 많았다. 그 결과, 召史로 불린 여성들 대부분은 寡婦였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기록을 살펴보다 이것을 보고 召史를 寡婦로 오인하게 되었고 그 잘못된 인식이 식민지 사회로 퍼져나간 듯하다. '조이'라 읽히던 이두식 발음이 한자음 '소사'로 바뀐 것도 이때일 것이다.
26157#2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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