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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
1943년 11월 27일 미국, 영국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상은 카이로에 모여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한국에 대해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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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봉기
해방 직후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가 대세였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조시대에 쌓은 부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모두 빼앗아 고루 나눠주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고 정치 세력도 사회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재빨리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앞서나갔다. 또 한국을 둘러싼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경쟁을 경험했던 한국인들은 일본이 패하고 중국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이제 한국을 장악할 나라는 소련 밖에 없으며 그 소련의 이념을 받아들일 수 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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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948년 12월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이 철수하였다. 그리고 1949년 6월에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도 500여 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해 12월 중국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는 일이 있었다. 이런 정세에 대응하여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알류산, 일본, 오키나와 그리고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방어선은 한국, 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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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우리 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의 유법을 두었으니 선현의 통론한 바 준성조지공분수지법하여 혁후인사유겸병지폐라 하였으니 이는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라는 토지혁명이다. 우리 민족은 옛 규칙과 새 법을 참작하여 토지제도를 국유로 확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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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1.27 카이로 선언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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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1945.07.26 포츠담 선언
이 회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 내용은 "포츠담 선언"으로 공포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회담에 참여하여 선언에 서명하였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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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8.15 옥음방송
일본 제국의 히로히토 천황이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를 읽은 라디오 방송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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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06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정·선포하였다. 중앙인민위원 55명과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였으며 군정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남북의 전 도, 군, 면에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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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08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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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9.16 민주당(民主黨)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조병옥, 장택상, 윤보선 등이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는데 지주와 자본가들이 주축이었고 일조시대 기득권층이 의지했다. 한민당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그로부터 나온 조선인민공화국을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조병옥, 장택상, 윤보선 등은 미군정청에 참여하였고 옛 조선총독부의 경찰과 관료를 그대로 기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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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01 대구인민봉기
대구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대구에서 응축된 모순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으면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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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제주인민봉기
2021.04.06 4·3 미국에 묻다제주학살의 책임 - 미국, 민주당 그리고 기독교
 
1948.11 대구6연대 반란
사회주의 성향의 하재팔은 해방 후 대구에서 국군준비대를 만들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용납되지 않자 해체하고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수료 후 1946년 2월에 대구 중동에서 6연대가 창설되자 거기에 들어갔다. 6연대는 하재팔과 그해 10월에 일어난 대구인민봉기의 영향을 받아 분위기가 사회주의 성향으로 흘렀다. 1948년 여순 반란 이후 숙군 작업이 벌어지자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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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보도연맹 학살
해방 직후 한국 민중들은 사회주의를 원했다. 이러한 염원을 반영하여 전국에 걸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미군은 이 인공을 뭉개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우익 폭력조직을 사주하여 좌익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하였다. 대구인민봉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고 제주인민봉기로 이어졌다. 이어서 한국전쟁까지 터지자 미국과 우익은 민중학살로 대응하며 이남 사회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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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06.25 의열단의 이승만 저격
의열단 출신의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을 저격하였으나 처단에는 실패했다. 이사건의 배후에는 역시 의열단 출신의 김시현 의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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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마지막 빨치산
성일기는 12월27일 자택에서, 유응재는 1월16일, 이원량은 1월19일 대구 시내에서, 지춘란은 1월20일 팔공산 아지트에서, 남도부는 1월21일 리어카 행상 행세를 하다가 동인동에서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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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516군사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만든 당이다. 민주당의 색깔 공세에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0여년 전에 불법화된 남로당 지지계층이 공화당 지지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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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0.17 윤보선
박정희는 간첩 황태성의 자금 20만불을 정치자금으로 써서 공화당을 조직하였다. 박정희가 물러나야 미국의 원조도 증가된다. 부산과 대구는 6.25당시 후퇴하지 않은 곳으로 빨갱이가 많고 인민군이 침입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형이 10.1폭동사건에 좌익분자로 총살당하였다. 박정희도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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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2.14 황태성 처형
'황태성 처형' 내막1963.10.12 윤보선1963.10.15 제5대 대통령 선거1963.10.17 윤보선 발언 모음1963.12.14 황태성 총살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위키백과: 황태성황태성 이야기
 
1968 통일혁명당
통일혁명당은 김종태가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된 혁명 조직이었다. 통혁당은 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주범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머물렀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대구), 이문규(대구), 김질락(김종태 조카)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신영복(의령)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88년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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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 23명 중 서도원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징역 15~20년의 중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서도원(창녕), 김용원(함안), 이수병(의령), 우홍선(울주), 송상진(달성), 여정남(대구), 하재완(창녕), 도예종(대구)
15053 SHARED
 
1980 광주사태
“광장 중앙에 8t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사람이 몰려 웅성거렸다.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이었다. 폭도들이 운전사, 조수를 끌어내려 때리고 발로 차고 밟고 하여 두 사람이 현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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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6.29 노태우의 6.29선언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표 노태우가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요구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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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 미군의 성격
일본의 패망 직후 미군은 일본군을 해산시킨다는 명분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생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38도선 이남 지역을 자신들이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역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항복 또는 휴전조항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하여 점령한 적 영토내에서 실질적인 통제를 하는 군대'라는 점령군(占領軍, Occupation Troops)의 의미에 정확히 일치한다. 해방군으로 남으려면 인공을 존중했어야 했다.
15952 SHARED
 
자료
1945.09.02 일본의 항복문서1946.02 비상국민회의1946.02 민주주의민족전선1948.0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 기념사1948.12.12 유엔총회결의 195호1951 쥐잡기작전1971.04.27 제7대 대통령 선거자료
 
혁명기념과 건국기념
임정건국론과 임정법통론은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역할을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주장이다. 임정건국론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기부터 주장했었고 임정법통론은 1945년 말에 임시정부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임정법통론에 대해 국내에서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했던 세력은 반발했고 정치 세력은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과정에는 좌파가 배제되었고 나라의 색깔은 임시정부의 입맛에 맞게 칠해졌다. 그래서 헌법1호부터 헌법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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