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 수성 그리고 갈석산 모두 두 곳 이상의 지명에 사용되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여러가지 괴이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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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 -1600 사기(-91) 碣石
鳥夷皮服夾右碣石入于海
우는 기주에서 일을 시작했다. 호구산을 다스리고 양산과 기산을 다스렸다. 태원을 다스리고 태악산 남쪽에까지 이르렀다. 담회에서 공을 이룬 다음 장하에 이르렀다. 이곳의 땅은 희고 기름져 세금을 내는 등급으로 1등급, 전답은 5등급이었다. 상수와 위수가 물길대로 흐르고 대륙택도 조성되었다. 조이의 공물은 가죽옷인데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바다로 들어갔다.
-- 集解鄭玄曰 鳥夷東(北)[方]之民(賦)[搏]食鳥獸者
-- 鳥夷 孔安國曰 服 ...
6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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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 -1600 사기(-91) 碣石
太行常山至于碣石入于海
아홉 개 산맥을 개통했다. 견산과 기산은 황하를 넘어 형산까지 이어진다. 호구산과 뇌수산은 태악산까지 이어진다. 지주산과 석성산은 왕옥산까지 이어진다. 태행산과 상산은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서경산, 주어산, 조서산은 화산까지 이어진다. 웅이산, 외방산, 동백산은 부미산까지 이어진다. 파총산에 길을 내서 형산까지 이르게 했다. 내방산은 대별산까지 이르고, 문산의 남쪽은 형산까지 이르는데, 구강을 지나서 부천원에 이른다.
...
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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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 사기(-91) 碣石
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이,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서쪽으로는 운중과 구원이, 남쪽으로는 호타하와 역수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에 갑옷을 두른 병사가 수십 만, 전차가 600승, 전투마가 6,000필, 비축된 식량은 몇 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남으로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창고라는 것이지요.
6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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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5 사기(-91)
二年又抜我二城軍大梁下韓來救予秦温以和
안희왕 2년에 또 진나라가 위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대량에 군을 주둔시켰다. 한나라가 구원하러 왔으나 온(溫)을 진나라에 주고 강화했다.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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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3 사기(-91) 武遂
李牧将攻燕抜武遂方城
이목이 장수가 되어 연나라를 공격하여 무수와 방성을 함락시켰다.
-- 武遂 集解徐広曰 武遂属安平
-- 正義括地志云 易州遂城 戦国時武遂城也 方城故在幽州固安県南十七里 時二邑属燕 趙使李牧抜之也
6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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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사기(-91) 碣石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壞城郭決通隄防
시황이 碣石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을 시켜서 선문과 고서를 찾게 했다. 갈석의 문에다 비문을 새겼다.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텄다.
-- 羨門 集解韋昭曰 古仙人
-- 高誓 正義亦古仙人
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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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사기(-91)
築長城因地形用制険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을 내쫓고, 하남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을 통제할 수 있게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걸쳐 있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으로 나아갔다. 10년 넘게 군대는 외지를 전전하다 상군에 주둔하기에 이르렀고, 이 무렵 몽염의 위세는 흉노를 떨게 했다.
5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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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진나라 전후 상황
사기(BC91)에는 진나라가 조선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키고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고만 되어 있다. 진나라가 요동 외요에 속했을 낙랑 수성까지 장성을 연장했을 가능성은 낮다.
6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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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遼東郡 縣十八 襄平 新昌 無慮 望平 房 候城 遼隊 遼陽 險瀆 居就 高顯 安市 武次 平郭 西安平 文 番汗 沓氏
요동군(55972호,18현) - 양평,신창,무려,망평,방,후성,요대,요양,험독,거취,고현,안시,무차,평곽,서안평,문,번한,답씨
6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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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遼西郡 縣十四 且慮 海陽 新安平 柳城 令支 肥如 賓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
요서군(72654호,14현) - 차노,해양,신안평,유성,영지,비여,빈종,교려,양락,호소,도하,문성,임유,누
6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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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中山國 縣十四 盧奴 北平 北新成 唐 深澤 苦陘 安國 曲逆 望都 新市 新處 毋極 陸成 安險
중산국(160873호,14현) - 노노,북평,북신성,당,심택,고경,안국,곡역,망도,신시,신처,모극,육성,안험.
6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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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燕은 尾星과 箕星의 분야다. 무왕이 殷을 평정하고 소공을 燕에 봉했다. 그후 36세가 지나 다른 6국과 함께 왕을 칭했다. 동부에는 어양,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이 있고 서부에는 상곡, 대군 그리고 안문이 있다. 남쪽으로는 탁군의 역, 용성, 범양, 北新城, 고안, 탁현, 양향, 新昌 그리고 발해의 안차까지 모두 燕이다. 낙랑과 현도 또한 燕에 속한다.
▶낙랑 및 현도를 동부의 어양,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과 별도로 언급했다.
1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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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ᑅ 한서(82) 新昌
燕地尾箕分野也
武王定殷 封召公於燕
其後三十六世與六國俱稱王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
西有上谷代郡雁門
南得涿郡之易容城范陽北新城故安涿縣良鄉新昌 及勃海之安次 皆燕分也
樂浪玄菟亦宜屬焉
6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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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이전 한서(82)
西連諸國至于安息東過碣石以玄菟樂浪為郡
서쪽으로는 여러 나라를 연결하여 안식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갈석을 지나 현도와 낙랑에 군을 설치했다.
▶현도와 낙랑이 갈석의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는 한사군 중에서 진번과 임둔은 폐지된 뒤고 대방은 설치되기 전이다.
안식은 한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던 Parthian Empire(-247~224)를 말한다.
1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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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 ᑅ 후한서(445) 新昌
幽州 辽东郡 襄平 新昌 无虑 望平 候城 安市 平郭有铁 西安平 汶 番汗 沓氏
유주 요동군(11성,64158호) - 양평,신창,무호,망평,후성,안시,평곽,서안평,문,번한,답씨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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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0~0289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시작된다.
▶태강지리지는 여러 사서에 인용된 형태로 존재하는데 289년 이후에 있었던 일까지 포함하고 있어 후대에 추가된 내용도 있다. 이 기록도 그러한 의심을 받고 있다.
▶통전(801)에는 (1) 樂浪遂成의 碣石山에서 秦長城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와 (2) 武遂城에서 秦長城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모두 기록해 놓았다.
태강지리지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1)에 속한다.
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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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0~0289 진서(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진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6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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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0~0289 武遂城
상산에서 갈석산에 이르는 산악 지역이 북방 오랑캐를 막는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었다. 이 선은 당빈이 방어의 책임을 맡은 유주의 북계이기도 하다.
상산에서 온성까지는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는 구간이었다. 중국 역대 장성 지도에도 이 구간에는 장성이 없다.
그리고 온성은 서진의 도읍인 낙양 인근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장성이 끝난다는 점도 어색하다. 도읍의 방어가 가장 중요한 일 아닌가?
당빈의 장성은 武遂城 인근의 五阮關까지만 왔을 가능성이 있다.
1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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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0~0289 西晉
온성에서 갈석까지는 대체로 서진의 북쪽 경계와 일치한다. 그러나 진나라와 서진의 북방 영역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서진이 진장성을 복구할 수는 없었다. 당빈의 업적을 꾸미기 위해 진장성이란 표현이 들어간 듯하다.
3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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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0~0289 長城
노란색 선이 진나라와 그 이전의 나라들이 쌓은 장성이다. 당빈이 온성에서 갈석까지 쌓았다는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그리고 당빈이 쌓았다는 장성의 구간 중에서 상산에서 온성까지는 전후를 통틀어 장성이 없다.
5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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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534 위서(554) 新昌
營州領郡六縣十四昌黎郡領縣三龍城廣興定荒建德郡領縣三石城廣都陽武遼東郡領縣二襄平新昌樂良郡領縣二永洛帶方冀陽郡領縣二平剛柳城營丘郡領縣二富平永安
영주(6군,14현) - 창려군(201호,용성,광흥,정황), 건덕군(200호,석성,광도,양무), 요동군(131호,양평,신창), 낙랑군(219호,영락,대방), 기양군(89호,평강,유성), 영구군(182호,부평,영안).
6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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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534¦營州 南營州 平州
위서의 영주, 남영주 그리고 평주는 다른 주군현의 호구수와 비교해 볼 때 실질적인 행정기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의 주군현은 군단위의 호수가 수만을 넘어가는 곳이 많다. 그렇다면 이들 주군현은 대한민국의 이북5도청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북5도청도 이북에 없고 서울 종로에 있으며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맡지 않고 있다.
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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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수경주(水經注)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 起自臨洮 至于碣石 即是城也
진시황이 태자 부소에게 명하여 몽염과 함께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까지 이르렀다. 이 성이 바로 그것이다.
▶사기(-91)에는 진장성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당빈(235~294)이 갈석까지 장성을 복구하였는데 진장성을 복구한 것으로 추켜지면서 진장성이 갈석에서 시작된 것으로 착각하게 된 듯하다.
1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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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3 위서(554)
南營州(孝昌中營州陷永熙二年置寄治英雄城 효창 연간에 영주가 무너지자 영희 2년에 영웅성에 임시 치소를 두었다.)
領郡五縣十一昌黎郡領縣龍城廣興定荒遼東郡領縣二太平新昌建德郡領縣石城廣都營丘郡領縣三富平永安帶方樂良郡領縣一永樂
남영주(5군,11현) - 창려군(509호,용성,광흥,정황), 요동군(565호,태평,新昌), 건덕군(178호,석성,광도), 영구군(512호,부평,영안,대방), 낙랑군(49호,영락).
6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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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0577 요서군의 등장과 소멸
▶한서의 요서군 14현 (且慮,海陽,新安平,柳城,令支,肥如,賓從,交黎,陽樂,狐蘇,徒河,文成,臨渝,絫). 후한서의 유주 요서군 5성 (阳乐,海阳,令支,肥如,临渝). 진서의 유주 요서군 3현 (陽樂,肥如,海陽). 위서의 평주 요서군은 진서의 유주 요서군과 같다. 고제는 요서군을 없애고 해양을 비여에 합친 후 평주 북평군에 넣었다. 평주 북평군 2현 (新昌,肥如).
6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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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 ᑀ 통전(801)
▶창려군은 拓跋魏의 영주와 남영주부터 있었다.
拓跋魏가 남영주를 설치하며 창려군도 같은 곳에 설치했는데, 隋가 남영주를 옮기고 그곳에 역주를 설치한 과정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6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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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 수서(636)
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十八年改為遂城
수성은 옛 무수였다. 나중에 북위가 남영주를 설치하였다. 598년에 수성으로 개명하였다.
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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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 遂城
❶ 한나라의 북신성현은 전국 시대의 武遂였던 듯하다.
❷ 한나라의 북신성현이었던 곳에 북위가 남영주를 설치하고 신창으로 개칭했다. 남영주 요동군에는 신창현이 있었는데 이 때문인 듯하다.
❸ 수나라는 신창을 遂城으로 개칭했다. 이는 그곳이 원래 武遂城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영주에는 낙랑군이 있었는데, 낙랑군에는 예전에 遂城현이 있었다. 마침 남영주가 설치되었던 곳이 遂城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착각이 시작되었다.
6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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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삼국사기(1145)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樂浪道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遼東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沃沮道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玄莬道로 나오고, 우어위장군 장근은 襄平道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碣石道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遂城道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 위문승은 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9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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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수서(636)
左第一軍可鏤方道 第二軍可長岑道 第三軍可海冥道 第四軍可蓋馬道 第五軍可建安道 第六軍可南蘇道 第七軍可遼東道 第八軍可玄菟道 第九軍可扶餘道 第十軍可朝鮮道 第十一軍可沃沮道 第十二軍可樂浪道 右第一軍可黏蟬道 第二軍可含資道 第三軍可渾彌道 第四軍可臨屯道 第五軍可候城道 第六軍可提奚道 第七軍可踏頓道 第八軍可肅慎道 第九軍可碣石道 第十軍可東暆道 第十一軍可帶方道 第十二軍可襄平道 凡此衆軍 先奉廟略 駱驛引途 總集平壤
1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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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晉 이후 300여년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隋가 晉 때까지 400여년간 존속하던 漢의 동방군현을 회복하려 시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정벌군 각 부대의 명칭도 한나라 고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에 맞춰 붙였다.
樂浪道, 朝鮮道와 함께 碣石道도 보이는데, 이는 진서(648)가 편찬되기 전부터 낙랑수성의 갈석산에서 진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1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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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9 구당서(945)
武德二年改為平州領臨渝肥如二縣其年自臨渝移治肥如改為盧龍縣
盧龍後漢肥如縣屬遼西郡至隋不改武德二年改為盧龍縣復開皇舊名
619년에 북평군을 평주로 개명하여 임유와 비여 두 현을 두었다. 그해에 치소를 임유에서 비여로 옮기고 노룡현으로 개명했다.
노룡은 後漢의 비여현으로 요서군에 속했고 隋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않았다. 619년에 노룡현으로 개명하여 개황 연간의 옛 이름으로 되돌렸다.
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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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구당서(945) 遂城
飛狐隋縣隋末陷賊武德六年復置寄治于易州遂城縣貞觀五年移治於今所
비호는 隋의 현이다. 隋 말기에 적에게 함락되었다. 623년에 복구해서 역주 수성현에 치소를 두었다. 631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6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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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3 신당서(1060)
황제의 편지를 주어 보내 고려(高麗)를 나무라고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자가 채 이르기 전에 개소문이 벌써 신라의 두 성을 탈취하였다. 현장이 태종의 유지를 알리자
“지난 날 수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적에 신라는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아갔소. 다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중지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현장이
“지나간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요동(遼東)은 본시 중국의 군현이지만 천자께서는 그래도 취하지 않으시었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3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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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4 신당서(1060)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며, “요동(遼東)은 옛 중국 땅이며 도적 막리지가 그 군주를 죽였으므로 짐이 친히 경략하려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을 하겠는데 나를 따라 나서는 아들이나 손자들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하고 곧 포·속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당태종은 고려 침공을 준비하며 요동은 옛 중국 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13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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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8 진서
遂城(秦築長城之所起)
수성(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인용된 태강지리지를 제외하면 樂浪遂成의 碣石山에서 秦長城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의 최초 기록이다. 진나라가 사라진 지 800여년 동안 그런 기록이 없었다.
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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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8¦樂浪遂成의 碣石山에서 秦長城이 시작된 이유
이것은 가설이다↝ 당빈은 갈석산에서 북신성 인근의 오원관까지 장성을 쌓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진장성을 복원한 것으로 추켜세웠다. 훗날 북신성에 낙랑군을 거느린 남영주가 설치되고 수성으로 개칭되면서, 낙랑군에 있었다던 옛 수성현과 혼동이 왔다. 여기에 당빈의 이야기가 더해져 낙랑수성의 갈석산에서 진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태강지리지의 이름으로 떠돌고 있었고 진서의 편찬자는 이를 믿고 주석으로 달았다.
1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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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史記索隱(司马贞)
夾右碣石(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又水經云在遼西臨逾縣南水中葢碣石山
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9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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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史記索隱(司马贞)
○ 지리지는 갈석산이 북평 려성현의 서남쪽에 있다고 했다.
○ 태강지리지(280~289)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시작된다고 했다.
○ 수경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다.
○ 이렇게 두 개의 갈석이 있는데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
10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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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史記索隱(司马贞)
都王險(韋昭云古邑名徐廣曰吕黎有險瀆縣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臣瓚云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 위소는 옛 고을 이름이라고 했다.
○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말했다.
○ 응소는 지리지에 주석을 달기를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 신찬은 험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라고 했다.
▶응소가 王險과 險瀆을 혼동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기색은이 인용한 태강지리지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
1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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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2 신당서(1060) 永樂
▶진서에는 평주 대방군에 7현이 있었다. 위서의 영주에 와서는 대방이 낙랑군으로 옮겨지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졌다. 낙랑군에서도 기존의 현들이 다 빠지고 永洛이 새로 들어가 대방과 함께 2현이 되었다. 이 永洛은 남영주에 와서 永樂으로 한자가 바뀌었다. 남영주가 폐지될 때 영락은 신창과 함께 남아 창려군에 소속되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창려군이 폐지된 후 영락은 역주 상곡군 소속으로 남아있었던 듯하다.
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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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遂武는 武遂의 오기다.
10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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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上谷郡
遂城古武遂也秦築長城之所起
수성은 옛 무성이다. 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수성은 진나라의 장성이 시작되는 곳(遂城秦築長城之所起)이라는 점은 같으나 여기서의 수성은 옛날에 무수였던 곳(遂城古武遂)이다.
3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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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北平郡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晉太康地志云秦築長城所起自碣石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
노룡현은 漢의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는데 돌비석처럼 해변에 우뚝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 晉의 태강지지에 '秦이 갈석에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의 옛 경계에 있고 이 갈석이 아니다.
▶사기색은에는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라 되어 있고 통전에는 太康地志云秦築長城所起自碣石이라 되어 있다.
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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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高句麗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려로 들어가는데 그 유적이 남아있다. 상서에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강으로 들어간다'고 되어있는 우갈석은 강 너머 바다 근처에 있는데 지금의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이므로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1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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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통전 高句麗
▶수성현이 장성이 시작되는 곳(遂成縣長城起)이라는 점은 같으나 여기서의 수성은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의 수성현(漢樂浪郡遂成縣)이다.
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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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新成县
西汉置,属中山国。治所在今河北徐水县西南二十里。《寰宇记》卷68引《十三州志》云:“河间有新城,故此加北字。”东汉改为北新城县。北魏改名新城县。北齐复名北新成县,寻废。
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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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安县
①北魏改故安县置,属范阳郡。治所在今河北易县东南西贯城。北齐废。
②隋开皇九年 (589) 置,属幽州。治所即今河北固安县。《寰宇记》 卷70涿州固安县: “取汉故安县以为名。” 唐属幽州,大历四年 (769) 改属涿州。元中统四年 (1263) 升为固安州。明洪武元年(1368) 又降为县,属顺天府。民国初属直隶京兆尹。1928年直属河北省。
6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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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昌县
①西汉置,属辽东郡。治所在今辽宁海城市东北三十余里向阳寨。《后汉书·高句骊传》: 建光元年(121),“夏,复与辽东鲜卑八千余人攻辽队,杀略吏人。蔡讽等追击于新昌,战殁”。即此。西晋属辽东国。东晋咸和九年 (334) 徙废。
③北魏置,为北平郡治。治所即今河北卢龙县。隋开皇十八年 (598) 改为卢龙县。
④北魏永熙二年 (533) 置,属昌黎郡。寄治英雄城 (今河北徐水县西二十五里遂城)。隋改名遂城县。
6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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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水
有三: 一曰中易水,源出河北易县西,东流至定兴县西南合拒马河。即古武水。《周礼·职方》 并州: “其浸涞、易。” 《战国策· 燕一》: 苏秦北说燕文侯曰,燕 “南有呼沱、易水”。即此。一曰北易水,源出易县北,东南流入定兴县界,与中易水合,即古濡水,又名沙河。一曰南易水,源出易县西南,东流入徐水、安新县为雹河 (今瀑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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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遂
①战国燕邑,后为赵地。在今河北徐水县西遂城。《史记· 赵世家》: 悼襄王二年 (前243),“李牧将攻燕,拔武遂、方城”。即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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碣石山
在河北省东北部昌黎县城北,东距渤海仅15千米。《读史方舆纪要》:碣石山“县西北二十里。山势穹窿,顶有巨石特出,因名。”为燕山余脉。由数十座山峰组成。主峰仙台顶(俗称娘娘顶),海拔695米,为古今观海胜地。其东五峰相连,称五峰山,以飞来峰(507米)最高。山体由花岗岩组成。山坡辟为果园,盛产苹果、葡萄、梨、板栗等。为历史名山,秦始皇、汉武帝、魏武帝、北魏文成帝、北齐文宣帝、唐太宗等都曾登临。明时即为京东游览地。五峰山北峰山腰有明崇祯年间建韩文公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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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옛 장성[古長城].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광개토왕릉비를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인식하던 시절이니 이 기록의 만리장성을 진장성과 연결짓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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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昌 遂城 碣石山
신창은 전한 시기에 두 곳이었다. 하나는 요동군의 현이고 또 하나는 연의 탁군에 있었다는 지명이다. 수성도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낙랑군에 있던 현이고 또 하나는 전국 시대에 무수였던 곳이 북신성과 신창을 거쳐 수성으로 개명된 곳이다. 갈석은 한 곳 밖에 없으나 기록이 왜곡되어 낙랑군 수성현에도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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