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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07-04 광해군 일기
뽑아 놓은 병정 가운데 포수(砲手)는 3천 5백 명인데 평안도 포수가 1천 명, 전라도 포수가 1천 명, 충청도 포수가 1천 명, 황해도 포수가 5백 명입니다. 사수(射手)는 3천 5백 명인데, 평안도 사수가 1천 5백 명, 전라도 사수가 5백 명, 충청도 사수가 5백 명, 황해도 사수가 1천 명입니다. 살수(殺手)는 3천 명인데, 평안도 살수가 1천 명, 전라도 살수가 1천 명, 충청도 살수가 5백 명, 황해도 살수가 5백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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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3-12 광해군 일기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三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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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3-23 책중일록(柵中日錄)
한 집에 머무르던 양반들이 밤을 틈타 여주인을 죽이고 도주하는 일이 있었고 오랑캐 여인을 강간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자도 있었다. 오랑캐 추장(누르하치)이 노하여 양반을 모두 죽이게 했다. 且有數人同寓一舍 乘夜殺其主女而逃 又有強奸胡女而現發者 奴酋令盡殺兩班之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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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3-24 광해군 일기
3월 24일에는 양반이라고 일컫는 4백 70여 명을 골라 뽑아서 모두 살해하고, 군사는 농군(農軍)으로 만들어 여러 곳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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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3-25 광해군 일기
평안 감사 박엽이 치계하였다. “달아나 돌아온 함종의 포수 장부기 등이 말하기를, ‘노추는 우리 군사들을 부대별로 세운 다음 손바닥에 윤기가 나는 자와 신체가 건실한 자를 뽑아 별도로 다른 곳에 두고, 나머지는 갈라서 농부들에게 소속시켜 각처의 부락으로 분산시켜 보내었다. 도원수·부원수·종사관·방어사는 성안의 〈오랑캐의 처소에다〉 구류해 두고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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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4-08 광해군 일기
당초에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은, 상이 명나라 조정의 징병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억지로 출사시킨 것이었지, 우리 나라는 애초부터 그들을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실로 상대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과 몰래 통하게 하였던 것인데 이 때문에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오랑캐의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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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4-08 광해군 일기
상이 인정전에서 상(常) 차관(差官, 중국에서 임무를 띠고 우리 나라에 파견된 관원)을 접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저희 나라는 천조에서 구해준 은혜를 입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노적이 창궐하였습니다. 저희 나라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적을 토벌하였으나 정예병과 무기가 모조리 섬멸되고 없어져 스스로를 보존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서 지키고 방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돌아가 양 대인(楊大人)께 보고하기를 간절히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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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4-15 광해군 일기
비변사가 아뢰기를, “체찰 부사 장만이 올린 장계를 보니, ‘노추가 그들에게 함락된 군사 중 양반들을 골라 외성에다 유치해 놓고 모두 죽였다.’고 한 말이 있었습니다. 이 건도 〈보고의 문서에〉 써 넣어서 본국의 군사가 많이 살륙되었다는 뜻을 밝히는 것이 일의 돌아가는 상황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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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7-08 광해군 일기
체찰 부사 장만이 치계하기를,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각도를 모두 합하면 1천 4백여 명인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간 정예 병사가 1만 3천여 명이었는데, 투항한 후 장사(將士, 양반을 말하는 듯)는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고 군졸은 모두 농민에게 무더기로 나누어 주어 〈지키게〉 하였으므로 계속 도망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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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7-18 광해군 일기
전교하였다. "그들에게 답하기를 ‘중국의 차관이 이미 본국에 도착하여 있으니 번거롭게 일일이 말할 수 없다. 왜노(倭奴)는 지금 우리 나라에서 하는 말을 복종하고 있으니 왜병 백만을 종이 한 장으로 부를 경우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모을 수 있다. 귀국에서도 화친을 하고 싶다면 즉시 노략하여 간 사람과 물건을 보내어 화친의 실상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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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7-19 광해군 일기
동년 7월 19일에는 강홍립 등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던 52명을 또 살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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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11-08 광해군 일기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랑캐의 서신에 대하여 답서를 보내는 일을, 신들이 (전에 내린) 비망기의 내용을 가지고 반복해서 상의하였는데, 왜병(倭兵) 1백만 명을 서찰 한 장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은 저들에게 우리의 나약함을 보이고 (도리어 저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꼭 알맞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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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_ 사르후 전투
1619년 명나라에 쳐들어오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 조선, 여진족까지 참전한 대전투로 이 전투에서 명나라가 크게 패해 명나라가 쇠퇴했고 후금은 만주 지역을 차지했으며, 군대를 파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부대는 전체 투항하여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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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1-17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금나라가 침입하자 대책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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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1-26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융복으로 갈아입고 노량에 행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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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1-29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강을 건너 행궁에 도착하고, 청 사신이 화친의 뜻을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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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02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청 사신이 갑곶에 이르렀는데 서신은 화친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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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05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진창군 강인을 시켜 명을 섬기고 청과 화친 한다는 뜻의 글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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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07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강숙·박립이 화친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청나라 서신을 가지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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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1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유도 대장 김상용이 청 군사가 임진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달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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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2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이계선(李繼先)의 아들 보(溥)를 왕제(王弟)로 삼아 이름을 부(傅)로 고치고 수성군(遂成君)으로 봉호(封號)하고, 좌통례(左通禮) 이홍망(李弘望)을 호행관(護行官)으로 삼았다. “꼭 종실로 할 것은 없다. 옛날에도 사성(賜姓)한 전례가 있었는데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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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3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청이 요구한 소·명주·말·목면·면주 등에 대한 논의. “이미 원창 부령(原昌副令)으로 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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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3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원창 부령(原昌副令) 이구(李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은시(銀匙)·은저(銀筯)·은병(銀甁)·은잔(銀盞) 등의 물건을 하사하고 나서 보내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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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4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와 이홍망(李弘望)의 처자에게 급료를 지급하라. 이홍망은 당상으로 승급하여 보내고 원창군이 타는 말은 내사복(內司僕)으로 하여금 선택하여 주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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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4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유해(劉海)가 왕제(王弟)를 만나볼 것을 요청하니, 마땅히 원창군(原昌君)으로 하여금 예모를 강습하도록 하여 예의에 실수가 있어 모욕(侮辱)을 취하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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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5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원창군 이구를 인질로 보내고, 요구한 재물은 다 못 보낸다는 내용의 국서. "어린 아우 원창군 이구를 군전(軍前)으로 보내어 함께 서약을 정하게 하였으니, 귀국은 바로 군사를 퇴각하여 돌아가 우리의 경내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 어린 아우가 깊은 궁궐에서 생장하여 아보(阿保)의 손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원래 지식이 없으니, 주선하고 응대함에 있어 아마도 실수가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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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5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사간 윤황이 지금의 화친은 항복이니 화친하지 말 것을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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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5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원창군 이구와 이홍망(李弘望)을 인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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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8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윤황이 항복이라는 말을 썼으므로 체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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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19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윤황을 체직시키지 말도록 합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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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2-23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평산(平山)의 적이 일부는 서봉(西峯)으로, 일부는 독부(禿阜)로, 일부는 우암(牛巖)으로 출발하였는데, 원창군(原昌君) 일행은 영솔하고 서봉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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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4-01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명나라에 청과 화친하기까지의 사정을 아뢰다.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 호칭하여 포백(布帛) 등 예물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으로 가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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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4-10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대가가 행궁을 출발하여 갑곶을 건너 통진에 머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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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4-12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양천을 출발하여 종로로 가서 위안제를 지내고 경덕궁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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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05-28 조선왕조실록 인조 05년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 호행관(護行官) 이홍망(李弘望), 평안도 순무 어사(平安道巡撫御史) 이경의(李景義)를 인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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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12-14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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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12-15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강화에 대한 일을 계달하면서 적이 왕제(王弟) 및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이에 능봉수(綾峯守) 칭(偁)을 왕의 아우라 칭하고 판서 심집(沈諿)을 대신의 직함으로 가칭(假稱)하여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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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12-16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능봉군(綾峯君) 칭(偁)과 심집(沈諿)이 노영(虜營)으로 가서 강화를 의논하였다. 오랑캐가 마침내 박난영(朴蘭英)에게 묻자 난영이 칭(偁)은 진짜 왕제이고 심집은 진짜 대신이라고 답하니, 오랑캐가 크게 노하여 난영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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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28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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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30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상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주서 각 1인을 거느리고, 세자는 시강원·익위사의 제관을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아갔다. 용골대 등이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나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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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2-05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당시 육경(六卿)은 아들을 오랑캐에게 인질로 보내야 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회피하였다. 호조 판서 김신국이 드디어 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차자를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자 상이 그의 체직을 허락하고 승지 정지우(鄭之羽)는 사정(私情)을 따라 차자를 봉입(捧入)하였다는 이유로 파직을 명하고, 이경직으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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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2-12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김신국을 삭탈 관직하고 형조 판서 심집을 국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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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4-22 청실록
至於朝鮮婦女軍士以力戰得之 今聞我國之婦女沃以熱水拷以酷刑既不容為妾又不留為婢妒忌殘虐莫此為甚 此等婦人朕必懲以從夫殉死之例法無可宥 조선의 부녀자는 병사들이 힘들게 싸워 얻은 것이다. 지금 들으니, 우리 나라 부녀자들이 뜨거운 물을 붇고 때리고 해서 첩이나 계집종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질투와 잔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이런 부인들은, 짐이 '남편을 따라 죽는 부인'의 예법으로 응징하고 용서치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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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광개토왕, 장수왕 그리고 청태종
남한산성 아래 한강 이남은 한국의 왕이 외세의 침공에 여러 번 무릎을 꿇은 곳이다. 아신왕은 광개토왕 앞에 무릎을 꿇고 여러 성과 백성을 바쳤으며, 개로왕은 장수왕의 장수에게 잡혀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 처형당했고, 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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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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牡丹江市
옛 영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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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천지(大明天地)
사전에는 대명천지가 아무런 비밀이나 어두운 구석이 없는 세상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되어 있다. 주로 부조리한 일을 두고 '대명천지에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는 반응을 할 때 쓰인다. 그러나 대명천지는 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 하여 '위대한 명나라의 세상, 숭정제의 해와 달'이란 뜻의 문구에도 들어가 있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2348#2103 COMMENT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장백산 동쪽에는 포고리(布庫哩)란 산이 있고 그 아래에는 포륵호리(布勒瑚里)란 못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 드디어 장백산 동쪽 악다리성(卾多哩城)에 정착, 호(號)를 만주(滿洲)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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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병자호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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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정묘호란
조선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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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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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팔기군
역적으로 휘말려 자신들이 지키던 조국에서 버림받고 역으로 조국을 침략하는 전쟁에 선봉으로 동원되고 만리타향까지 끌려가 전쟁을 치러야했던 조선팔기군의 이야기는 명·청 교체기 대혼란에 휘말린 한반도에서 벌어진 비극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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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金이 망한 후 요흑은 元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元은 明에 의해 1368년에 중원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이즈음 여진도 元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이때 한국에서도 왕고에서 이조로의 왕조교체가 있었다.) 이후 여진은 明의 회유와 견제를 받게 되는데 통합되어 있지 못하고 野人女眞, 海西女眞 그리고 建洲女眞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 1592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조선침략에 明이 참전하여 국력을 소진하자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에 後金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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