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地理志 > 0612 碣石┆遂城┆新昌
 
  碣石┆遂城┆新昌
碣石┆遂城┆新昌
ᐥ碣石¹²³, 遂城¹² 그리고 新昌¹²³은 모두 두 곳 이상의 지명에 사용되었다. 新昌¹²은 전한 시기에 탁군에도 있었고 요동군에도 있었다. 遂城¹²도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낙랑군에 있던 현이고 또 하나는 전국 시대에 무수였던 곳이 북신성과 新昌³을 거쳐 遂城²으로 개명된 곳이다. 碣石¹²³은 세 곳 있었는데, 선진 시기에는 구문에 있었고 그 이후에는 누현에 있었으며 遂城¹에 있었다고 알려진 것은 착오로 만들어진 것으로 실재하지 않았다.ᐥ
20794
 
夏商周断代工程
夏(BC 2070년 - BC 1500년) 商(BC 1600년 - BC 1046년) 周(BC 1046년 - BC 256년) 하상주단대공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고대사(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연구 작업이다. 구체적인 연대가 판명되지 않은 중국 고대의 삼대(하·상·주)에 대하여 구체적인 연대를 확정하였다. 이 공정에 따라 尚書·禹貢의 시기를 -2070년으로 설정한다.
15647
 
-2278 ~ -0602 禹河故道
-2278 ~ -0602 禹河故道
고대의 공물 수송은 물길로 이루어졌고 하나라 때는 황하가 大陸澤을 지나갔다.
15212
 
-2070 尚書·禹貢 九州
㠀夷皮服夾右❶碣石¹入于河 도이의 공물은 가죽옷인데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왔다. ▐ 사기와 한서에는 㠀가 아니라 鳥로 되어 있고 사기에는 河가 아니라 海로 되어 있다.
3601#15682
 
-2070 尚書·禹貢 九山
太行恒山至于❶碣石入于海 태행산과 항산은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恒山는 사기에 常山으로 되어 있다.
3601#15683
 
-2070 常山
河北唐县西北
15107
 
-2070 太行山
6521
 
-2070 尚書·禹貢 九川
導河積石 至于龍門 南至于華陰 東至于砥柱 又東至于盟津 東過雒汭 至于大邳 北過降水至于大陸 北播為九河 同為逆河 入于海 황하의 물길은 적석산을 지나 용문까지 이르고, 남으로 화산의 북쪽으로 흐르다 동으로 지주산으로 흘러서, 다시 동쪽 맹진으로 흐른다. 다시 동으로 낙수를 지나 대비산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강수를 지나서 대륙택에 이른다. 여기서 북으로 아홉 갈래로 나누어진 다음 다시 합류하여 역하가 되어 바다로 흘러든다.
3601#15706
 
-0602 ~ -0011 西漢故道
-0602 ~ -0011 西漢故道
한나라 때는 황하의 물길이 상산 구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뀌었다. 강이든 바다든 고대에는 물길이 중요했고 여기에서 멀어지면 역사 무대에서도 멀어졌다.
15702
 
-0403~-0221 戰國策
❶碣石¹山在常山九門縣 갈석산은 상산 구문현에 있다.
3601#15689
 
-0403~-0221 ┆ 九門縣
▐ 하나라 시기에는 황하가 이곳을 지나 흘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097
 
-0334 鴈門關
15489
 
-0334 滹沱河
▐ 滹沱河는 鴈門關의 동남쪽 아래를 흘러 常山과 太行山 사이를 지나 九門縣 남쪽을 흐른다.
15488
 
-0334 史記(-91)
南有❶碣石¹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이,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서쪽으로는 운중과 구원이, 남쪽으로는 호타하와 역수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입니다. 남으로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
15090
 
-0334 山海經
❶碣石¹之山 繩水出焉 而東流注于河 其中多蒲夷之魚 其上有玉 其下多青碧 又北水行五百里 至于鴈門之山 갈석의 산에서 승수가 나와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데 포이의 물고기가 많다. 산 위에는 옥이 많고 아래에는 푸른 옥이 많다. 또 물길을 따라 북쪽으로 5백리를 가면 안문의 산에 이른다.
20761
 
-0334 ┆ 九門縣
❶¹ 산해경에 나오는 5백리 물길은 鴈門關과 九門縣 사이를 흐르는 호타하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鳥夷皮服夾右碣石入于河는 '鴈門에서 鳥夷의 공물이 호타하를 따라 내려와 九門에서 碣石을 오른쪽에 끼고 돌아 다시 황하를 거슬러 하나라의 도읍으로 운반되었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15196
 
-0300+ 辽宁省辽阳市老城区
襄平
15193
 
-0300+ 史記(-91)
築❹長城自造陽至襄平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오랑캐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에 군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했다.
15191
 
-0300 ~ -0222 漢書(82)
燕은 尾星과 箕星의 분야다. 무왕이 殷을 평정하고 소공을 燕에 봉했다. 그후 36세가 지나 다른 6국과 함께 왕을 칭했다. 동부에는 어양,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이 있고 서부에는 상곡, 대군 그리고 안문이 있다. 남쪽으로는 탁군의 역, 용성, 범양, ❷北新城, 고안, 탁현, 양향, ❸新昌¹ 그리고 발해의 안차까지 모두 燕이다. 낙랑과 현도 또한 燕에 속한다.
10257
 
-0300 ~ -0222 漢書(82)
▐ -334년에 연나라 남부로 언급되었던 안문이 여기서는 연나라 서부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연나라가 동호 정벌을 통해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결과 안문이 상대적으로 나라의 서쪽에 있게 된 결과로 보인다.
15162
 
-0250 戰國時代 (-403 ~ -221)
-0250 戰國時代 (-403 ~ -221)
6678
 
-0243 史記(-91)
趙使李牧攻燕抜❷武遂方城 조나라가 이목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수와 방성을 빼앗았다.
3601#15163
 
-0243 ┆ 武遂
河北徐水县西
6495 COMMENT
 
-0222 史記(-91)
秦滅燕屬遼東外徼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조선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켰다.
6502 COMMENT
 
-0215 史記(-91)
始皇之❶碣石²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壞城郭決通隄防 시황이 갈석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을 시켜 선문과 고서를 찾게 하였다. 갈석의 문에 글을 새기고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텄다. 북쪽 변방을 순시하고 상군을 지나 돌아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로 보고했는데 '진을 망하게 할 자는 胡다'라고 쓰여 있는 참위서를 올렸다. ▐ 이 갈석은 연나라에 있었고 바닷가에 있었던 듯하다.
4373 COMMENT
 
-0215 漢書(82)
後三年 游碣石 考入海方士 從上郡歸
15219
 
-0215 史記(-91)
築❹長城起臨洮至遼東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을 내쫓고, 하남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을 통제할 수 있게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걸쳐 있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으로 나아갔다. 10년 넘게 군대는 외지를 전전하다 상군에 주둔하기에 이르렀고, 이 무렵 몽염의 위세는 흉노를 떨게 했다.
5865 COMMENT
 
-0215 遼東
15931
 
-0215 臨洮
15930
 
-0215
-0215
▐ 사기(BC91)에는 진나라가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킨 뒤 -215년경에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진나라가 요동 외요에 속했을 낙랑 수성까지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280~289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6519
 
-0208 史記(-91)
春 二世東行郡縣 李斯從 到❶碣石² 並海 南至會稽 而盡刻始皇所立刻石 石旁著 大臣從者名 以章先帝成功盛德焉 봄에 2세가 동쪽 군현을 순행하러 나섰고 이사가 따랐다. 갈석에서 바다를 따라 남쪽 회계에 이르러 시황이 세운 비석에 글자를 모두 새기고 비석 옆면에는 수행 대신들의 이름을 적어서 선제의 공덕을 밝혔다. ▐ 이 갈석은 바닷가에 있었고 -215년에 진시황이 다녀갔던 그 갈석이다.
15221
 
-0208 漢書(82)
二世元年 東巡碣石 竝海 南歷泰山 至會稽 皆禮祠之 而胡亥刻勒始皇所立石書旁 以章始皇之功德
15645
 
-0208  coastlines
-0208 coastlines
▐ 구문 갈석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갈석에서 바다를 따라갈 수 없었다. 따라서 진나라 2세가 순방한 갈석은 분명 구문 갈석이 아니다.
6507
 
-0110 漢書(82)
行自泰山復東巡海上至❶碣石²(文穎曰在遼西絫縣 絫縣今罷 屬臨榆 此石著海旁 師古曰碣 碣然特立之貌也 音其列反)自遼西歷北邊九原歸于甘泉 태산으로부터 순행을 시작하여 동쪽으로 바다를 거쳐 갈석에 내렸다. 요서로부터 북쪽 변방의 구원을 거쳐 감천으로 돌아왔다. ▐ 여기에 나오는 갈석은 -215년에 진시황이 다녀가고 -208년에 그 2세가 다녀간 곳이다.
3601#15933
 
-0110 漢書(82)
天子旣已封泰山 無風雨 而方士更言蓬萊諸神 若將可得 於是上欣然庶幾遇之 復東至海上望焉 奉車子侯暴病 一日死 上迺遂去 並海上 北至碣石 巡自遼西 歷北邊至九原 五月 迺至甘泉 周萬八千里云
15222
 
-0108 漢書(82)
東過❶碣石²以玄菟樂浪為郡 동쪽으로는 갈석을 지나 현도와 낙랑에 군을 설치했다. ▐ 이 기록에 나오는 갈석은 동북 변방 가까이에 있었다.
14526
 
-0091 사기 貨殖列傳
사마천은 말한다. 무릇 산서에서는 목재, 대나무, 닥나무, 모시, 검정소, 옥석이 풍부하다. 산동에서는 물고기, 소금, 옻, 실, 가무와 여색이 많다. 강남에서는 녹나무, 가래나무, 생강, 계수나무, 금, 주석, 납, 단사, 무소뿔, 대모, 주옥, 상아와 호피 등이 난다. 龍門❶碣石²北多馬牛羊旃裘筋角 용문과 갈석 북쪽에는 말, 소, 양, 모직물, 가죽, 짐승의 힘줄과 뿔이 많이 난다. ▐ 이 기록의 갈석은 용문과 함께 농경과 목축 문화의 경계에 있었다.
15745
 
-0091 ┆龍門
황야를 지나온 황하가 평야로 들어서는 부분이다.
15747
 
-0091 勃碣
夫燕亦勃❶碣²之間一都會也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 사이에 있는 도회지다. ▐ 勃碣의 勃과 碣은 각각 발해와 갈석이다. 발해는 발해만에 인접해 있었고 갈석 또한 -215년에 있었던 진시황의 순행이나 -208년에 있었던 진나라 2세의 순행 그리고 -110년에 있었던 한무제의 순행을 볼 때 모두 바닷가에 있었다.
3601#15802
 
-0091 ┆ 勃海
15620
 
0008 漢書(82)
中山國(高帝郡 景帝三年為國 應劭曰 中山 故國) 縣十四 盧奴 北平 ❷北新成(桑欽言易水出西北東入滱) 唐 深澤 苦陘 安國 曲逆 望都 新市 新處 毋極 陸成 安險 ▐ 十道志曰 遂城 戰國時武遂縣 漢之北新城
6470 COMMENT
 
0008 漢書(82)
涿郡 戶十九萬五千六百七 口七十八萬二千七百六十四 縣二十九 涿 迺 穀丘 故安 南深澤 范陽 蠡吾 容城 易 廣望 鄚 高陽 州鄉 安平 樊輿 成 良鄉 利鄉 臨鄉 益昌 陽鄉 西鄉 饒陽 中水 武垣 阿陵 阿武 高郭 ❸新昌¹(侯國)
6528
 
0008 漢書(82)
遼西郡 縣十四 且慮 海陽 新安平 柳城 令支 肥如 賓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下官水南入海 又有❶揭石²水 賔水 皆南入官 하관수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게석수와 빈수가 있는데 모두 남쪽으로 관에 들어간다.)
6535
 
0008 漢書(82)
遼東郡 縣十八 襄平 ❸新昌² 無慮 望平 房 候城 遼隊 遼陽 險瀆 居就 高顯 安市 武次 平郭 西安平 文 番汗 沓氏
10164
 
0008 漢書(82)
右北平郡 縣十六 平剛 無終 石成 廷陵 俊靡 薋 徐無 字 土垠 白狼 夕陽 昌城 驪成(大❶揭石²山在縣西南 莽曰揭石 대게석산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왕망은 揭石이라 했다.) 廣成 聚陽 平明
15099
 
0008┆ 서한 지도
0008┆ 서한 지도
絫, 驪成(抚宁), 大揭石山 그리고 당시의 해안선 추정을 볼 수 있다.
19815
 
0008┆驪成
"大揭石山在縣西南" 商、周時屬孤竹國,戰國時為燕國之遼西郡。秦為遼西陽樂之地。西漢時置驪城縣;東漢及三國時置臨渝縣。西晉及南北朝時為平州陽樂縣。唐武德二年(619年),始設撫寧縣。
20752
 
0082 ┆絫縣
❶² 한서 지리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요서군 絫에 揭石水가 있어 남쪽 바다로 들어갔고 우북평군 驪成의 서남쪽에 大揭石山이 있었다는 것이다. 진나라 이후의 기록에서 연나라의 해안에 碣石이 있었고 이 碣石이 농경 문화와 목축 문화의 경계 지역에 있었다고만 되어 있었는데, 마침내 그 구체적인 위치를 알게 하는 기록이 나타난 것이다. 이 갈석을 진나라 이전의 기록에 나오는 구문 갈석과 구별하여 누현 갈석이라 이름 붙여 본다.
15958
 
0082 漢書
0082 漢書
▐ 한나라 요동군에 양평현이 있다. 연나라의 장성이 양평에 이르렀고(築長城自造陽至襄平) 연나라를 병합한 진나라의 장성이 요동에 이르렀으며(築長城起臨洮至遼東) 한나라의 요동군에 양평현이 있었으니, 진나라 장성은 적어도 요동까지 온 게 분명하다. 한나라의 요동군은 요대 등의 설명으로 볼 때 요하 동쪽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6494
 
0082 漢書
0082 漢書
▐ 수성현에 갈석이나 진장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
15752
 
0219± 文穎
(❶碣石²) 在遼西絫縣 今罷 屬臨榆 此石著海旁 (갈석은) 요서 누현에 있다. 누현은 지금 폐지되어 임유에 속해 있다. 이 돌은 바닷가에 솟아 있다.
15098
 
0220 後漢書(445) 幽州
涿郡 涿 逎 故安 范陽 良鄉 ❷北新城 方城 탁군 탁 주 고안 범양 량향 북신성 방성 ▐ 방성은 기원전 243년에 조나라가 연나라로부터 무성과 함께 빼앗은 곳이다.
6499 COMMENT
 
0220 後漢書(445) 幽州
遼東郡 襄平 ❸新昌² 無慮 望平 候城 安市 平郭有鐵 西安平 汶 番汗 沓氏 요동군 양평 신창 무호 망평 후성 안시 평곽 서안평 문 번한 답씨
6524
 
0220 後漢書(445) 幽州
遼西郡 陽樂 海陽 令支 肥如 臨渝 요서군(5성 14150호) 양락 해양 령지 유호 죽성 비여 임유 ▐ 한서의 14현에서 且慮 新安平 柳城 賓從 交黎 狐蘇 徒河 文成 絫가 빠졌다. 絫는 臨渝에 합쳐졌다.
15102
 
0220 後漢書(445) 幽州
右北平郡 土垠 徐無 俊靡 無終 ▐ 한서의 16현에서 平剛 石成 廷陵 薋 字 白狼 夕陽 昌城 驪成 廣成 聚陽 平明이 빠졌다.
15759
 
0233~0238 魏土地記(水經注)
濡水又東南至絫縣❶碣石²山 유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누현 갈석산에 이른다. ▐ 누현은 후한때 임유현에 합쳐졌기 때문에 이때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전한 시기의 기록을 인용한 듯하다.
15755
 
0265- 水經(水經注)
❶碣石²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의 물 속에 있다. ▐ 임유현은 서진때 양악에 합쳐졌기 때문에 이 기록은 265년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15746
 
0280~0289 太康地理志
진서(648) 遂城¹(秦築長城之所起) ┆ 사기색은(679~732) 大康地理志云 樂浪遂城¹縣有❶碣石³山長城所起 ┆ 통전(801)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所起自❶碣石³ ▐ 태강지리지(280~289)를 인용하여 '秦장성이 碣石에서 시작되었고 그 碣石은 낙랑 수성에 있다'는 이야기가 사기색은(679~732)과 통전(801)에 등장한다. 진서(648)의 주석도 같은 내용이다. 이 갈석을 구문 갈석 및 누현 갈석과 구별하여 수성 갈석이라 칭하기로 한다.
3601#15176
 
0280~0289 太康地理志
▐ 원래 사기(-91)에는 秦이 조선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키고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고만 되어 있다. 秦이 요동 외요에 속했을 낙랑 수성까지 장성을 연장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 秦장성이 만들어진 지 500여년 후이자 낙랑군이 설치된 지 400여년 후인 태강지리지에 와서야 그 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나는 정황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마저 태강지리지는 전하지 않고 그 이야기는 태강지리지가 나온 지 300여년 뒤에야 인용된 형태로 등장한다.
20784
 
0280~0289 진서(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❶碣石²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진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갈석은 누현 갈석이다.
6391 COMMENT
 
0280~0289┆幽州
0280~0289┆幽州
▐ 진장성은 임조에서 요동까지였는데 당빈이 복구한 장성은 온성에서 갈석까지였다. 이 구간은 화북 평원을 감싸는 태행산과 연산을 잇는 선이다. 그런데 온성은 서진의 도읍이었던 낙양의 동북쪽에 있다. 가장 잘 방어해야할 도읍 바로 인근에서 장성이 끝난다는 대목에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빈이 장성을 쌓은 계기는 북평이 침략을 당한 때문이고 당빈이 장성을 쌓으며 맡은 직위는 유주제군사였다. 따라서 장성의 범위는 유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듯하다.
10181
 
0280~0289┆溫縣
1321
 
0280~0289┆秦長城
0280~0289┆秦長城
북쪽에 있는, 고비 사막 남쪽을 지나는 노란색 선이 연나라와 진나라가 쌓았다고 추정되는 장성이다. 태강지리지 이전의 기록에는 이 장성의 동쪽 끝이 요동까지만 확인된다.
5867 COMMENT
 
0280~0289┆西晉
0280~0289┆西晉
서진의 북쪽 영역은 연나라나 진나라에 비해 남쪽으로 후퇴해 있었다. 따라서 서진의 당빈이 진나라의 북쪽 경계에 있던 진장성을 복구할 수는 없었다.
3598 COMMENT
 
0280~0289┆遂城¹ 碣石³ 가설 (1)
0280~0289┆遂城¹ 碣石³ 가설 (1)
ᐥ秦장성을 쌓은 지 500여년 후인 太康 연간(280~289)에 북쪽 오랑캐가 西晉의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이 옛 武遂에서 碣石²까지 장성을 쌓았다. 사람들은 이를 秦장성을 복구한 것으로 착각했다.ᐥ
20785
 
0316 진서(648) 冀州
高陽國 博陸 高陽 ❷北新城 蠡吾
6529
 
0316 진서(648) 司州
河內郡 野王 州 懷 平皋 河陽 沁水 軹 山陽 溫(故國也蘇忿生封)
7522 COMMENT
 
0316 진서(648) 平州
遼東國 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❸新昌² 力城 요동국 양평 문 거취 낙취 안시 서안평 신창 역성
6492 COMMENT
 
0316 진서(648) 幽州
遼西郡 陽樂 肥如 海陽
6490 COMMENT
 
0324- 郭璞(山海經)
水經曰 ❶碣石²山今在遼西臨渝縣南水中 或曰在右北平驪城縣海邊山 수경에는 갈석산이 지금의 요서 임유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혹자는 우북평 여성현 바닷가의 산이라고도 한다. ▐ 우북평 여성현은 후한때 사라졌다. 따라서 곽박이 인용한 혹자는 전한때의 기록인 듯한데 한서와는 내용이 약간 어긋난다.
15757
 
0386~0534 後魏(北魏)
0386~0534 後魏(北魏)
6515
 
0432 위서(554)
徙營丘 成周 遼東 樂浪 帶方 玄菟 六郡民 三萬家 于幽州 開倉以賑之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주민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눠주었다.
15726
 
0432 위서(554) 平州 北平郡
朝鮮(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復置屬焉) 조선(전후한과 진나라때는 낙랑에 속했으나 나중에 없앴다. 432년에 조선민들을 비여에 모아놓고 조선현을 다시 설치했다.) ▐ 이 조선민은 북위가 북연에서 끌어온 3만 가구 중의 일부였을 것이다.
20795
 
0436 魏書
營州(營州治和龍城 太延二年為鎮)
6442
 
0436 위서(554) 平州 北平郡
❸新昌³(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 後屬 有盧龍山) 신창(전한때는 탁에 속했고 후한과 진나라때는 요동에 속했는데 나중에 북평군에 소속시켰다. 노룡산이 있다.)
15758
 
0436 위서(554) 平州 北平郡
▐ 新昌¹²은 전한때 탁군과 요동군 두 곳에 있었다. 탁군의 新昌¹은 後漢書부터 나오지 않고 요동군의 新昌²은 漢書에 요동군 18현의 하나로 나오고 後漢書에는 요동군 11성의 하나로 나오며 晉書에는 요동국 8현의 하나로 나온다. 432년에 북연에서 끌어온 낙랑군 조선민을 북평군에 조선현을 설치하여 거주시킨 것처럼, 북평군의 이 新昌³현 또한 북연에서 함께 끌어온 요동군 신창민을 거주시킨 현일 수 있다.
13975
 
0436 위서(554) 平州 遼西郡
肥如(二漢晉屬 有孤竹山祠 ❶碣石³ 武王祠 令支城 黃山 濡河) 비여(전후한과 진나라때 속했다. 갈석, 영지성 등이 있다.)
20796
 
0436┆新昌²
北魏析肥如縣置新昌縣。隋開皇十八年改為盧龍。唐為平州治 遼金因之
10047
 
0444 魏書
營州(真君五年改置)
6445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0444 위서(554) 營州
營州 領郡六 縣十四 昌黎郡 領縣三 龍城 廣興定荒 建德郡 領縣三 石城 廣都 陽武 遼東郡 領縣二 襄平 ❸新昌²(晉屬 後罷 正光中復) 樂良郡 領縣二 永洛 帶方 冀陽郡 領縣二 平剛 柳城 營丘郡 領縣二 富平永安 영주(6군,14현) - 창려군(201호,용성,광흥,정황), 건덕군(200호,석성,광도,양무), 요동군(131호,양평,신창), 낙랑군(219호,영락,대방), 기양군(89호,평강,유성), 영구군(182호,부평,영안).
6493
 
0444┆이북5도청
▐ 위서의 영주, 남영주 그리고 평주는 다른 주군현의 호구수와 비교해 볼 때 실질적인 행정기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의 주군현은 군단위의 호수가 수만을 넘어가는 곳이 많다. 그렇다면 이들 주군현은 대한민국의 이북5도청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북5도청도 이북에 없고 서울 종로에 있으며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맡지 않고 있다.
3724 COMMENT
 
0445 후한서
臨渝(山海經曰 ❶碣石²之山 繩水出焉 其上有玉 其下多青碧 水經曰在縣南 郭璞曰 或曰在右北平驪成縣海邊山也) ▐ 이 주석에 나오는 산해경의 갈석은 구문 갈석이고 수경과 곽업의 갈석은 누현 갈석이다.
6479
 
0445 後漢書의 수성현에는 갈석이나 진장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
0445 後漢書의 수성현에는 갈석이나 진장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
15753
 
0515± 水經注
始皇 令太子扶蘇與蒙恬 築❹長城 起自臨洮至于❶碣石² 진시황이 태자 부소에게 명하여 몽염과 함께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까지 이르렀다. ▐ 사기(-91)에 임조에서 요동까지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수경주에는 임조에서 갈석까지로 바뀌어 있다. 碣石에서 秦長城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는 태강지리지(280~289)를 제외하면 수경주가 최초다. 수경주에는 누현 갈석 이야기는 있으나 수성 갈석 이야기는 없다.
14524
 
0515±┆遂城¹ 碣石³ 가설 (2)
0515±┆遂城¹ 碣石³ 가설 (2)
ᐥ당빈이 秦장성을 복구했다는 착각은 당빈이 복구한 장성의 끝이 碣石²이니 秦장성도 당연히 碣石¹²³까지였으리라는 착각으로 이어졌다.ᐥ
20786
 
0520~0525 魏書
營州 遼東郡 ❸新昌²(晉屬 後罷 正光中復)
4378
 
0520~0525 魏書
營州 樂良郡(前漢武帝置 二漢晉曰樂浪 後改罷 正光末復 治連城)
6473
 
0525~0528 魏書
孝昌中 營州陷
20810
 
0528  營州陷
0528 營州陷
6497
 
0528~0530 魏書
營州(永安末陷)
6429
 
0533 南營州 新昌
南營州(永熙二年 置寄治英雄城)┆(南營州) 遼東郡 ❸新昌²(永熙中置)┆後魏 置南營州 准營州 置五郡十一縣 新昌 屬遼東郡┆❷遂城² (漢北新城縣 後魏改為新昌)
3601#20803
 
0534~0537 魏書
營州(天平初復)
6456
 
0550~0577 隋書
後齊 省朝鮮入❸新昌³ 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
20804
 
0581  隋 開皇元年
0581 隋 開皇元年
6481
 
0581 隋書
上谷郡(開皇元年置易州)┆開皇元年 (易)州移
20808
 
0581 通典
隋初 置昌黎郡 後兼置易州
6421 COMMENT
 
0581 通典
隋初 置平州
6487
 
0583 隋書
(開皇)三年 (昌黎)郡廢
6444
 
0586 隋書
開皇六年 又省肥如入❸新昌³
20805
 
0598 新昌² → 遂城²
(❸新昌²) (開皇)十八年 改為❷遂城²┆新昌² 隋末為遂城² ▐ 요동에서 기원한 新昌²은 漢書에 요동군 18현의 하나로 나오고 後漢書에는 요동군 11성의 하나로 나오며 晉書에는 요동국 8현의 하나로 나온다. 魏書에는 영주 요동군 2현의 하나가 되었다가 남영주 요동군 2현의 하나가 되었다. 북제는 창려군 2현 중 하나로 넣었고 수나라는 창려군을 폐지하고 얼마 뒤 遂城²으로 개칭하였다.
3601#6516
 
0598 新昌¹ → 盧龍
(❸新昌³) (開皇)十八年 改名盧龍
3601#6526
 
0598 武遂 → 北新城(-206) → 新昌²(533) → 遂城²(598)
0598 武遂 → 北新城(-206) → 新昌²(533) → 遂城²(598)
❷² 위서(南營州 遼東郡 新昌²縣), 수서(武遂 → 新昌² → 遂城²), 구당서(北新城 → 新昌² → 遂城²)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전국시대에 나오는 武遂에 한나라가 중산국 北新城현을 설치하였는데, 후한때 탁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서진때 다시 고양국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533년에 북위가 이곳의 영웅성에 남영주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요동군 新昌²현을 두었는데, 598년에 수나라가 遂城²으로 개칭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6505 COMMENT
 
0598┆遂城¹ 碣石³ 가설 (3)
0598┆遂城¹ 碣石³ 가설 (3)
ᐥ당빈이 복구했다는 장성은 옛 武遂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武遂가 遂城²으로 개칭되면서 당빈의 장성도 遂城¹²에서 시작된 것이 되었다. 당빈의 장성은 秦장성을 복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개칭은 秦장성도 遂城¹²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이어졌다.ᐥ
20787
 
0598┆遼西┆右北平┆北平
▐ 漢 遼西┆且慮 海陽 新安平 柳城 令支 肥如 賓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 ➔ 後漢 遼西┆陽樂 海陽 令支 肥如 臨渝 ➔ 晉 遼西┆陽樂 肥如 海陽 ➔ 魏 遼西┆肥如 陽樂 海陽 ▐ 漢 右北平┆平剛 無終 石成 廷陵 俊靡 薋 徐無 字 土垠 白狼 夕陽 昌城 驪成 廣成 聚陽 平明 ➔ 後漢 右北平┆土垠 徐無 俊靡 無終 ➔ 晉 北平┆徐無 土垠 俊靡 無終 ➔ 魏 北平┆朝鮮 新昌³ ▐ 齊 北平┆新昌³ 肥如 ➔ 隋 北平┆新昌³ ➔ 隋 北平┆盧龍
9795
 
0605+ 平州廢 復置北平郡
大業初 置北平郡┆煬帝初 州廢 復置北平郡┆平州 隋為北平郡
3601#6440 COMMENT
 
0605+ 易州廢 置上谷郡
大業初 置上穀郡┆煬帝初 州廢 置上谷郡
3601#6424 COMMENT
 
0612 隋書(636)
鏤方 長岑 海冥 蓋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 樂浪 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踏頓 肅慎 ❶碣石³ 東暆 帶方 襄平 凡此衆軍 先奉廟略 駱驛引途 總集平壤
3601#21043
 
0612┆遂城¹ 碣石³ 가설 (4)
0612┆遂城¹ 碣石³ 가설 (4)
ᐥ秦장성의 끝은 碣石¹²³이라고도 하고 遂城¹²이라고도 하니 樂浪郡 遂城¹縣에 碣石³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는 옛 낙랑군을 차지하고 있는 고려를 치러 가면서 수나라가 내세울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다. 그래서 '秦장성은 낙랑 수성의 碣石³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날조되었다.ᐥ
20788
 
0612┆고려 정벌의 명분
0612┆고려 정벌의 명분
▐ 晉 이후 300여년만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隋가 晉 때까지 400여년간 존속하던 漢의 동방변군을 회복하려 시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정벌군 각 부대의 명칭도 한나라 고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에 맞춰 모두 요하 이동의 지명을 붙였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碣石³도 遂城¹ 碣石³이다. 태강지리지(280~289)를 제외하면 수서가 遂城¹ 碣石³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10239
 
0618  隋陷
0618 隋陷
6501
 
0619 平州
619 平州 ┆ 臨渝 肥如 ┆ 臨渝 盧龍 ┆ 臨渝 盧龍 撫寧 ┆ 624 盧龍 撫寧 ┆ 641 盧龍 撫寧 臨渝 ┆ 697 盧龍 撫寧 石城 ┆ 740 盧龍 撫寧 石城 馬城 ┆ 742 北平郡 ┆ 758 平州
20756
 
0636 수와 당의 고려에 대한 인식
고려를 중국의 옛 땅으로 인식하고 이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13974
 
0648  晉書 수성현에 漢書(82)와 後漢書(445)에 없던 진장성 이야기가 나타났다.
0648 晉書 수성현에 漢書(82)와 後漢書(445)에 없던 진장성 이야기가 나타났다.
15183
 
0648 晉書
❷遂城(秦築長城之所起) 수성(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14272
 
0679~0732 사기索隱
戰國策❶碣石¹山在常山九門縣┆ 地理志云❶碣石²山在北平驪城縣西南┆ 水經云在遼西臨逾縣南水中葢❶碣石²山┆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❶碣石³山長城所起 ▐ 전국책에 나오는 구문 갈석, 지리지와 수경에 나오는 누현 갈석 그리고 태강지리지에 나오는 수성 갈석을 인용해 놓았다.
3601#15200
 
0679~0732 사기索隱
三國邊匈奴(按三國燕趙秦) 因河為塞(按太康地記 秦塞自五原北九百里謂之造陽 東行終利賁山南漢陽西也 漢一作漁) 세 나라는 흉노와 접했다. (세 나라는 연, 조 그리고 진이다.) 그래서 황하가 요새가 되었다. (태강지리지에는 진나라의 요새가 오원 북쪽 9백리에 있는 조양에서 동쪽으로 이분산 남쪽에 있는 한양 서쪽까지였다고 되어 있다. 한양은 어양이라고도 한다.)
20863
 
0691± 十道四蕃志(太平御覽)
十道志曰 ❷遂城 戰國時武遂縣 漢之北新城 수성은 전국시대 무수인데 한나라의 북신성이다.
6512
 
0697 신당서(1060)
萬歲通天二年更名 有臨渝關 一名臨閭關 有大海關 有❶碣石²山 697년에 (임유를 석성으로) 개칭했다. 임유관 또는 임려관이 있고 대해관과 갈석산이 있다.
6508
 
0801 通典 古冀州
鳥夷皮服(海曲曰 鳥居鳥夷而衣其皮)夾右❶碣石¹入于河(碣石²海邊山名 在今北平郡盧龍縣 地言 禹夾行此山之右入河逆山也) 조이의 가죽옷은 갈석을 오른쪽으로 돌아 황하로 들어온다. (갈석은 해변의 산인데 북평군 노룡현에 있다. 地는 禹가 이 산의 오른쪽 황하로 들어와 산을 거슬렀다고 말한다.) ▐ 구문 갈석에 대한 기록을 누현 갈석으로 보고 해석하였다.
15092
 
0801 通典 古冀州
❷遂城(古遂武也秦築長城之所起) 수성(옛 무성이다. 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 수서(636) 등의 사서에 武遂라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의 遂武는 武遂의 오기다. 옛 武遂가 遂城으로 개칭된 것은 598년의 일이다.
3601#4275
 
0801 通典 古冀州
盧龍(漢肥如縣有❶碣石²山 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 晉太康地志同秦築長城所起自碣石³在今高麗舊界非此碣石²也 臨閭關今名臨榆關在縣城東一百八十里) 노룡현은 漢의 비여현이다. 갈석산이 있는데 돌비석처럼 해변에 우뚝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 晉의 태강지지에 '秦이 갈석에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 옛 고려의 경계 안에 있고 이 갈석이 아니다. 임려관은 지금 임유관인데 노룡현성 동쪽 180리에 있다.
15708
 
0801 通典 古冀州
▐ 진서(648) 遂城秦築長城之所起 ➔ 통전(801) 遂城古遂武也 秦築長城之所起 ┆ 사기색은(679~732) 大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 통전(801) 盧龍有碣石山 太康地志云 秦築長城所起自碣石
20768
 
0801 通典 高句麗
❶碣石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 尚書云夾右碣石¹入於河 右碣石²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³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의 동쪽 끝은 요수를 넘어 고려의 옛 터로 들어간다. 상서에 '갈석을 오른쪽에 끼고 강으로 들어간다'고 되어있는 우갈석은 강이 바다에 이르는 곳인데 지금의 북평군 남쪽 이십여리이므로 고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10192
 
0801 通典 高句麗
▐ 누현 갈석이 하구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전의 기록에 없던 것으로, 누현 갈석의 기록을 구문 갈석의 기록에 맞춰 해석하다보니 생겨난 인식인 듯하다.
20767
 
0801 通典 遼水
▐ 통전이 편찬되던 때는 고려가 망하고 100여년이 지난 후고 왕씨고려가 세워지기 100여년 전이므로 在今高麗舊界는 '지금 옛 고려의 경계 안에 있다'로 해석해야 하고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는 지금 장성이 동쪽으로 遼水를 건너 옛 고려가 있던 터로 들어간다'로 해석해야 한다. 통전의 遼水는 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南流至安市라는 구절로 보아 지금의 遼河다. 그렇다면 요수 건너 옛 고구려 터에 있었다는 漢樂浪郡遂成縣은 분명 요하 이동에 있었다.
3601#14498
 
0801 通典
0801 通典
① 晉太康地志同'秦築長城所起自碣石' ② 遂城(古遂武也秦築長城之所起) ③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 태강지리지에는 애초에 秦築長城所起自碣石이라고만 되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던 것에 사기색은이 ②의 영향으로 생겨나 당시에 퍼져 있던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이라는 이야기를 반영하여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樂浪遂城縣有를 떼어내고 碣石山長城所起라고만 했어야 했다.
20865
 
0801┆碣石
0801┆碣石
❶碣石²에 대해 문영(219±)은 此石著海旁(바닷가에 솟아 있는 바위)라고 했고 수경(265-)에는 南水中(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했으며 통전(801)은 海邊山名(바닷가의 산 이름)이라면서 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비석처럼 바닷가에 솟아 있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라고 설명했다. 고대의 해안선은 지금보다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누현 앞 바다의 갈석은 내륙 가운데로 들어오면서 이름을 잃었고 그 갈석을 따라 이름붙였던 인근의 갈석산만 지금까지 남았을 수 있다.
15198
 
0801┆絫, 碣石山, 臨渝(石城), 肥如(盧龍)
0801┆絫, 碣石山, 臨渝(石城), 肥如(盧龍)
❶碣石²은 전한때 요서의 絫에 있었는데 후한때 絫가 요서의 臨渝로 합쳐진 뒤 臨渝에서 나타난다. 臨渝는 서진때 요서의 양락으로 합쳐졌는데 이는 북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때 갈석은 요서의 肥如에서 나타난다. 북제가 요서를 없애고 肥如를 북평에 넣었는데 수나라가 肥如를 신창에 합쳤다가 신창을 盧龍으로 개칭하였다. 臨渝와 肥如는 당나라때 다시 나타나는데 肥如는 盧龍으로 개칭되고 臨渝는 石城으로 개칭되었다. 갈석은 이때 石城과 盧龍에서 나타난다.
20758
 
1785 대청광여도(大淸廣與圖)
15959
 
세종실록
옛 장성[古長城].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 광개토왕릉비를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인식하던 시절이니 이 기록의 만리장성을 진장성과 연결짓기는 힘들다.
9796
 
여러 갈석
지금의 갈석산 인근 해안에 碣石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곳인지 특정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3601#159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