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년에 백제가 馬韓을 병합하면서 韓은 좁은 의미로 백제를 뜻하게 되었다.
백제의 동쪽 경계는 백제와 대립하던 춘천의 東有樂浪이 337년에 고려에 병합된 사실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왜는 397년에 백제로부터 東韓 등 대부분의 땅을 빼앗는데, 당시 백제의 도읍은 한성에 있었으므로 東韓은 한성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왜는 405년에 빼앗은 땅 중에서 가장 먼저 東韓을 돌려주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東韓은 한성에 가까이 있었던 듯하다. 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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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03 日本書紀(720)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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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 日本書紀(720)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仍且賜東韓之地而遣之(東韓者 甘羅城·高難城·爾林城是也)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이다.
▐ 峴南·支侵·谷那·東韓 중에서 가장 먼저 東韓을 백제에게 되돌려준 것으로 보아 東韓은 한성에서 가까운 곳이었던 듯하다.
7271#13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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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7 日本書紀(720)
기생반숙니가 임나를 점거하고 고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의 왕노릇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이라고 칭하였다. 임나의 좌로·나기타갑배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의 적막이해를 이림에서 죽이고(爾林은 고려의 땅이다) 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7271#13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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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日本書紀(720)
백제에 있는 일본의 사자가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백제본기에는 4월 1일 경진에 日本 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한다.) 백제왕 성명이 사자에게 “임나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겠다. 延那斯와 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칙에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고구려 노 6구를 바치고 별도로 사자에게 노 1구를 주었다. (모두 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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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今勿内
今勿内(今勿奴 萬弩) → 黒壤(黄壤) → 鎭州
▐ 진천 분지의 물은 청주로 흘러가지만 험한 산지에 의해 두 지역은 분리되어 별개의 문화권을 형성했을 듯하다. 그 결과 진천은 이천과 함께 東韓으로 인식되고 청주는 대전 및 공주와 함께 峴南으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7271#1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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