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에서 여진이 성장하자 명나라는 이씨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여 함께 여진을 침공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조에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왕위에 올라 반여진 정책을 강화하자 여진은 1627년에 이조를 침공하여 왕자를 인질로 잡아갔다. 그러나 인질이 가짜 왕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명나라와의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자 1636년에 다시 이조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진짜 왕자를 인질로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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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07.04 광해군 일기
뽑아 놓은 병정 가운데 포수(砲手)는 3천 5백 명인데 평안도 포수가 1천 명, 전라도 포수가 1천 명, 충청도 포수가 1천 명, 황해도 포수가 5백 명입니다. 사수(射手)는 3천 5백 명인데, 평안도 사수가 1천 5백 명, 전라도 사수가 5백 명, 충청도 사수가 5백 명, 황해도 사수가 1천 명입니다. 살수(殺手)는 3천 명인데, 평안도 살수가 1천 명, 전라도 살수가 1천 명, 충청도 살수가 5백 명, 황해도 살수가 5백 명입니다.
2348#4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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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3.25 광해군 일기
평안 감사 박엽이 치계하였다.
“달아나 돌아온 함종의 포수 장부기 등이 말하기를, ‘노추는 우리 군사들을 부대별로 세운 다음 손바닥에 윤기가 나는 자와 신체가 건실한 자를 뽑아 별도로 다른 곳에 두고, 나머지는 갈라서 농부들에게 소속시켜 각처의 부락으로 분산시켜 보내었다. 도원수·부원수·종사관·방어사는 성안의 〈오랑캐의 처소에다〉 구류해 두고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하였습니다.”
2348#4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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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4.08 광해군 일기
당초에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은, 상이 명나라 조정의 징병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억지로 출사시킨 것이었지, 우리 나라는 애초부터 그들을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실로 상대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과 몰래 통하게 하였던 것인데 이 때문에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오랑캐의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
2348#4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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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4.08 광해군 일기
상이 인정전에서 상(常) 차관(差官, 중국에서 임무를 띠고 우리 나라에 파견된 관원)을 접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저희 나라는 천조에서 구해준 은혜를 입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노적이 창궐하였습니다. 저희 나라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적을 토벌하였으나 정예병과 무기가 모조리 섬멸되고 없어져 스스로를 보존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서 지키고 방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돌아가 양 대인(楊大人)께 보고하기를 간절히 바라오.”
2348#4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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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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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07.08 광해군 일기
체찰 부사 장만이 치계하기를,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각도를 모두 합하면 1천 4백여 명인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간 정예 병사가 1만 3천여 명이었는데, 투항한 후 장사(將士, 양반을 말하는 듯)는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고 군졸은 모두 농민에게 무더기로 나누어 주어 〈지키게〉 하였으므로 계속 도망쳐 돌아왔다.
2348#4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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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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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28 朝鮮王朝實錄 인조 15년
세폐는 황금 1백 냥, 백은 1천 냥, 수우각궁면 2백 부, 표피 1백 장, 녹피 1백 장, 다 1천 포, 수달피 4백 장, 청서피 3백 장, 호초 10두, 호요도 26파, 소목 2백 근, 호대지 1천 권, 순도 10파, 호소지 1천 5백 권, 오조룡석 4령,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 2백 필, 각색 면주 2천 필, 각색 세마포 4백 필, 각색 세포 1만 필, 포 1천 4백 필, 쌀 1만 포를 정식으로 삼는다.
▐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서신이다.
2348#3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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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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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30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상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주서 각 1인을 거느리고, 세자는 시강원·익위사의 제관을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아갔다. 용골대 등이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나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2348#34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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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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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4.22 청실록
至於朝鮮婦女軍士以力戰得之
今聞我國之婦女沃以熱水拷以酷刑既不容為妾又不留為婢妒忌殘虐莫此為甚
此等婦人朕必懲以從夫殉死之例法無可宥
조선의 부녀자는 병사들이 힘들게 싸워 얻은 것이다.
지금 들으니, 우리 나라 부녀자들이 뜨거운 물을 붇고 때리고 해서 첩이나 계집종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질투와 잔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이런 부인들은, 짐이 '남편을 따라 죽는 부인'의 예법으로 응징하고 용서치 않겠다.
2348#8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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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천지(大明天地)
사전에는 대명천지가 아무런 비밀이나 어두운 구석이 없는 세상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되어 있다. 주로 부조리한 일을 두고 '대명천지에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는 반응을 할 때 쓰인다.
그러나 대명천지는 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 하여 '위대한 명나라의 세상, 숭정제의 해와 달'이란 뜻의 문구에도 들어가 있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2348#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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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金이 망한 후 요흑은 元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元은 明에 의해 1368년에 중원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이즈음 여진도 元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이때 한국에서도 왕고에서 이조로의 왕조교체가 있었다.)
이후 여진은 明의 회유와 견제를 받게 되는데 통합되어 있지 못하고 野人女眞, 海西女眞 그리고 建洲女眞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 1592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조선침략에 明이 참전하여 국력을 소진하자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에 後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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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8#8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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