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金城東南②月城(在城 1000)┆③新月城北有④滿月城(1800)┆東有⑤明活城(1900)┆南有⑥南山城(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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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三國史記(1145)
왕이 밤에 金城의 서쪽 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2009#28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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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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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活城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과 천군동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성에 비정(比定)된다. 명활성은 본서 신라본기에 6차례, 제사지와 지리지에 각각 1차례, 김유신전에 1차례 등장하며, 『삼국유사』 등에도 나타나 있다. 신라본기에는 명활성이 실성이사금 4년(405)과 눌지마립간 15년(431)에 왜병(倭兵)의 침입과 관련하여 처음 등장하며, 자비마립간 16년(473)에는 성을 수리[葺]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동왕 18년 명활성으로 이거하여 소지마립간 10년(48 ...
2009#28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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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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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城
신라 대부분 시기의 궁성(宮城)으로 현재의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본서 신라본기에 의하면 월성은 원래 호공(瓠公)의 집으로 탈해(脫解)가 길지(吉地)라고 여겨 빼앗아 거주한 곳이다. 파사이사금 22년(101)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으며 왕이 옮겨가 살았다. 자비마립간 18년(475)에는 왕이 명활성으로 이거했으며, 소지마립간 9년(487) 월성을 수리[葺]하고 이듬해 다시 월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은 기본적으로 월성에 기거 ...
2009#28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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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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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月城
(신)월성의 북쪽에 가축(加築)된 성. 월성 북쪽에 위치한 독립된 성으로 보는 견해와 월성 북쪽에 가축된 성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는데, 최근에는 후자가 지지를 받고 있다. 박방룡은 삼국시대 후반부터 중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왕궁이 월성만으로 좁았기 때문에 안압지 동쪽에서부터 천주사지와 첨성대를 포함한 나물왕릉 동쪽 부근까지 궁성지를 넓혔으며 이때 그 주위를 토장성벽(土墻城壁)으로 둘렀고 이것이 만월(滿月)과 같은 모양이어서 만월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
2009#28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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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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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城
경주 지역에 있었던 신라 왕성으로, 정확한 위치는 미상. 금성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초기 기사와 『구당서(舊唐書)』 및 『신당서(新唐書)』의 신라전 등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 있다. 먼저 중국 사서에는 신라가 금성에 도읍한다거나(『翰苑』 蕃夷部 新羅 注 所引 『括地志』), 왕이 거처하는 곳을 금성이라 하고 둘레가 7~8리, 위병(衛兵)이 3,000인이라 하여(『구당서』 및 『신당서』의 신라전), 금성을 신라의 도성 내지 왕이 거처하는 구체적인 성 ...
2009#28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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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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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혁거세 21년(기원전 37)에 금성(金城)을 쌓고 경성으로 삼았으며, 제5대 파사니사금 22년(101)에 월성(月城)을 쌓고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또 기원전 32년에는 금성 안에 궁실을 지었는데 이때 지은 궁실은 143년, 196년, 314년에 수리되었다. 314년에는 궁실이라 하지 않고 처음으로 ‘궁궐’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금성은 둘레에 동서남북 4문을 둔 궁성으로 성안에는 그 시기 ...
2009#26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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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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