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年代記 > -0108 樂浪史 > 0307 ~ 0436 鮮卑燕

진서와 위서 사이에 일어난 일들.
 
 여러 선비 종족
여러 선비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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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진서(648) 幽州
郡國七 縣三十四 戶五萬九千二十 范陽國(涿 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 燕國(薊 安次 昌平 軍都 廣陽 潞 安樂 泉州 雍奴 狐奴) 北平郡(徐無 土垠 俊靡 無終) 上谷郡(沮陽 居庸) 廣甯郡(下洛 潘 涿鹿) 代郡(代 廣昌 平舒 當城) 遼西郡(陽樂 肥如 海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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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0316 서진
0265~0316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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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진서(648) 平州
統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 昌黎郡(昌黎 賓徒) 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樂浪郡(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 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 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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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진서(648) 平州
26현 18100호다. 평주(5군국 26현 18100호) 창려군(창려 빈도) 요동국(양평 문 거취 낙취 안시 서안평 신창 역성) 낙랑군(조선 둔유 혼미 수성 누방 사망) 현토군(고구려 망평 고현) 대방군(대방 열구 남신 장잠 제해 함자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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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5 진서(648)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모용외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연(前燕)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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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6 진서(648)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침이 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외는 매번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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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0~0390 三韓의 재편
0290~0390 三韓의 재편
서진이 쇠약해지며 요동과 한반도는 재편의 과정을 겪게 된다. 낙랑과 대방은 고려에 통합되고 마한과 진한은 각각 백제와 신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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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 진서(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진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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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 진서(648)
0294 진서(648)
진서(648)에는 당빈이 溫에서 발해에 접한 碣石山까지 장성을 복구했다고 하나 통전(801)에는 武遂에서 진장성이 시작된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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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遂城 新昌 碣石山
신창, 수성 그리고 갈석산 모두 두 곳 이상의 지명에 사용되었는데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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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08 三國史記(1145) 高句麗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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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03 三國史記(1145) 新羅
樂浪帶方两國歸服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낙랑은 313년에, 대방은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었다. 이때는 단지 망하기 직전에 있던 낙랑과 대방의 난민들이 신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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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平壤으로 옮겼다. ▶고려는 247년에 平壤城으로 도읍을 옮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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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02 三國史記(1145) 百濟
潛師襲取樂浪西縣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쪽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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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10 三國史記(1145) 百濟
王爲樂浪大守所遣刺客賊害薨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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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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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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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0312 양서(636)
晉永嘉亂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元帝授平州刺史句驪王乙弗利頻寇遼東廆不能制 진 영가의 난리 때에 선비족의 모용외가 창려의 대극성을 점거하니 원제는 평주자사를 제수하였다. 구려왕 을불리가 자주 요동을 침범하였으나 외는 막을 수 없었다. ※원제는 동진의 황제로 재위는 317년부터 323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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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 三國史記(1145) 高句麗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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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 永嘉之亂
흉노가 서진의 도읍인 낙양을 점령하고 회제를 귀양보냈다. 이로써 서진 왕조는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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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 진서(648)
时二京倾覆幽冀沦陷廆刑政修明虚怀引纳流亡士庶多襁负归之廆乃立郡以统流人冀州人为冀阳郡豫州人为成周郡青州人为营丘郡并州人为唐国郡 두 서울이 무너지고 유주와 기주가 함락되었는데 모용외가 형벌을 밝게 하고 마음을 비워 사람들을 끌어안으니 떠돌던 많은 선비와 서민들이 아이를 업거나 짐을 지고 그에게 귀부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군을 세워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니 기주인은 기양군, 예주인은 성주군, 청주인은 영구군 그리고 병주인은 당국군에 속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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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자치통감(1084)
遼東張統據樂浪 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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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10 三國史記(1145) 高句麗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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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0338 遼西國
단부 선비가 서진의 燕, 漁陽, 范陽, 上谷, 廣寧, 代, 遼西, 北平 8군을 차지하고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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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0338┆北平
右北平郡,中國古郡名。戰國時燕國置。秦代郡治在無終縣(今天津薊縣)。西漢移治平剛縣(今內蒙古寧城縣甸子鎮黑城村黑城古城),隸屬於幽州刺史部。王莽時改稱北順。東漢時移治土垠縣(今河北省唐山市豐潤區東南)。西晉改右北平郡為北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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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0338┆遼西
秦漢治所在陽樂(今遼寧省義縣西)。轄今河北省遷西、樂亭,遼寧省松嶺山以東,長城以南,大凌河下游以西地區。 後轄境漸小,十六國前燕移治令支(今河北省遷安西),北燕移治肥如(今河北省盧龍縣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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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
기원전 108년에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은 서진 때까지 존속하다 313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그러자 모용 선비가 그 유민을 받아 자신의 영토 내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모용 선비의 연나라를 흡수한 북위 때에는 낙랑군이 요서의 영주에 있었는데 다시 하북의 남영주로 옮겨졌다. 대방은 낙랑과 이동 경로가 같고 조선은 북위 때 산해관 서쪽에 있었다. 313년 이후 옮겨간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의 위치를 가지고 처음 설치된 위치라 주장하는 오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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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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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三國史記(1145) 高句麗
현도성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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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현도와 高句麗
0315 현도와 高句麗
현도군은 심양과 薩爾滸城(살이허성) 사이에 있었고 고구려현은 赫圖阿拉(혁도아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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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 百濟의 요서점유?
송서(488) 등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고 되어 있는데, 서진 말에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지 못했으며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당시 창려, 요동 등 서진의 평주는 모용부 선비가 차지했고 요서, 북평 등 유주는 단부 선비가 차지했었다. 고구려의 자리에 모용을 넣고 백제의 자리에 단을 넣어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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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동진(東晉)
사마예(司馬睿)에 의해 강남에 세워진 서진(西晉)의 망명 왕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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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8~0321 진서(648)
高句丽寇辽东廆遣众击败之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자 모용외가 무리를 보내어 이를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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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08 三國史記(1145) 高句麗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 ▶고려는 342년에 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平壤城에 도읍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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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6 자치통감(1084)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동수(佟壽), 곽충(郭充), 적해(翟楷), 방감(龐鑒)은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유(幼)는 도중에 돌아왔고 황(皝)의 군사가 추급하여 적해, 방감은 베어죽이고, 동수, 곽충은 고려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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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7~0370 연(前燕)
0337~0370 연(前燕)
요서 일대에 살던 모용(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조(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업(鄴)으로 옮겼다. 370년 진(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龍城-營州-柳城-朝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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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08 三國史記(1145) 高句麗
丸都城으로 옮겨 살았다. ▶바로 이어진 모용 선비의 침공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모용 선비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거처를 산성으로 옮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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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모용황의 高句麗 침공
모용외의 아들 황(晃)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쇠(釗 고국원왕)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황(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환도(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구를 노략질하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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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02 三國史記(1145) 高句麗
고국원왕이 그의 동생을 연(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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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07 三國史記(1145) 高句麗
移居平壤東黄城 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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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5 진서(648)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 구려, 백제, 우문 그리고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백제인이 모용 선비의 포로가 되어 요서 조양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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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6 자치통감(1084)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전에 부여가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해왔는데 방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기 때문에 부여를 침공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 나오게 하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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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6 동사강목(1778)
자치통감 진목제 영화 2년에는,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있다가 백제(구려의 오류인 듯하다)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소산해지므로 서쪽으로 옮겨 연(燕)에 근접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말은 모두 중국에서 그릇 전문된 것인데, 억단하여 의견을 세워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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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6 동사강목(1778)
▶양직공도(526-539)는 백제를 마한에 속한다고 하였고(百濟舊來夷馬韓之屬) 최치원은 900년 이전에 당나라에 가서 마한은 고려가 되었다고 했다(馬韓則髙麗). 원래 고려라 기록된 것을 최치원 식의 인식에 의해 마한으로 바꿔 기록했다가, 다시 양직공도 식의 인식에 의해 백제로 바꿔 기록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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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0~0394  진(前秦)
0350~0394 진(前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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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5.12 三國史記(1145) 高句麗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刀龕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史 封樂浪公 王如故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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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4~0407 연(後燕)
0384~0407 연(後燕)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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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534 위(拓跋魏,北魏)
0386~0534 위(拓跋魏,北魏)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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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436 연(北燕)
0407~0436 연(北燕)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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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三國史記(1145) 고려
遣長史髙翼 入晉奉表 獻赭白馬 安帝封王髙句麗王樂安郡公 장사 고익을 진(東晉)나라에 보내 표를 올리고, 붉은 무늬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가 왕(장수왕)을 고구려왕 낙랑군공으로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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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08 위서(554)
文通使數萬人出城挑戰,昌黎公元丘與河間公元齊擊破之,死者萬餘人。文通尚書高紹率萬餘家保羌胡固。己卯,車駕討紹,辛巳,斬之。詔平東將軍賀多羅攻文通帶方太守慕容玄於猴固,撫軍大將軍、永昌王健攻建德,驃騎大將軍、樂平王丕攻冀陽,皆拔之,虜獲生口,班賜將士各有差。 ▶연나라가 대방군을 설치하고 대방 태수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방군의 위치는 요령 의현 북부(辽宁义县北)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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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09 위서(554)
徙營丘成周遼東樂浪帶方玄菟六郡民三萬家于幽州 開倉以賑之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주민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눠주었다. ▶북위는 북평군을 설치하고 조선과 신창 두 현을 두어 조선민을 조선현에 안집하였다. 이 조선민은 북위가 432년에 끌어온 3만 가구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북평군은 모두 430호 1836구였으므로 북연의 낙랑군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 수백 가구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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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09+ 위서(554) 註 朝鮮
二漢晉屬樂浪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復置屬焉 조선현은 전후한과 서진 때에 낙랑에 속했는데 나중에 폐지했다. 432년에 조선인들을 비여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하여 이들을 소속시켰다. ▶여기서의 비여는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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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12 위서(554)
馮文通長樂公崇及其母弟朗 朗弟邈 以遼西內屬 文通遣將封羽圍遼西 풍홍의 아들 장락공 숭, 숭의 외삼촌 랑 그리고 랑의 동생 막이 요서를 들어 항복해 왔다. 풍홍이 장수 봉우를 보내 요서를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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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2┆비여(肥如)
肥如縣為漢、曹魏和晉時縣名,隸屬遼西郡,其址在今河北省遷安市東部的萬軍山,為盧水(今沙河)和玄水(今青龍河)的交匯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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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3.01 위서(554)
撫軍大將軍 永昌王健督諸軍救遼西 무군대장군 영창왕 건이 군사를 이끌고 요서를 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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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3.02 위서(554)
詔兼鴻臚卿李繼 持節假馮崇車騎大將軍 遼西王 承制聽置尚書已下 賜崇功臣爵秩各有差 홍려경 이계에게 조서를 내려 지절 가 풍숭을 차기대장군 요서왕에 봉하고 상서 이하 관청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숭을 공신으로 대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을 내렸는데 차등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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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위서(554) 平州
平州領郡二縣五遼西郡領縣三肥如陽樂海陽北平郡領縣二朝鮮昌新 평주(2군,5현) - 요서군(537호,비여,양악,해양), 북평군(430호,조선,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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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6± 요서군과 북평군 내력
▶위서의 평주에는 요서군(비여,양악,해양)과 북평군(조선,신창)이 있었다. 高齊가 조선을 신창에 합치고, 요서군을 폐지하면서 해양을 비여에 합친 후 북평군에 넣어, 북평군에는 신창과 비여 두 현이 있게 되었다. 隋는 586년에 비여를 신창에 합쳐, 북평군에는 신창 하나만 남게 되었다. 隋는 598년에 신창을 노룡으로 개명하였다. 隋는 605년 이후 다시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마침내 북평군에는 노룡현 하나만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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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 위서(554) 營州
營州領郡六縣十四昌黎郡領縣三龍城廣興定荒建德郡領縣三石城廣都陽武遼東郡領縣二襄平新昌樂良郡領縣二永洛帶方冀陽郡領縣二平剛柳城營丘郡領縣二富平永安 영주(6군,14현) - 창려군(201호,용성,광흥,정황), 건덕군(200호,석성,광도,양무), 요동군(131호,양평,신창), 낙랑군(219호,영락,대방), 기양군(89호,평강,유성), 영구군(182호,부평,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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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4 三國史記(1145) 高句麗
齊帝䇿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제(南齊)나라 황제가 왕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이주 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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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三國史記(1145) 高句麗
梁髙祖下詔曰 髙句麗王樂浪郡公某 乃誠款著 貢驛相尋 冝豊秩命 式弘朝典 可撫軍 一作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 양(梁)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왕 낙랑군공 모는 정성이 두드러지고 조공하는 길이 서로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의전을 넓혀 무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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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3 위서(554) 南營州
南營州領郡五縣十一昌黎郡領縣龍城廣興定荒遼東郡領縣二太平新昌建德郡領縣石城廣都營丘郡領縣三富平永安帶方樂良郡領縣一永樂 남영주(5군,11현) - 창려군(509호,용성,광흥,정황), 요동군(565호,태평,新昌), 건덕군(178호,석성,광도), 영구군(512호,부평,영안,대방), 낙랑군(49호,영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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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 記纂淵海
北燕置平州及樂浪郡後魏改樂浪為北平郡 북연이 평주 및 낙랑군을 두었다. 북위가 낙랑을 북평군으로 고쳤다. ▶서진이 우북평군을 북평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북위는 북평군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으나 소속 현들은 서진의 북평군과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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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國行政區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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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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