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09⁻ 「솔까역사」 漢書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辰國→)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雍閼弗通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사기(-91)에 眞番旁衆國이라 할 것을 眞番旁辰國으로 잘못 기재한 판본이 있었는데, 이것을 한서(82)에서 다시 真番辰國으로 잘못 기록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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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91 「솔까역사」 史記 夏本紀 冀州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河
조이의 공물은 가죽옷인데 오른쪽으로 갈석산을 끼고 황하로 들어왔다.
▐ 鳥夷는 순임금때의 北山戎發息慎東長鳥夷에 나오는 鳥夷로 보인다. 발해 동쪽에서 바닷길로 왔을 것이다. 하나라의 도읍은 황하 중류에 있었기 때문에 공물 운반의 최종 경로는 황하였다. 따라서 鳥夷의 공물도 황하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入于海는 入于河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入于海는 강이나 산줄기가 바다로 들어갈 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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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8 「솔까역사」 百濟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濵 十臣諌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 沸流欲居於海濵 分其民 歸弥鄒(忽→)城以居之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자 하여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성으로 돌아가 살았다.
┆温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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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2 「솔까역사」 高句麗
尤誘(我將延丕→)我侯騶靳之 엄우가 우리 후 추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
▐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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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5 「솔까역사」 新羅
及長聦明多智略乃名閼智(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라 했다.)✘ 以其出於金櫝(姓金氏→)名閼智(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름을 알지라 했다.)
▐ 삼국유사(1281)에는 閼智即郷言小兒之稱也(알지는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일컫는 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閼川 및 閼英과 함께 閼智의 閼도 알(egg)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智는 신라인의 인명에 많이 붙는 접미사다.
그리고 신라왕은 521년까지도 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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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4.08 ❰❰ 0246 「솔까역사」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만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기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이를 패배시켜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이었다. 또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인이었다. 왕이 철갑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인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를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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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솔까역사」 三國志
(弁辰→)弁韓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변한도 12개 나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가 있다.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 처음에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이라고 했으므로 弁辰이 아니라 弁韓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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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10 ❰❰ 0246 「솔까역사」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자 동천왕은 남옥저 쪽으로 달아났는데 왕기가 쫓아왔다. 죽령에 이르러서는 군사들이 거의 다 흩어졌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위군을 막아 동천왕의 도주를 도왔다. 전장에 쓰러진 밀우는 유옥구가 구출해왔다. 동천왕이 남옥저에 이르자 유유가 위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 위군의 장수에게 접근하여 죽였다. 이때 혼란에 빠진 위군을 동천왕이 공격하자 마침내 위군은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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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6.08 「솔까역사」 百濟 ✘
魏幽州刺史毋丘儉 與樂浪大守劉茂朔方大守王遵 伐髙句麗 王乗虛遣左將真忠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還其民口
▐ 이 기록은 다음 기록들을 잘못 종합한 결과인 듯하다.
① 244 句麗가 수차례 침입하자 毌丘儉이 토벌하였다.
② 245 濊가 句麗에 복속하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이 정벌하였다.
③ 245 馬韓八國 문제로 韓이 帶方郡을 공격하니 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가 이들을 정벌하였다.
④ 304 몰래 군사를 보내 樂浪의 서쪽 縣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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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7 「솔까역사」 ❹平壤¹城
동천왕이 丸都城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平壤¹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平壤²은 본래 仙人 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여기에 나오는 平壤을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으로 오인하고 왕검 설화를 붙여 놓았다. 당시 대동강 유역에는 낙랑군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平壤은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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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76 「솔까역사」 晉書 平州 (5군국 26현 18100호)
昌黎郡(昌黎, 賓徒)┆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樂浪郡(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 遂城을 武遂와 혼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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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1 ❰❰⁵ -0020 「솔까역사」 新羅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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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3.07 ❰❰¹ 0233 「솔까역사」 于老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伊湌 干老가 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 292년에도 왜인이 사도성을 공격해와 장수를 보내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293년 2월에는 사벌주의 80가구를 사도성으로 이주시킨 바 있다. 233년의 이 기록을 60년 뒤로 물리면 해를 이어 왜인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되어 자연스러워진다.
┆291➔293 304 305 309.01 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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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5 ❰❰¹ 0245 「솔까역사」 于老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于老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태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병사들이 감격하였다.
▐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접한 것은 동유낙랑이 망한 337년 이후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는 훗날 고구려에 통합되는 동유낙랑일 가능성이 있다.
┆291 293 304➔305 309.01 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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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6.07 ❰❰⁵ 0006 「솔까역사」 百濟
왕이 熊川柵을 세우자 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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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9- ❰❰ 0253 「솔까역사」 于老
계유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가 객관에 와 있었는데 于老가 대접을 맡았다. 손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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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0 ❰❰² 0190 「솔까역사」 仇道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292 305 308 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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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2⁺ ❰❰ 0065 「솔까역사」 新羅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하고 국호로 삼았다.
┆ 閼智부터 味鄒까지 7대인데, 7대는 3천궁녀나 100만대군처럼 한 집안의 유래가 오래된 것을 표현하는 상투적인 어구다.
이것은 閼智 설화가 味鄒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김씨로서 처음 왕이 된 味鄒에게 자신의 혈통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일은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호를 閼智 설화에 나오는 雞林으로 바꾼 것도 味鄒 시기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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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2 ❰❰⁵ 0032 「솔까역사」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나팔이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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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7 ❰❰⁵ 0037 「솔까역사」 新羅
髙句麗王無恤 襲樂浪²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304년, 314년 그리고 336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337년에 고구려에 망해 신라로 투항한 낙랑은 樂浪郡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기록의 樂浪 332년에 고구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병합되었다는 樂浪과도 연결되어, 그 병합이 337년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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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0 ❰❰⁵ 0040 「솔까역사」 新羅
華麗縣과 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渠帥가 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337년에 樂浪²이 맥고려에 병합되면서 기록에서 東有樂浪이 사라지고 340년부터 貊國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樂浪²이 貊國이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정황으로 보아 위치도 樂浪²과 어울린다. 맥고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貊國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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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10 「솔까역사」 百濟
移都(漢山→)漢城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
▐ 古典記에는 取髙句麗南平壤都漢城(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고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라고 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이전에 就漢山下立柵移慰禮城民戸(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라고 하여 이미 漢山下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이때 도읍을 옮긴 곳으로는 漢山보다 古典記에 나오는 대로 漢城이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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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5 ❰❰ 0392 「솔까역사」
夏五月王薨葬於故國壤號為故國壤王
여름 5월에 왕이 서거하여 고국양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양왕이라 하였다.
┆고국양왕은 384년에 즉위하였으니 고국양왕 9년은 392년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永樂五年歲在乙未(영락5년은 395년)와 以六年丙申(6년은 396년)에 의해 광개토왕의 즉위년인 영락 1년은 辛卯年(391년)이다.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없으므로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고국양왕 9년의 기록으로 잘못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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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5.11 「솔까역사」 三國史記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次於青木嶺下 㑹大雪 士卒多凍死 迴軍至(+北)漢山城 勞軍士
왕이 패수 전투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북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469년에 青木嶺에 목책을 세우고 北漢山城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한 것으로 보아 이 기록의 漢山城은 北漢山城의 오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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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5 「솔까역사」 後漢書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弁韓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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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5 「솔까역사」 日本書紀
蓋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漢城 國王及大后 王子等 皆沒敵手
475년 겨울 박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왕성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한성을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 백제가 위례에서 건국되었다는 이야기와 도성이 힘락되었다는 이야기가 결합되고 그 사이에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이야기가 빠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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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88 「솔까역사」 宋書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백제는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 동쪽 천여리에 있다.
▐ 서진 말에 모용부 선비가 창려, 요동 등 평주를 차지하자 단부 선비가 요서, 북평 등 유주를 차지한 적이 있는데, 이 모용부와 단부를 각각 고려와 백제로 잘못 적었다는 설명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진평은 북평의 오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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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36 「솔까역사」 梁書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 서진 말에 모용부 선비가 창려, 요동 등 평주를 차지하자 단부 선비가 요서, 북평 등 유주를 차지한 적이 있는데, 송서(488)에서 이 모용부와 단부를 각각 고려와 백제로 잘못 적었고 양서는 이를 계승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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