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종족 > ¦유목민과 농경민

오환과 선비는 유목민이고 부여, 고구려 그리고 읍루는 농경민이었다. 부여와 고구려인의 주된 관심은 토양이 곡식의 생산에 얼마나 적합한지였다. 부여와 고구려에서 유목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데도 없고 부여와 고구려인의 유골을 분석해 보아도 채식을 위주로 했다는 사실만 밝혀질 뿐이다. 그런데 고구려와 읍루는 농업 생산력이 낮아서 노략질을 많이 하였다.
 
조와 쌀의 재배 유적
적색은 조의 재배 유적이고 녹색은 쌀의 재배 유적이다. 대체로 조는 황하가 중심이고 쌀은 장강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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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37 삼국사기(1145)
東海之濵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冝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동해의 물가에 땅이 있는데 이름이 가섭원이라 하고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이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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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37 삼국사기(1145)
至卒夲川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졸본천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과 물이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 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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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1 삼국사기(1145)
臣逐豕至國内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冝五穀 又多麋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준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생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단지 백성의 이익이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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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倭
남자는 모두 모자를 쓰지 않고 상투를 틀고, 목면으로 머리를 묶는다. 그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넓은 천을 묶어서 서로 이었으며, 실로 꿰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말아서 뒤로 묶었으며, 옷을 만드는 것이 홑이불과 같은데, 그 중앙을 뚫고 그곳으로 머리를 넣어 입는다. 벼와 모시를 재배하고 양잠을 하여 실을 만들며, 세모시, 좋은 비단 그리고 솜을 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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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夫餘
在國衣尙白 白布大袂 袍·袴履革鞜 出國則尙繒繡錦罽 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 以金銀飾帽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에는 비단옷·繡놓은 옷·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다 여우·삵괭이·원숭이·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履 신 리, 革 가죽 혁, 鞜 가죽신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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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弁韓
衣服絜淸長髮亦作廣幅細布 의복은 청결하며 장발로 다닌다. 또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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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馬韓
其人性彊勇 魁頭露紒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蹻蹋 (마한)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 章懷云 魁頭 猶科頭也 謂以髪縈繞 成科結也 紒 音計 장회 태자가 말하길, "괴두는 유과두다. 머리털을 얽고 둘러 묶는 것을 말한다. 紒는 발음이 計다." ※猶 원숭이 유, 髪 머리털 발, 縈 얽힐 영, 繞 두를 요, 蹻 발돋움할 교, 蹋 밟을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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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高句麗
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簿頭著幘 如幘而無餘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다. 0445 후한서 其公會衣服皆錦繡 金銀以自飾 大加主簿皆著幘 如冠幘而無後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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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과 농경민
오환과 선비는 유목민이고 부여, 고구려 그리고 읍루는 농경민이었다. 부여와 고구려인의 주된 관심은 토양이 곡식의 생산에 얼마나 적합한지였다. 부여와 고구려에서 유목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데도 없고 부여와 고구려인의 유골을 분석해 보아도 채식을 위주로 했다는 사실만 밝혀질 뿐이다. 그런데 고구려와 읍루는 농업 생산력이 낮아서 노략질을 많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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