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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신, 쓰개, 머리털 등은 이웃한 문화와 기후의 영향을 받았고, 유목이냐 농경이냐 하는 산업의 영향도 받았으며, 같은 농경 내에서도 밭이냐 논이냐 하는 작업 방식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Silk Road & Steppe Route
337
 
조와 쌀의 재배 유적
적색은 조의 재배 유적이고 녹색은 쌀의 재배 유적이다. 대체로 조는 황하가 중심이고 쌀은 장강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1348
 
半島と九州情勢
한반도로 농경민이 유입되는 경로는 크게 두 갈래다. 전쟁과 재난을 피해 북중국에서 요동을 지나 한반도로 내려오는 화전민이 하나의 갈래고 장강 유역에서 산동 반도나 유구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는 논농사 주민이 하나의 갈래다. 이들은 모두 중국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들어왔을 것이다.
11352
 
-1000 ~ -0200 Scythians
11334
 
-1000 ~ -0200 Scythians
고려의 무용총이나 삼실총의 벽화에 그려진 옷과 비슷하나 수백년의 시차가 있고 유목민과 농경민이라는 차이점도 있다.
11336
 
-0600 ~ -0100 Ordos
○ Centered on the Ordos Loop ○ The Bronze and early Iron Age from the 6th to 2nd centuries BCE ○ Represents the easternmost extension of Indo-European Eurasian nomads.
11371
 
-0208 秦始皇陵
진시황릉. 머리는 몽치 머리를 하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윗도리는 깃이 쐐기 모양이고 소매는 좁다. 쐐기 모양 깃을 보완하기 위해 목도리를 하였다.
2515#11372
 
-0206~0220 한화상전(汉画像砖)
사천성 출토. 머리에 새깃 장식 2개를 하고 있다. 윗도리는 허벅지까지 내려오고 허리띠로 고정하였다.
356 COMMENT
 
-0206~0220 한화상전(汉画像砖)
四川省
2297 COMMENT
 
-0107 이후 삼국지(289)
漢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朝服과 衣幘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朝服과 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14433
 
-0107 이후 삼국지(289)
▶幘은 비단으로 만들어 머리를 묶는 천이다. 전국 시대 진나라에서 시작되어 한나라때 유행하였다.
14434
 
0220 이전 东平汉墓(동평한묘)
❶ 발까지 내려오는 윗도리는 깃이 쐐기 모양이고 소매가 넓다.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것은 실용적이지 않으므로 왕과 귀족의 예복으로 판단된다. ○ 옷의 선(襈)을 다른 색으로 강조하는 점은 고려의 무용총 및 수산리 고분과 같다.
1503
 
0289 삼국지
▶왜인의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넓은 천을 묶어서 서로 이었으며, 실로 꿰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인은 옷을 만드는 것이 홑이불과 같은데, 그 중앙을 뚫고 그곳으로 머리를 넣어 입는다. ▶일본의 벼농사는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전해 주었다. 그렇다면 벼농사를 전해줄 당시의 한국인의 옷도 이 기록의 옷보다 낫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지는 우리의 조상이 한반도에 정착한 이후 들어온 것이 된다.
11488
 
0289 유목민과 농경민
▶오환과 선비는 유목민이고 부여, 맥고려 그리고 읍루는 농경민이었다. 이 차이가 옷에 대해 필요로 하는 기능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왔다. ▶맥고려 지역은 유목을 할 수 없는 지형이다. 기록을 보아도 맥고려는 오곡이 잘 되는 곳을 찾아다녔으며 토지와 곡식의 신 그리고 농업을 관장하는 별을 숭배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수렵과 채집 단계의 생산력으로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맥고려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되 낮은 생산력을 읍루처럼 약탈로 보완하였을 뿐이다.
11480
 
0313~0314 낙랑과 대방 흡수
낙랑과 대방을 병합하고 도읍을 낙랑으로 옮기면서 고려의 문화는 낙랑과 대방에 남아있던 중국 문화로 중심이 이동하였다.
6361 COMMENT
 
0357 안악 동수묘(佟壽墓) 백라관
신당서와 구당서에 고려왕은 백라관을 쓴다는 기록이 있어 동수묘의 인물을 고려왕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고려왕이 아닌 것이 분명한 진묘의 인물도 백라관을 쓰고 있고 장회태자묘에는 백라관을 쓴 당나라 사람이 여럿 등장하고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2525 COMMENT
 
0408 덕흥리 진묘(鎭墓)
❶ 가운데 남자는 소매가 넓고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있다. 이러한 옷은 한나라 벽화에서 왕이나 귀족이 입는 것으로 그려졌었는데, 여기서는 소를 끌고가는 사람이 입고 있어 특이하다.
5520 COMMENT
 
0408 덕흥리 진묘(鎭墓)
동일한 수렵도에서 구원강북조벽화묘와 덕흥리의 사냥꾼은 두건을 썼고 무용총은 새깃 장식을 했다.
11471
 
0408 덕흥리 진묘(鎭墓) 백라관
2524 COMMENT
 
0427< 금동관식
집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맥고려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새깃쓰개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나 무당의 새깃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341
 
0427~0668 전강서금관
출토지역으로 보아 낙랑고려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Tillya tepe crown과 비슷하고 세움 장식은 ふじのき 금동관과 비슷하다.
2288
 
0450± 무용총
4167 COMMENT
 
0450± 무용총
○ 웃옷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것과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 두 가지가 있고 바지는 헐렁하되 발목 부위에서는 죄는 방식이며 남자는 머리 쓰개에 깃털 장식을 하기도 하였다. 옷에 점박이 무늬를 한 것이 특이하다. ○ 긴 새깃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중국 사천의 한나라 벽돌 그림에서도 발견되고 미국 원주민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삼한시대에 긴 새깃으로 쓰개를 장식하는 것은 동북아에서 고려 이외의 나라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10752
 
0475± 각저총
1498
 
0475± 각저총
무용총의 사냥꾼, 각저총의 심판보는 사람 그리고 쌍영총의 말탄 사람의 옷이 거의 같다.
10756
 
0475± 수산리 고분
❶ 쐐기 모양의 깃, 넓은 소매 그리고 발까지 내려오는 긴 길이는 한나라 벽화에서 왕이나 귀족이 입은 것으로 나오는 예복과 같다.
2507 COMMENT
 
0475± 수산리 고분
2542 COMMENT
 
0475± 수산리 고분
수산라 고분의 여인과 일본 高松塚古墳의 여인은 세로줄 무늬의 치마를 입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저고리는 차이점이 있다. 일본은 끈으로 묶었고 고려는 폭이 넓은 띠로 묶었다. 또 고려 여인의 저고리는 끝을 다른 색깔의 천으로 강조했다.
11469
 
0500± 삼실총
11292
 
0500± 삼실총
집안의 우산촌에 있다.
11472
 
0500↤ 쌍영총
10845
 
0500↤ 쌍영총
○ 무용총의 사냥꾼과 쌍영총의 말탄 사람의 새깃 장식이 같다. ○ 무용총의 사냥꾼, 각저총의 심판보는 사람 그리고 쌍영총의 말탄 사람의 옷이 거의 같다.
11473
 
0514~0540 삼국사기(1145) 신라
至第二十三葉法興王 始定六部人服色尊卑之制 猶是夷俗 제 23대 법흥왕 때 처음으로 6부 사람들 복색의 존비제도를 정하였지만 여전히 동이의 습속이었다.
14435
 
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2539 COMMENT
 
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5515
 
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왼쪽으로부터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의 사신이고 그 다음이 양나라 황제다. 옷은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가 거의 동일하고 양나라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비슷한 편이다. 특히 목 아래가 쐐기 모양으로 파여 있는 모양은 그 부분을 둥글게 감싸는 중앙아 사신들의 옷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네 나라의 옷이 비슷해진 이유는 한반도에 400여년이나 존재했던 낙랑군을 통해 중국 문화가 고려와 한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11519
 
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❶ 양나라 황제가 입고 있는 옷은 한나라 벽화에서 왕이나 귀족이 입은 것으로 나오는 예복처럼 쐐기 모양의 깃, 넓은 소매 그리고 발까지 내려오는 긴 길이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11520 COMMENT
 
0529 일본서기(720)
가라가 신라와 한 편이 되어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 왕녀를 아내로 맞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 신라가 처음에 왕녀를 보낼 때에 100인을 함께 보내어 왕녀의 종자로 삼았다. 받아서 여러 현에 나누어 두고 新羅衣冠을 착용하게 했다. 아리사등이 服을 바꾼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어 되돌아 가게 했다. ▶어떤 나라의 복장을 하느냐는 지배 세력들에게 예민한 문제였다.
11349
 
0535-0557 敦煌西魏壁画 第285窟
○ 왼쪽 아래에 새깃과 비슷한 장식을 한 사람이 있다. 옷도 무용총의 사냥꾼, 각저총의 심판보는 사람 그리고 쌍영총의 말탄 사람의 옷과 비슷하다. 양직공도에 나오는 신라국사의 옷과도 비슷하다. ○ 활쏘기에 불편해서 그런 건지, 오른쪽 팔은 벗겨 놓았다.
347
 
0535-0557 敦煌 莫高窟
돈황 막고굴 Mogao Caves
2290
 
0550 ± "Tocharian donors", fresco from the Kizil Caves
10888
 
0550-0577 구원강북조벽화묘(九原岗北朝壁画墓)
5521 COMMENT
 
0550-0577 구원강북조벽화묘(九原岗北朝壁画墓)
2289
 
0550± 埴輪(はにわ)
11506
 
0550± 埴輪(はにわ)
일본의 고분 시대는 기마 문화의 도입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말을 타려면 바지를 입어야 한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はにわ에는 바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왜인은 바지를 입고 중간쯤을 끈으로 묶었다. 윗도리는 아래위 두 개의 고름으로 고정하였는데, 이는 바지를 묶는 것과 함께 고구려의 벽화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방식이다. 바지 저고리 문화의 도입 경로가 고구려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507
 
0589~0960 隋唐五代服饰
隋唐五代服饰  
 
0604~0618 수양제
❶ 쐐기 모양의 깃, 넓은 소매 그리고 바닥에 닿을 정도의 긴 길이는 한나라 벽화에 왕이나 귀족이 입는 것으로 나오는 예복과 근본적으로 같다.
14697
 
0636 수서
사람들은 모두 가죽 관을 쓰는데, 사인은 새의 깃을 더 꽂고, 귀인은 관을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 금·은으로 장식한다. 옷은 소매가 긴 적삼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으며, 흰 가죽띠에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2519 COMMENT
 
0636 주서
남자는 소매가 긴 적삼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와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그들의 관은 골소(骨蘇)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자주색 비단으로 만들었고 금은으로 얼기설기 장식하였다. 벼슬이 있는 사람은 그 위에 새의 깃 두 개를 꽂아 뚜렷하게 차이를 나타낸다. 부인들은 치마와 속옷을 갖추어 입고 옷자락이나 소매에는 선을 둘렀다.
2520 COMMENT
 
0648 당태종
❷ 둥근 깃, 좁은 소매 그리고 바닥에 닿지 않는 짧은 길이는 한나라 벽화에 왕이나 귀족이 입는 것으로 나오는 예복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14695
 
0648 삼국사기(1145) 신라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춘추는 장복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자 이에 (당태종은)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장복은 제사에 입는 옷이다. 다른 나라의 장복을 입는다는 것은 중요한 외교적 의미가 있었다.
11351
 
0648 삼국사기(1145) 신라
至眞徳在位二年 金春秋入唐 請襲唐儀 玄宗皇帝詔可之 兼賜衣帶 遂還來施行 以夷易華 진덕왕 재위 2년에 이르러 김춘추가 당에 입국하여 당나라의 의례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현종(태종의 오기) 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겸하여 옷과 띠를 하사하였다. 김춘추가 이내 돌아와서 이 제도를 시행하여 동이의 풍속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14436
 
0649 삼국사기(1145) 신라
始服中朝衣冠 중국의 의관을 작용하기 시작했다. ▶지배 세력의 복장은 외교적 필요에 의해 쉽게 바뀔 수 있었다. 따라서 종족의 정체성과는 별개다.
11350
 
0650± Afrasiab murals
10767
 
0650± Afrasiab murals
왼쪽으로부터 3명은 중앙아인, 4명은 당나라 사신, 4명은 터키 사신 그리고 2명은 고려 사신이다. 고려 사신의 윗도리만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고 나머지는 모두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11461
 
0659 북사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을 쓴다. 그 모양은 고깔과 같은데, 사인은 두개의 새깃을 더 꽂는다. 귀한 사람들은 그 관을 소골(蘇骨)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자주빛 비단으로 만들어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다. 의복은 소매가 긴 적삼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에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들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2521 COMMENT
 
0664 삼국사기(1145) 신라
文武王在位四年 又革婦人之服 自此已後 衣冠同於中國 문무왕 재위 4년에 또 부인의 복식제도를 고쳐서 이로부터 의관이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
14437
 
0668 고려의 패망
고려가 망한 뒤에도 신라의 북쪽 경계는 한동안 이전의 북쪽 경계인 임진강 선을 유지하였다. 고려의 발상지인 맥은 예, 부여 그리고 옥저와 함께 발해의 땅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문화가 신라로 계승된 것은 거의 없다.
2518
 
0684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❶ 쐐기 모양의 깃, 넓은 소매 그리고 바닥에 닿을 정도의 긴 길이는 한나라 벽화에 왕이나 귀족이 입는 것으로 나오는 예복과 근본적으로 같다. ○ 당태종 이후에도 이런 복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4698
 
0684 장회태자묘(章怀太子墓) 백라관과 새깃쓰개
새깃쓰개를 한 사신의 국적에 대해서는 신라라는 견해와 고려라는 견해가 병존한다. 차남이었던 이현이 태자로 책봉된 해는 형이 죽은 675년인데 이때는 이미 고려가 망한 후이기 때문에 고려의 사신일 수는 없다는 것이 전자의 논거다. 신라는 649년에 관복을 당나라 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사신이 조우관을 썼을 수 없고 고려가 망한 후에도 고려왕은 요동도독조선군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고려의 옷차림을 한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후자의 논거다. 
2282 COMMENT
 
0684 건릉(乾陵, 章怀太子墓 포함)
장회태자묘 묘도와 묘실에는 총 50여 폭의 벽화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마구(馬球) 경기, 출행(出行), 객사(客使), 의장대(儀仗隊), 남녀시종의 그림과 같이 귀족의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그림부터 청룡⋅백호⋅일월성신 등 신앙적인 주제까지 다양하여 미술사에서 가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벽화는 채색화가 많으며 우선 회벽에 밑그림을 그린 후에 연한 먹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착색 후 먹으로 다시 윤곽선을 그리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2298 COMMENT
 
0694~0710 高松塚古墳
たかまつづかこふん
2273 COMMENT
 
0918 이후 삼국사기(1145) 왕고
我太祖受命 凡國衆法度多因羅舊 則至今朝□士女之衣裳 蓋亦春秋請來之遺制歟 우리 태조가 명을 받은 후에 모든 국가 법도는 신라의 옛 것을 따른 것이 많았으므로 즉 지금의 조정과 남녀의 의상도 이 역시 대개 춘추가 청해서 들여와 남아있는 제도일 것이다.
14438
 
0945 구당서 고려
의상과 복식은 왕만이 5채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흰 비단으로 만든 관(白羅爲冠)을 쓰고 흰 가죽으로 만든 소대를 (두르는데) 관과 대는 모두 금으로 장식한다. 벼슬이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고, 그 다음은 붉은 비단 관을 쓰는데 새깃 두개를 꽃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저고리는 통소매이고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띠를 두르고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백성들은 베옷을 입고 고깔을 쓰며 부인은 머리에 건괵을 쓴다.
2522 COMMENT
 
1060 신당서 고려
왕은 5채로 된 옷을 입고 백라로 만든 관(白羅製冠)을 쓰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 대신은 청라관을 쓰고 다음은 강라관을 쓰고 두개의 새깃을 꽂고 금테와 은테를 섞어 두른다. 저고리는 통소매이고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띠를 두르고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서민은 베옷을 입고 고깔을 쓴다. 여자는 머리에 건괵을 쓴다.
2523 COMMENT
 
1103 삼국사기(1145) 왕고
又宋使臣劉逵·吳拭来聘在舘 宴次見郷糚倡女 召来上階 指闊䄂衣·色絲帶·大裙 漢曰 此皆三代之服 不擬尚行 於此 知今之婦人禮服 蓋亦唐之旧欤 또 송 사신 유규와 오식이 내빙하여 숙소에 묵고 있을 때 연회에서 향장한 기생을 보고서 계단 위로 불러와서 활수의와 색사대, 대군을 가리키며 찬탄하여 말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삼대 옷인데, 여전히 쓰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지금 부녀의 예복도 대개 당의 옛 것임을 알 수 있다.
14439
 
1300s 元 成宗 鐵穆耳
14685
 
1458 세종
합천 해인사에 그려져 있다.
14686
 
1637~1800± 漢服과 韓服
11347
 
1637~1800± 漢服과 韓服
왼쪽의 두 그림은 각각 중국의 논갈이와 모내기를 그린 그림이고 오른쪽 두 그림은 각각 한국의 논갈이와 모내기를 그린 그림이다. 중국과 한국 모두 수시로 맨발로 무논에 들어가 작업을 해야하는 벼농사 농경민이다. 작업이 비슷하면 그에 맞는 옷도 비슷해질 수 있다. 말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기마 유목민과는 근본적으로 옷에 대해 필요로 하는 기능이 다르다.
2515#11355
 
1962 한국
韓服은 洋服으로 교체되기 전에 한국 민중들이 입었던 옷을 말한다. 여기에 官服은 포함되지 않는다. 韓服은 시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왔고 삼한 시대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근대 이후 한국인의 옷은 韓服에서 洋服으로 비교적 서서히 교체되었다.
14665
 
1967 중국
漢服은 만주족의 통치를 받기 전에 중국인들이 입었던 옷을 말한다. 만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만주족의 旗袍로 교체되었다가 한국인의 의복이 韓服에서 洋服으로 서서히 교체될 무렵 중국인의 옷도 다시 洋服으로 급속히 교체되었다.
14664
 
Sitting Bull
A Hunkpapa Lakota holy man who led his people during years of resistance to United States government policies. ▶새깃을 머리에 장식으로 꽂는 문화는 전파에 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
2302 COMMENT
 
官服
왼쪽부터 당태종, 원세조, 명태조, 조선태조 그리고 청태조의 그림이다. 조선태조가 입고 있는 옷은 당나라와 명나라의 官服과 같다. 이러한 官服은 정치적 이해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생활의 편리함이나 유행에 따라 변하는 민중들의 옷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의 왕조는 대체로 중국의 왕조와 협력하여 북방 민족들에 대처하였으므로 한국의 官服은 중국의 官服을 따랐다.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 官服은 韓服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4687
 
머리털
동북아인은 머리카락이 굵고 곧아서 그대로 기르면 거추장스럽게 된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정수리로 모아 묶는 상투가 일찍부터 틀어졌다. 각종 쓰개도 상투를 먼저 틀고 그 위에 씌워졌다. 진시황릉의 토용은 모두 상투를 튼 상태이며 마한이나 왜인에 대한 기록에도 상투를 틀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변한과 신라는 장발을 했다.
2515#11403
 

건조한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다니며 유목을 하는 사람들과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 벼농사를 하며 수시로 무논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신이 같을 수 없다. 가죽신과 짚신은 각각 기마 유목민과 벼농사 농민의 신을 대표한다.
2515#5516
 
한국과 매우 다른 몽골과 만주의 옷
한국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목 아래가 파여 있지 않고 고름 대신 허리띠로 고정하며 색상이 화려하다는 점이다. 말타기에는 불편해 보이나 추운 날씨 때문에 긴 옷을 입는 듯하다.
11321
 
한복 (韓服)
11323
 
한복 (韓服)
○ 한국인의 조상이 농경 문화를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올 때는 바지가 없었던 듯하다. 이후 바지 저고리 문화가 기마 문화와 함께 들어와 한복의 틀을 만들었고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 고구려인과 한국인은 별개의 종족이었고 고구려의 대부분은 신라의 한국 통일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옷은 한민족의 옷이 아니다.
2515#11304
 
¦복식 용어
冠 - 갓 관   帶 - 띠 대   帽 - 모자 모   幘 - 머리쓰개 책   弁 - 고깔 변   服飾 - 복식   漢服系統之巾   綵 - 비단 채   衣裳 - 의상   襈 - 옷 가장자리 선   采 - 풍채 채   건괵(巾幗)   단령(團領)   복두(幞頭)   사모(紗帽)   원령(圓領)   이조시대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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