碣石, 遂城 그리고 新昌은 모두 두 곳 이상의 지명에 사용되었다. 新昌은 전한 시기에 탁군에도 있었고 요동군에도 있었다. 遂城도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낙랑군에 있던 현이고 또 하나는 전국 시대에 무수였던 곳이 북신성과 新昌을 거쳐 遂城으로 개명된 곳이다. 碣石은 세 곳 있었는데, 하나는 발해 해안에 있었고 또 하나는 구문에 있었으며 낙랑군 遂城에 있었다고 알려진 것은 착오로 만들어진 것으로 실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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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 ③ 遂城✘
ᐥ당빈이 복구했다는 장성은 옛 武遂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옛 武遂가 遂城으로 개칭되면서 당빈의 장성도 遂城에서 시작된 것이 되었다. 당빈의 장성은 秦장성을 복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개칭은 秦장성도 遂城에서 시작되었다는 착각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秦장성의 끝이 碣石이라고도 하고 遂城이라고도 하니 遂城에 碣石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ᐥ
3601#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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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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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河
導河積石 至于龍門 南至于華陰 東至于砥柱 又東至于盟津 東過雒汭 至于大邳 北過降水至于大陸 北播為九河 同為逆河 入于海 황하의 물길은 적석산을 지나 용문까지 이르고, 남으로 화산의 북쪽으로 흐르다 동으로 지주산으로 흘러서, 다시 동쪽 맹진으로 흐른다. 다시 동으로 낙수를 지나 대비산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강수를 지나서 대륙택에 이른다. 여기서 북으로 아홉 갈래로 나누어진 다음 다시 합류하여 역하가 되어 바다로 흘러든다.
3601#1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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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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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 山海經
碣石之山 繩水出焉 而東流注于河 其中多蒲夷之魚 其上有玉 其下多青碧 又北水行五百里 至于鴈門之山
갈석의 산에서 승수가 나와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데 포이의 물고기가 많다. 산 위에는 옥이 많고 아래에는 푸른 옥이 많다. 또 물길을 따라 북쪽으로 5백리를 가면 안문의 산에 이른다.
3601#20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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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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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 @九門縣 @구문현
▐ 산해경에 나오는 5백리 물길은 鴈門關과 九門縣 사이를 흐르는 호타하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鳥夷皮服夾右碣石入于河는 '鴈門에서 鳥夷의 공물이 호타하를 따라 내려와 九門에서 碣石을 오른쪽에 끼고 돌아 다시 황하를 거슬러 하나라의 도읍으로 운반되었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면 鳥夷는 산서의 한 종족이 된다.
3601#1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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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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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史記(-91)
築長城自造陽至襄平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오랑캐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에 군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했다.
3601#1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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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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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史記(-91)
始皇之碣石 使燕人盧生 求羨門高誓刻碣石門 壞城郭 決通隄防
시황이 갈석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을 시켜 선문과 고서를 찾게 하였다. 갈석의 문에 글을 새기고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텄다.
북쪽 변방을 순시하고 상군을 지나 돌아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로 보고했는데 '진을 망하게 할 자는 胡다'라고 쓰여 있는 참위서를 올렸다.
▐ 이 갈석은 太行常山至于碣石入于海의 碣石에 어울린다.
3601#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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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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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史記(-91)
築長城 起臨洮 至遼東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을 내쫓고, 하남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을 통제할 수 있게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걸쳐 있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으로 나아갔다. 10년 넘게 군대는 외지를 전전하다 상군에 주둔하기에 이르렀고, 이 무렵 몽염의 위세는 흉노를 떨게 했다.
3601#5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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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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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 사기(-91)에는 진나라가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킨 뒤 -215년경에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진나라가 요동 외요에 속했을 낙랑 수성까지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280~289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3601#6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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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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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8 史記(-91)
春 二世東行郡縣 李斯從 到碣石 並海 南至會稽 而盡刻始皇所立刻石 石旁著 大臣從者名 以章先帝成功盛德焉
봄에 2세가 동쪽 군현을 순행하러 나섰고 이사가 따랐다. 갈석에서 바다를 따라 남쪽 회계에 이르러 시황이 세운 비석에 글자를 모두 새기고 비석 옆면에는 수행 대신들의 이름을 적어서 선제의 공덕을 밝혔다.
▐ 이 갈석은 -215년에 진시황이 다녀갔던 그 갈석이다.
3601#1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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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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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漢書(82)
行自泰山 復東巡海上 至碣石(文穎曰在遼西絫縣 絫縣今罷 屬臨榆 此石著海旁 師古曰碣 碣然特立之貌也 音其列反)自遼西歷北邊九原歸于甘泉
태산으로부터 순행을 시작하여 동쪽으로 바다를 거쳐 갈석에 내렸다. 요서로부터 북쪽 변방의 구원을 거쳐 감천으로 돌아왔다.
▐ 여기에 나오는 갈석은 -215년에 진시황이 다녀가고 -208년에 그 2세가 다녀간 곳이다.
3601#1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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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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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1 史記 貨殖列傳
사마천은 말한다.
무릇 산서에서는 목재, 대나무, 닥나무, 모시, 검정소, 옥석이 풍부하다.
산동에서는 물고기, 소금, 옻, 실, 가무와 여색이 많다.
강남에서는 녹나무, 가래나무, 생강, 계수나무, 금, 주석, 납, 단사, 무소뿔, 대모, 주옥, 상아와 호피 등이 난다.
龍門碣石北 多馬牛羊旃裘筋角
용문과 갈석 북쪽에는 말, 소, 양, 모직물, 가죽, 짐승의 힘줄과 뿔이 많이 난다.
▐ 이 기록의 갈석은 용문과 함께 농경과 목축 문화의 경계에 있었다.
3601#15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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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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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1 勃碣
夫燕亦勃碣之間一都會也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 사이에 있는 도회지다.
▐ 勃碣의 勃과 碣은 각각 발해와 갈석이다. 발해는 발해만에 인접해 있었고 갈석 또한 -215년에 있었던 진시황의 순행이나 -208년에 있었던 진나라 2세의 순행 그리고 -110년에 있었던 한무제의 순행을 볼 때 모두 바닷가에 있었다.
3601#1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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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 漢書(82) 地理志 燕地
燕은 尾星과 箕星의 분야다. 무왕이 殷을 평정하고 소공을 燕에 봉했다. 그후 36세가 지나 다른 6국과 함께 왕을 칭했다. 동부에는 어양,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이 있고 서부에는 상곡, 대군 그리고 안문이 있다. 남쪽으로는 탁군의 역, 용성, 범양, 北新城, 고안, 탁현, 양향, 新昌 그리고 발해의 안차까지 모두 燕이다. 낙랑과 현도 또한 燕에 속한다.
3601#1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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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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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 後漢書(445) 幽州 涿郡
涿┆逎┆故安┆范陽┆良鄉┆北新城 有汾水門(史記曰 趙與燕汾門)┆方城 故屬廣陽 有臨鄉(故縣 後省 惠文王與燕臨樂) 有督亢亭(劉向別錄曰 督亢 膏腴之地 史記荊軻奉督亢圖入秦)
▐ 한서의 29현에서 穀丘 南深澤 蠡吾 容城 易 廣望 鄚 高陽 州鄉 安平 樊輿 成 利鄉 臨鄉 益昌 陽鄉 西鄉 饒陽 中水 武垣 阿陵 阿武 高郭 新昌이 빠지고 중산국의 北新成과 광양군의 方城이 들어왔다.
방성은 기원전 243년에 조나라가 연나라로부터 무성과 함께 빼앗은 곳이다.
3601#6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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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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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晉書(648) 幽州 (7군국 34현 59020호)
范陽國(涿, 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燕國(薊, 安次, 昌平, 軍都, 廣陽, 潞, 安樂, 泉州, 雍奴, 狐奴)┆北平郡(徐無, 土垠, 俊靡, 無終)┆上谷郡(沮陽, 居庸)┆廣甯郡(下洛, 潘, 涿鹿)┆代郡(代, 廣昌, 平舒, 當城)┆遼西郡(陽樂, 肥如, 海陽)
360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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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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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三國誤記」 晉書 平州 (5군국 26현 18100호)
昌黎郡(昌黎, 賓徒)┆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樂浪郡(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 遂城을 武遂와 혼동했다.
3601#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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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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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0~0289 太康地理志
진서(648) 遂城(秦築長城之所起) ┆ 사기색은(679~732) 大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 有碣石山 長城所起 ┆ 통전(801)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所起 自碣石
▐ 태강지리지(280~289)를 인용하여 '秦장성이 碣石에서 시작되었고 그 碣石은 낙랑 수성에 있다'는 이야기가 사기색은(679~732)과 통전(801)에 등장한다. 진서(648)의 주석도 같은 내용이다. 이 갈석을 구문 갈석 및 누현 갈석과 구별하여 수성 갈석이라 칭하기로 한다.
3601#1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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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0~0289 太康地理志
▐ 원래 사기(-91)에는 秦이 조선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키고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고만 되어 있다. 秦이 요동 외요에 속했을 낙랑 수성까지 장성을 연장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 秦장성이 만들어진 지 500여년 후이자 낙랑군이 설치된 지 400여년 후인 태강지리지에 와서야 그 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나는 정황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마저 태강지리지는 전하지 않고 그 이야기는 태강지리지가 나온 지 300여년 뒤에야 水經注에서 인용된 형태로 등장한다.
3601#20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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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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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4- 郭璞(山海經)
水經曰 碣石山今在遼西臨渝縣南水中 或曰在右北平驪城縣海邊山
수경에는 갈석산이 지금의 요서 임유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혹자는 우북평 여성현 바닷가의 산이라고도 한다.
▐ 우북평 여성현은 후한때 사라졌다. 따라서 곽박이 인용한 혹자는 전한때의 기록인 듯한데 한서와는 내용이 약간 어긋난다.
3601#1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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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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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436 北燕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3601#6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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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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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 魏書(554) 平州 北平郡 朝鮮縣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 徙朝鮮民於肥如 復置屬焉 전후한과 진나라때는 낙랑에 속했으나 나중에 없앴다. 432년에 조선민들을 비여에 모아놓고 조선현을 다시 설치했다.
▐ 전한은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낙랑군을 설치한 뒤 그 아래에 조선현을 두었다. 313년에 낙랑군이 고려에 흡수되면서 그 통치 세력은 모용선비가 설치한 낙랑군으로 갔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민은 북위가 432년에 북연에서 끌어온 낙랑 유민 중의 일부였을 듯하다.
3601#20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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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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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新昌
新昌은 전한때 탁군과 요동군 두 곳에 있었다. 탁군의 新昌은 後漢書부터 나오지 않고 요동군의 新昌은 漢書에 요동군 18현의 하나로 나오고 後漢書에는 요동군 11성의 하나로 나오며 晉書에는 요동국 8현의 하나로 나온다.
432년에 북연에서 이주시킨 낙랑군 조선민을 북평군에 조선현을 설치하여 살게 한 것처럼, 북평군의 이 新昌현 또한 북연에서 함께 이주시킨 요동군 신창민을 살게 한 현일 수 있다.
3601#13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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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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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 魏書(554) 營州 (6군 14현)
昌黎郡(201호, 龍城, 廣興, 定荒)┆建德郡(200호, 石城, 廣都, 陽武)┆遼東郡(131호, 襄平, 新昌)┆樂良郡(219호, 永洛, 帶方)┆冀陽郡(89호, 平剛, 柳城)┆營丘郡(182호, 富平, 永安)
3601#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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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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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水經注
始皇 令太子扶蘇與蒙恬 築長城 起自臨洮至于碣石
진시황이 태자 부소에게 명하여 몽염과 함께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까지 이르렀다.
▐ 사기(-91)에 임조에서 요동까지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수경주에는 임조에서 갈석까지로 바뀌어 있다.
碣石에서 秦長城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는 태강지리지(280~289)를 제외하면 수경주가 최초다.
3601#1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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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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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水經注
山海經曰 碣石之山 繩水出焉 東流注于河 河之入海 舊在碣石 今川流所導 非禹瀆也
산해경에는 갈석의 산에서 승수가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고 황하는 다시 바다로 들어가는데 거기에 옛 갈석이 있다. 지금의 물길은 우임금 때와 다르다.
▐ 史記의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와 山海經의 「碣石之山 繩水出焉 而東流注于河」를 종합한 듯한 이야기다.
3601#2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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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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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3 魏書(554) 南營州 (5군,11현)
昌黎郡(509호, 龍城, 廣興, 定荒)┆遼東郡(565호, 太平, 新昌)┆建德郡(178호, 石城, 廣都)┆營丘郡(512호, 富平, 永安, 帶方)┆樂良郡(49호, 永樂)
3601#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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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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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 @盧龍 @노룡
▐ 新昌(436) → 盧龍(598)┆요동에서 기원한 新昌은 漢書에 요동군 18현의 하나로 나오고 後漢書에는 요동군 11성의 하나로 나오며 晉書에는 요동국 8현의 하나로 나온다.
432년에 북위는 북연의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주민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기고 평주 북평군에 朝鮮현을 설치하여 조선민을 안치하였고 436년에는 新昌현을 설치하여 신창민을 안치하였다.
3601#6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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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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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 新昌 開皇十八年 改為遂城┆新昌 隋末為遂城
▐ 북위는 444년에 옛 북연의 자리에 영주를 설치하여 그 아래에 평주 북평군의 新昌현과 별개로 요동군 新昌현을 두었다. 영주가 몰락하자 533년에 남영주를 설치하며 그 아래에 요동군 新昌현을 北新城에 두었다.
북제는 新昌현을 창려군에 넣었는데, 수나라는 창려군을 폐지하고 얼마 뒤 新昌을 遂城으로 개칭하였다.
遂城이란 지명은 武遂城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이곳에 설치된 樂良郡이 반도에 있을 때 遂城현이 있었기 때문에 착각이 있을 수 있다.
3601#6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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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 遼西┆右北平┆北平
▐ 漢 遼西┆且慮 海陽 新安平 柳城 令支 肥如 賓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 ➔ 後漢 遼西┆陽樂 海陽 令支 肥如 臨渝 ➔ 晉 遼西┆陽樂 肥如 海陽 ➔ 魏 遼西┆肥如 陽樂 海陽
▐ 漢 右北平┆平剛 無終 石成 廷陵 俊靡 薋 徐無 字 土垠 白狼 夕陽 昌城 驪成 廣成 聚陽 平明 ➔ 後漢 右北平┆土垠 徐無 俊靡 無終 ➔ 晉 北平┆徐無 土垠 俊靡 無終 ➔ 魏 北平┆朝鮮 新昌
▐ 齊 北平┆新昌 肥如 ➔ 隋 北平┆新昌 ➔ 隋 北平┆盧龍
3601#15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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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遂城 碣石
晉 이후 300여년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隋가 晉 때까지 400여년간 존속하던 漢의 동방변군을 회복하려 시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정벌군 각 부대의 명칭도 한나라 고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에 맞춰 모두 요하 이동의 지명을 붙였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碣石도 遂城 碣石이다. 태강지리지(280~289)를 제외하면 수서(636)가 遂城 碣石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3601#1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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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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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8 晉書 地理上 樂浪郡
遂城(秦築長城之所起) 수성(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 晉書 唐彬列傳의 「復秦長城塞 自溫城 洎于碣石」에 나오는 碣石은 분명 누 갈석이다.
漢書(82)에서는 右北平郡 驪成과 遼西郡 絫에서 언급되어 있고 後漢書(445)에서는 遼西郡 臨渝에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晉書 地理志에는 北平郡과 遼西郡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樂浪郡 遂城에서 언급되어 있다.
3601#14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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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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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史記索隱
지리지는 갈석산이 북평 려성현의 서남쪽에 있다고 했다.
태강지리지(280~289)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시작된다고 했다.
수경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두 개의 갈석이 있는데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
3601#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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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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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史記索隱
三國邊匈奴(按三國燕趙秦) 因河為塞(按太康地記 秦塞自五原北九百里謂之造陽 東行終利賁山南漢陽西也 漢一作漁)
세 나라는 흉노와 접했다. (세 나라는 연, 조 그리고 진이다.) 그래서 황하가 요새가 되었다. (태강지리지에는 진나라의 요새가 오원 북쪽 9백리에 있는 조양에서 동쪽으로 이분산 남쪽에 있는 한양 서쪽까지였다고 되어 있다. 한양은 어양이라고도 한다.)
3601#20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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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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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1± @遂城 @수성
武遂(-243) → 北新城(-202) → 新昌(533) → 遂城(598)┆전국시대에 武遂라 불리던 곳에 한나라가 중산국 北新城현을 설치하였는데, 후한때 탁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서진때 다시 고양국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533년에 북위가 이곳의 영웅성에 남영주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요동군 新昌현을 두었는데, 수나라가 598년에 新昌을 遂城으로 개칭하였다.
3601#6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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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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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古冀州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 晉太康地志同秦築長城所起自碣石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也 臨閭關今名臨榆關在縣城東一百八十里)
노룡현은 漢의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는데 돌비석처럼 해변에 우뚝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 晉의 태강지지에 '秦이 갈석에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 옛 고려의 경계 안에 있고 이 갈석이 아니다. 임려관은 지금 임유관인데 노룡현성 동쪽 180리에 있다.
3601#1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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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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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高句麗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 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려의 옛 터로 들어간다. 상서에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강으로 들어간다'고 되어있는 우갈석은 강이 바다에 이르는 곳인데 지금의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이므로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3601#1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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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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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遼水
▐ 통전이 편찬되던 때는 고려가 망하고 100여년이 지난 후고 왕씨고려가 세워지기 100여년 전이므로 在今高麗舊界는 '지금 옛 고려의 경계 안에 있다'로 해석해야 하고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는 지금 장성이 동쪽으로 遼水를 건너 옛 고려가 있던 터로 들어간다'로 해석해야 한다. 통전의 遼水는 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南流至安市라는 구절로 보아 지금의 遼河다.
그렇다면 요수 건너 옛 고구려 터에 있었다는 漢樂浪郡遂成縣은 분명 요하 이동에 있었다.
3601#14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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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① 晉太康地志同'秦築長城所起自碣石'
② 遂城(古遂武也秦築長城之所起)
③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 태강지리지에는 애초에 秦築長城所起自碣石이라고만 되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던 것에 사기색은이 ②의 영향으로 생겨나 당시에 퍼져 있던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이라는 이야기를 반영하여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樂浪遂城縣有를 떼어내고 碣石山長城所起라고만 했어야 했다.
3601#20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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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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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碣石
碣石에 대해 문영(219±)은 此石著海旁(바닷가에 솟아 있는 바위)라고 했고 수경(265-)에는 南水中(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했으며 통전(801)은 海邊山名(바닷가의 산 이름)이라면서 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비석처럼 바닷가에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라고 설명했다.
고대의 해안선은 지금보다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누현 앞 바다의 갈석은 내륙 가운데로 들어오면서 이름을 잃었고 그 갈석을 따라 이름붙였던 인근의 갈석산만 지금까지 남았을 수 있다.
3601#1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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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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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絫, 碣石山, 臨渝(石城), 肥如(盧龍)
碣石은 전한때 요서의 絫에 있었는데 후한때 絫가 요서의 臨渝로 합쳐진 뒤 臨渝에서 나타난다. 臨渝는 서진때 요서의 양락으로 합쳐졌는데 이는 북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때 갈석은 요서의 肥如에서 나타난다. 북제가 요서를 없애고 肥如를 북평에 넣었는데 수나라가 肥如를 신창에 합쳤다가 신창을 盧龍으로 개칭하였다. 臨渝와 肥如는 당나라때 다시 나타나는데 肥如는 盧龍으로 개칭되고 臨渝는 石城으로 개칭되었다. 갈석은 이때 石城과 盧龍에서 나타난다.
3601#2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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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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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 十三州志
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 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 土地河閒有新城 故此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 於此置南營州 改爲新昌縣
한나라의 북신성현은 한서 지리지에 연의 남쪽에 있는데 탁군의 북신성을 얻어 후한이 중산국에 소속시켰다. 강 사이에 신성이 있었으므로 북자를 넣어 북신성이라 했다. 북위가 533년에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하고 신창으로 개칭했다.
3601#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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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옛 장성[古長城].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 광개토왕릉비를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인식하던 시절이니 이 기록의 만리장성을 진장성과 연결짓기는 힘들다.
3601#9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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