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8년에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은 서진 때까지 존속하다 313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그러자 모용 선비가 그 유민을 받아 자신의 영토 내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모용 선비의 연나라를 흡수한 북위 때에는 낙랑군이 요서의 영주에 있었는데 다시 하북의 남영주로 옮겨졌다.
대방은 낙랑과 이동 경로가 같고 조선은 북위 때 산해관 서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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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晉書(648) 幽州 (7군국 34현 59020호)
范陽國(涿, 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燕國(薊, 安次, 昌平, 軍都, 廣陽, 潞, 安樂, 泉州, 雍奴, 狐奴)┆北平郡(徐無, 土垠, 俊靡, 無終)┆上谷郡(沮陽, 居庸)┆廣甯郡(下洛, 潘, 涿鹿)┆代郡(代, 廣昌, 平舒, 當城)┆遼西郡(陽樂, 肥如, 海陽)
11611#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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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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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솔까역사 晉書 平州
昌黎郡(昌黎, 賓徒)┆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樂浪郡(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 遂城을 武遂와 혼동했다.
11611#3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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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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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晉書(648) 平州
우임금 시절을 상고해 보면 기주 지역은 周의 유주가 되었고 漢의 우북평군과 접하였다.
後漢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하였고 그의 아들 강, 강의 아들 문의가 멋대로 요동을 점거하고 동이 9종을 모두 복종시켰다.
曹魏가 동이교위를 양평에 두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갈라 평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를 만들었다. 문의가 죽자 나중에 호동이교위를 양평에 두었다.
276년 10월에 평주를 설치하였다.
11611#9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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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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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6 晉書(648)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침이 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외는 매번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11611#9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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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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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 晉書(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진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11611#9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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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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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 晉書(648)
時二京傾覆幽冀淪陷廆刑政修明虛懷引納流亡士庶多襁褓負歸之廆乃立郡以統流人 冀州人為冀陽郡 豫州人為成周郡 青州人為營丘郡 併州人為唐國郡
두 서울이 무너지고 유주와 기주가 함락되었는데 모용외가 형벌을 밝게 하고 마음을 비워 사람들을 끌어안으니 떠돌던 많은 선비와 서민들이 아이를 업거나 짐을 지고 그에게 귀부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군을 세워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니 기주인은 기양군, 예주인은 성주군, 청주인은 영구군 그리고 병주인은 당국군에 속하게 했다.
11611#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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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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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資治通鑑(1084)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 이 낙랑군은 탁발위의 영주 낙랑군으로 연결된다.
11611#4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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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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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 百濟의 요서점유?
송서에는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고 진평군 진평현을 설치했다고 되어 있는데, 서진 말에 고려는 요동을 차지하지 못했고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당시 창려, 요동 등 서진의 평주는 모용부 선비가 차지했고 요서, 북평 등 유주는 단부 선비가 차지했었다.
고려의 자리에 모용을 넣고 백제의 자리에 단을 넣어야 자연스럽다.
그리고 진평이란 지명은 존재하지 않으며 북평군이 있었을 뿐이다.
11611#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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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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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7~0370 前燕
요서 일대에 살던 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鄴으로 옮겼다. 370년 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龍城-營州-柳城-朝陽
11611#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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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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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8 遼寧省錦州市義縣
조선령 창려 손영은 무리를 거느리고 후조를 막았다. 대성 왕청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후조에 호응하니 왕청 등의 목을 베었다. 함께 모의한 수백명이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죄를 청하니 손영은 이들을 모두 풀어주고 함께 막고 지켰다. 낙랑 태수 국팽이 자신의 경내 무리들이 모두 배반하자 향리에서 장사 200여명을 뽑아 함께 극성으로 돌아왔다.
▐ 義縣의 西北에 棘城이 있었다.
11611#1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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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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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5 ◾
구려, 우문 그리고 단은 모두 모용 선비와 경쟁하던 주변 세력들이다.
여기에 백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모용 선비와 경쟁하던 주변 세력들 중에 부여가 빠졌다.
백제는 472년에 북위에 표문을 올려 부여의 후예임을 밝힌 이후 중국에서는 부여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기록의 백제도 부여의 오기로 보인다.
모용선비는 285년에 부여를 멸망시켰는데, 부여 재건 시도는 이후 계속 이어졌다.
11611#7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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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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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8~0436 幽州
398年,後燕遷都到龍城,原來治所在龍城的幽州改為司隸校尉,以遼西郡、燕郡、范陽郡、北平郡為幽州,治所在肥如縣(今河北省盧龍縣西北)。399年,增設建德郡、石城郡、冀陽郡,燕郡、范陽郡、北平郡被北魏占領。402年,改治令支縣(今河北省遷安市西)。403年,建德郡、石城郡、冀陽郡另設冀州。北燕建立後,令支縣被北魏占領,幽州僑置肥如縣,和冀州同城而治。436年,魏太武帝滅北燕,廢除幽州。
11611#1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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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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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436 北燕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11611#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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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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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08 魏書(554)
文通使數萬人出城挑戰,昌黎公元丘與河間公元齊擊破之,死者萬餘人。文通尚書高紹率萬餘家保羌胡固。己卯,車駕討紹,辛巳,斬之。詔平東將軍賀多羅攻文通帶方太守慕容玄於猴固,撫軍大將軍、永昌王健攻建德,驃騎大將軍、樂平王丕攻冀陽,皆拔之,虜獲生口,班賜將士各有差。
▐ 연나라가 대방군을 설치하고 대방 태수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방군의 위치는 요령 의현 북부(辽宁义县北)로 추정된다.
11611#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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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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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09 魏書(554)
徙營丘成周遼東樂浪帶方玄菟六郡民三萬家于幽州 開倉以賑之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주민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눠주었다.
▐ 북위는 북평군을 설치하고 조선과 신창 두 현을 두어 조선민을 조선현에 안집하였다. 이 조선민은 북위가 432년에 끌어온 3만 가구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북평군은 모두 430호 1836구였으므로 북연의 낙랑군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 수백 가구 있었던 듯하다.
11611#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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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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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
호수로 보아 북위의 평주는 임시 행정 구역이다.
서진의 유주에 속했던 요서군과 북평군은 북위의 평주가 되었다. 이 평주 요서군에 소속된 현은 서진때와 같으나 북평군의 소속 현은 모두 바뀌었다.
북평군 조선현은 432년에 북연의 6군 3만 가구를 사민할 때 사민 중 조선민을 안집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이 유래를 모르고 이곳을 조선의 초기 위치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1611#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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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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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新昌
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 後屬 有盧龍山
전한 때는 탁에 속했고 후한과 서진 때는 요동에 속했으며 그 후 북평에 속했다. 노룡산이 있다.
▐ 新昌은 여러 개가 있는데 요동군에 속했던 신창은 요동군의 이동을 따라 요동에서 영주를 거쳐 남영주까지 이동하였다. 북평군의 이 신창은 연의 탁군에 북신성과 함께 있었다는 신창과 연결될 수 있다.
11611#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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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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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北燕 패망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11611#1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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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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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요서군과 북평군 내력
위서의 평주에는 요서군(비여,양악,해양)과 북평군(조선,신창)이 있었다.
高齊가 조선을 신창에 합치고, 요서군을 폐지하면서 해양을 비여에 합친 후 북평군에 넣어, 북평군에는 신창과 비여 두 현이 있게 되었다.
隋는 586년에 비여를 신창에 합쳐, 북평군에는 신창 하나만 남게 되었다.
隋는 598년에 신창을 노룡으로 개명하였다.
隋는 605년 이후 다시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마침내 북평군에는 노룡현 하나만 있게 되었다.
11611#1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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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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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 魏書(554) 營州
真君五年改置 444년에 주가 되었다.
營州領郡六縣十四昌黎郡領縣三龍城廣興定荒建德郡領縣三石城廣都陽武遼東郡領縣二襄平新昌樂良郡領縣二永洛帶方冀陽郡領縣二平剛柳城營丘郡領縣二富平永安
영주(6군,14현) - 창려군(201호,용성,광흥,정황), 건덕군(200호,석성,광도,양무), 요동군(131호,양평,신창), 낙랑군(219호,영락,대방), 기양군(89호,평강,유성), 영구군(182호,부평,영안).
11611#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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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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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 遼寧省朝陽市
▐ 요동군과 낙랑군은 520~525년에 설치되었다. 설치가 늦고 호수가 적은 이유는 432년에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3만 가구를 유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대체로 서진의 평주가 북위의 영주가 되었는데, 평주의 창려군, 요동국 그리고 낙랑군은 각각 영주의 창려군, 요동군 그리고 낙랑군이 되었고 평주의 대방군은 현이 되어 영주의 낙랑군에 소속되었다.
북위는 이 영주를 528~530년에 잃었다가 534~537년 초에 회복했다.
11611#1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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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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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王基
君諱基 字洪業 樂浪遂城人也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六世祖波 燕儀同三司 武邑公
군의 휘는 기이고 자는 홍업이며 낙랑 수성인이다.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6세조 파는 연나라의 의동삼사 무읍공이며 ...
11611#1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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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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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0529 취덕흥
524年,就德興和營州城民劉安定抓住營州刺史李仲遵,據州城反魏。城民王惡兒斬殺劉安定降魏,就德興東逃,自稱燕王。北魏朝廷派黃門侍郎盧同持節去營州慰勞,就德興降而復反。朝廷命盧同為幽州刺史兼尚書行台。盧同多次被就德興打敗,而回軍。526年,就德興攻陷平州,殺死刺史王買奴。529年十一月初二己卯日,就德興向北魏請降,營州平定。
▐ 이 사건으로 남영주를 설치하게 된다.
11611#1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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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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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3 魏書(554) 南營州
南營州領郡五縣十一昌黎郡領縣龍城廣興定荒遼東郡領縣二太平新昌建德郡領縣石城廣都營丘郡領縣三富平永安帶方樂良郡領縣一永樂
남영주(5군,11현) - 창려군(509호,용성,광흥,정황), 요동군(565호,태평,新昌), 건덕군(178호,석성,광도), 영구군(512호,부평,영안,대방), 낙랑군(49호,영락).
▐ 요동군의 太平은 수서에 襄平으로 되어 있다. 낙랑군의 永洛은 永樂으로 한자가 바뀌어 있다. 이후의 기록은 永樂을 썼다.
11611#1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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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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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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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9 樂浪郡朝鮮縣人韓顯度
元象二年四月十七日乐良郡朝鲜县人韩显度铭记
▐ 북위가 설치한 낙랑군에는 조선현이 없었다. 낙양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樂浪遂城人 무덤이 여러 기 발견되는데, 이는 이들의 조상이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 수성에서 왔다는 이야기일 뿐, 북위가 만든 낙랑군에는 수성현도 없었다. 한현도도 그의 조상이 대동강 유역의 낙랑 조선에서 왔다는 이야기일 뿐, 당시 이 지역에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11611#1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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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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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州
東漢時於東北方僅設幽州;漢獻帝時,公孫度自稱為平州州牧。三國曹魏分遼東郡、昌黎郡、玄菟郡、帶方郡、樂浪郡五郡為平州,之後又合併為幽州。
西晉咸寧二年十月,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郡置平州。統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永嘉之禍後到十六國時期,被慕容氏諸燕占據。313年,高句麗攻陷樂浪郡後,東夷校尉將平州遷至遼西的昌黎郡。
北魏滅北燕後,轄遼西、北平二郡。
11611#1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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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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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행정 구역
진서 주석에 각각 3700호와 4900호나 된다던 평주의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서에서 영주 낙랑군 하나로 줄여져 219호만 남았다. 남영주로 옮겨가면서는 더 줄어 49호만 남았다. 이는 북위의 낙랑군이 이북5도청처럼 명목상의 행정구역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서 주석에 5천호나 된다던 유주 북평군이 위서에서 430호 밖에 되지 않는 평주 북평군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낙랑군에 속했던 조선이 북평군으로 소속이 바뀐 것도 이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11611#1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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