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9⁻ 「솔까역사」 漢書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辰國→)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雍閼弗通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사기(-91)에 眞番旁衆國이라 할 것을 眞番旁辰國으로 잘못 기재한 판본이 있었는데, 이것을 한서(82)에서 다시 真番辰國으로 잘못 기록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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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91 「솔까역사」 史記 夏本紀 冀州
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河 조이의 공물은 가죽옷인데 오른쪽으로 갈석산을 끼고 황하로 들어왔다. ▐ 鳥夷는 순임금때의 北山戎發息慎東長鳥夷에 나오는 鳥夷로 보인다. 발해 동쪽에서 바닷길로 왔을 것이다. 하나라의 도읍은 황하 중류에 있었기 때문에 공물 운반의 최종 경로는 황하였다. 따라서 鳥夷의 공물도 황하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入于海는 入于河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入于海는 강이나 산줄기가 바다로 들어갈 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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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7 「솔까역사」 新羅
(朝鮮→)秦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是爲(辰韓→)徐那伐六部 진나라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서나벌 육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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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7 「솔까역사」 新羅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 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시조의 이름은 혁거세이다. -57년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에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신라왕의 성은 521년의 기록에 募로 처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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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4 「솔까역사」 新羅
辛丑朔 +漢 日有食之 신축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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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9.03 「솔까역사」 新羅
春三月 +漢 有星孛于王良 봄 3월에 한나라에서 살별이 왕량 자리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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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4.04 「솔까역사」 新羅
夏四月 +漢 有星孛于參 여름 4월에 한나라에서 살별이 삼 자리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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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7 「솔까역사」 高句麗
始祖(東明聖王→)鄒牟王 姓髙氏✘ 시조는 추모왕이다.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동명은 부여의 시조고 고구려의 시조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추모왕으로 나온다. 고씨 성은 407년 이전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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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4.06 「솔까역사」 新羅
壬申晦 +漢 日有食之 임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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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8.04.30 「솔까역사」 新羅
己亥晦 +漢 日有食之 기해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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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6.08 「솔까역사」 新羅
乙卯晦 +漢 日有食之 을묘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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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8 「솔까역사」 百濟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濵 十臣諌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 沸流欲居於海濵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자 하여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温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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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5.02 「솔까역사」 新羅
乙酉晦 +漢 日有食之 을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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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4 「솔까역사」 新羅
(春二月己酉→)春三月己酉 +漢 星孛于河皷 기유일에 한나라에서 하고 자리에서 살별이 나타났다.┆三月을 二月로 잘못 옮겨 적었다. 이 해의 2월에는 己酉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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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2.01.01 「솔까역사」 新羅
辛丑朔 +漢 日有食之 신축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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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2.09 「솔까역사」 新羅
戊申晦 +漢 日有食之 무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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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6 「솔까역사」 新羅
冬十月丙辰朔 +漢 日有食之 겨울 10월 병진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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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2 「솔까역사」 高句麗
尤誘(我將延丕→)我侯騶靳之 엄우가 우리 후 추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 ▐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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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6 「솔까역사」 新羅
秋七月戊子晦 +漢 日有食之 무자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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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0~0023 「솔까역사」 三國志·魏略
至王莽地皇時 廉斯鑡為(辰韓→)馬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 馬韓에 대한 설명이므로 辰韓은 馬韓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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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0~0023 「솔까역사」 三國志·魏略
20~23년에 염사착이 마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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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3 「솔까역사」 新羅
秋 +漢 大白入大微 가을에 한나라에서 금성이 태미 자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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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9 「솔까역사」 高句麗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大原➔烏桓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오환이 우북평, 어양, 상곡 그리고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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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4.02 「솔까역사」 新羅
春二月 +漢 星孛于紫宫 봄 2월에 한나라에서 자궁 자리에서 살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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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0.06 ❰❰ 0059.06 「솔까역사」 新羅
六月 +漢 有星孛于天舩 6월에 한나라에서 천선 자리에 살별이 나타났다.┆후한서(445)에는 60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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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5 「솔까역사」 三國史記 閼智
及長聦明多智略乃名閼智(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라 했다.)✘ 以其出於金櫝(姓金氏→)名閼智(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름을 알지라 했다.) ▐ 삼국유사(1281)에는 閼智即郷言小兒之稱也(알지는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일컫는 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閼川 및 閼英과 함께 閼智의 閼도 알(egg)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智는 신라인의 인명에 많이 붙는 접미사다. 그리고 신라왕은 521년까지도 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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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85.04 「솔까역사」 新羅
夏四月 +漢 客星入紫微 여름 4월에 한나라에서 객성이 자미 자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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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4.09 「솔까역사」 新羅
秋九月庚申晦 +漢 日有食之 가을 9월 경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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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7.07 「솔까역사」 新羅
秋七月甲戍朔 +漢 日有食之 가을 7월 갑술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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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91 「솔까역사」 新羅
秋九月 +漢 蚩尢旗見于角亢 가을 9월에 한나라에서 치우기가 각수와 항수 자리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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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솔까역사」 險瀆 應劭註
險瀆(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朝鮮(故王險也 燕人滿者渡浿水王之都 天子募罪人擊朝鮮 孫右渠發兵距險) 조선(옛 왕험이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를 건너 그곳에 도읍하였다. 천자가 죄수를 모아 조선을 공격하자 손자 우거가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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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솔까역사」 險瀆 臣瓚註
(險瀆→)朝鮮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朝鮮也 조선(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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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솔까역사」 險瀆 師古註
險瀆 瓚說(是→)非也 험독(신찬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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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솔까역사」 險瀆 後漢書註
(險瀆→)朝鮮 史記曰王險衞滿所都 조선(사기에서는 왕험을 위만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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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솔까역사」 三國志
(弁辰→)弁韓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변한도 12개 나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가 있다.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가 있다. ▐ 처음에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이라고 했으므로 弁辰이 아니라 弁韓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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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솔까역사」 三國志
(其→)辰韓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為王 진한 12국은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 앞서 辰韓在馬韓之東 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라고 하였으므로 辰王에게 소속된 12 나라는 辰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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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솔까역사」 三國志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馬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 馬韓에 대한 설명이므로 辰韓八國은 馬韓八國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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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솔까역사」 三國志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마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은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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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1 ❰❰⁵ -0020 「솔까역사」 新羅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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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1 ❰❰⁵ -0020 「솔까역사」 新羅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이에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의 난리에 고통을 겪다가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거처를 정하고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점차 강성해졌다. 이런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망이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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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2 ❰❰⁵ -0019 「솔까역사」 新羅
馬韓王이 죽었다. 혹자가 왕에게 설득하기를, “西韓의 왕이 지난번 우리 사신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정벌하면 넉넉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삼는 것은 어질지 않은 일이다.”라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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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4.01 ❰❰ -0017 「솔까역사」 百濟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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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5.09 ❰❰ -0016 「솔까역사」 百濟
靺鞨²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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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6 ❰❰⁵ -0015 「솔까역사」 百濟
遣使樂浪²修好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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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9 「솔까역사」 三國志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真番 (馬韓→)真番割其東界地與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를 피해 진번으로 왔는데, 진번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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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9 「솔까역사」 三國志(魏略)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가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不改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준의 아들과 친척 중에 남은 사람들도 있는데 한씨 성을 바꾸지 않았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왕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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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0.02 ❰❰ -0011 「솔까역사」 百濟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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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0.07 ❰❰⁵ -0011 「솔까역사」 百濟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²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²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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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1.07 ❰❰¹ 0231 「솔까역사」 于老
伊湌 于老를 대장군에 임명하여 甘文國을 공격해 격파하고 그 땅을 郡으로 만들었다. ┆➔291 293 304 305 309.01 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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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2 ❰❰² 0172 「솔까역사」 仇道
仇道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仇須兮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92 305 308 309 310
http://qindex.info/i.php?x=29986
 0292.10 ❰❰ -0009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곤미천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청목산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봉현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http://qindex.info/i.php?x=29740
 0293.04 ❰❰ -0008 「솔까역사」 百濟
樂浪²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http://qindex.info/i.php?x=29749
 0293.04 ❰❰⁵ -0008 「솔까역사」 百濟
樂浪²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http://qindex.info/i.php?x=29718
 0293.07 ❰❰¹ 0233 「솔까역사」 于老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伊湌 干老가 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 292년에도 왜인이 사도성을 공격해와 장수를 보내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293년 2월에는 사벌주의 80가구를 사도성으로 이주시킨 바 있다. 233년의 이 기록을 60년 뒤로 물리면 해를 이어 왜인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되어 자연스러워진다. ┆291➔293 304 305 309.01 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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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3.07 ❰❰⁵ -0008 「솔까역사」 百濟
設秃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²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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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5.05 ⁻ ❰❰ -0018 「솔까역사」 百濟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濵 十臣諌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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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5.05 ⁻ ❰❰ -0018 「솔까역사」 百濟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펴보고,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32183
 0295.05 ❰❰⁵ -0006 「솔까역사」 百濟
“國家東有樂浪² 北有靺鞨² 侵軼疆境 少有寧曰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http://qindex.info/i.php?x=5794
 0295.07 ❰❰⁵ -0006 「솔까역사」 百濟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戸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
http://qindex.info/i.php?x=5996
 0295.08 ❰❰⁵ -0006 「솔까역사」 百濟
遣使馬韓 告遷都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http://qindex.info/i.php?x=6027
 0296 ❰❰ -0005 「솔까역사」 新羅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曰 寡君問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저희 왕께서 남쪽의 한에서 성인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으셨기에 신으로 하여금 와서 선물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25
 0296 ❰❰⁵ -0005 「솔까역사」 百濟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 주민을 이주시키다.
http://qindex.info/i.php?x=16923
 0299 ❰❰⁵ -0002 「솔까역사」 百濟
樂浪²이 쳐들어와서 慰禮城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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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0 ❰❰⁵ -0001·10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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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0.10 ❰❰⁵ -0001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http://qindex.info/i.php?x=5984
 0300.10 ❰❰ -0001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http://qindex.info/i.php?x=29751
 0300.11 ❰❰⁵ -0001 「솔까역사」 百濟
王欲襲樂浪²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http://qindex.info/i.php?x=16886
 0301 ❰❰⁴ 0061 「솔까역사」 新羅
馬韓의 장군 맹소가 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 마한의 멸망 시기보다 52년 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다. 마한의 멸망 시기보다 60년 덜 옮겨 8년 앞서게 했다. 그러면 마한이 망하기 전에 항복한 것이 되어 자연스럽다.
http://qindex.info/i.php?x=16682
 0304 ❰❰¹ 0244 「솔까역사」 于老
伊湌 于老를 舒弗邯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291 293➔304 305 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29832
 0304.07 ❰❰⁵ 0004.07 「솔까역사」 新羅
樂浪³兵이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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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4.09 ❰❰ 0004 「솔까역사」 百濟
왕이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나 한 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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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5 ❰❰² 0185 「솔까역사」 仇道
파진찬 仇道와 일길찬 仇須兮를 좌·우軍主로 임명하여 召文國을 공격하였다. 軍主라는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292➔305 308 309 310
http://qindex.info/i.php?x=29987
 0305 ❰❰¹ 0245 「솔까역사」 于老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于老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태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병사들이 감격하였다. ▐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접한 것은 동유낙랑이 망한 337년 이후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는 훗날 고구려에 통합되는 동유낙랑일 가능성이 있다. ┆291 293 304➔305 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29833
 0306.07 ❰❰⁵ 0006 「솔까역사」 百濟
왕이 熊川柵을 세우자 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http://qindex.info/i.php?x=6000
 0308.02 ❰❰² 0188 「솔까역사」 仇道
백제가 母山城을 공격해 오자, 파진찬 仇道에게 병사를 내어 백제군을 막도록 명하였다. ┆292 305➔308 309 310
http://qindex.info/i.php?x=29983
 0308.07 ❰❰⁵ 0008 「솔까역사」 百濟
왕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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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8.10 ❰❰⁵ 0008 「솔까역사」 百濟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馬韓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國邑을 병합하였다. 오직 圓山과 錦峴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http://qindex.info/i.php?x=6001
 0309.01 ❰❰¹ 0249 「솔까역사」 于老
첨해왕이 왕위에 있을 때,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속해 있던 沙梁伐國이 홀연 배반하고 백제에 귀의하였다. 昔于老가 병사를 거느리고 가 토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291 293 304 305➔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30100
 0309.04 ❰❰⁵ 0009 「솔까역사」 百濟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http://qindex.info/i.php?x=6002
 0309.04 ❰❰¹ 0249 「솔까역사」 于老
왜인이 서불한 于老를 죽였다. ┆291 293 304 305 309.01➔309.04
http://qindex.info/i.php?x=32754
 0309.07 ❰❰² 0189 「솔까역사」 仇道
仇道가 拘壤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기고, 5백 여 명을 죽였다. ┆292 305 308➔309 310
http://qindex.info/i.php?x=29988
 0310 ❰❰² 0190 「솔까역사」 仇道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292 305 308 309➔310
http://qindex.info/i.php?x=29985
 0314 ❰❰⁵ 0014 「솔까역사」 新羅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6부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막게 하였다. 樂浪³이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閼川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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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6 ❰❰⁵ 0016 「솔까역사」 百濟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牛谷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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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8 ❰❰⁵ 0018 「솔까역사」 百濟
圎山과 錦峴 두 성을 수리하고 古沙夫里城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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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2.01 ❰❰¹ 0262 「솔까역사」 味鄒 - 仇道의 아들
味鄒이사금(味照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선조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나중에 대보로 삼았다. 閼智는 세한을 낳았고, 勢漢은 아도를 낳았고, 阿道는 수류를 낳았고, 首留는 욱보를 낳았고, 郁甫는 구도를 낳았는데, 仇道가 곧 味鄒의 아버지이다. 첨해가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http://qindex.info/i.php?x=29990
 0322.09 ❰❰ 0022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述川城을 쳐들어왔다.
http://qindex.info/i.php?x=29753
 0322.11 ❰❰ 0022 「솔까역사」 百濟
또 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랜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754
 0322⁺ ❰❰ 0065 「솔까역사」 ❶ 閼智┆雞林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하고 국호로 삼았다. ┆ 閼智부터 味鄒까지 7대인데, 7대는 3천궁녀나 100만대군처럼 한 집안의 유래가 오래된 것을 표현하는 상투적인 어구다. 이것은 閼智 설화가 味鄒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김씨로서 처음 왕이 된 味鄒에게 자신의 혈통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일은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호를 閼智 설화에 나오는 雞林으로 바꾼 것도 味鄒 시기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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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3 ❰❰¹ 0263 「솔까역사」 新羅
왕이 직접 국조묘에서 제사를 주관하고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仇道를 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97
 0328 ❰❰ -0033 「솔까역사」 日本書紀
任那國 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 去筑紫國二千餘里北 阻海 以在鶏林之西南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바다로 막혀있다.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 신라가 국호를 雞林으로 바꾼 것이 322년 이후라면 이 기록의 사건도 그 이후가 되어야 한다. -33년의 간지가 戊子이니 328년이나 그 이후의 戊子年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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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0 「솔까역사」 新羅→百濟
처음으로 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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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0.10 ❰❰ 0030 「솔까역사」 百濟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x=29755
 0331.08 ❰❰ 0031 「솔까역사」 百濟
高木城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http://qindex.info/i.php?x=29756
 0332 ❰❰⁵ 0032 「솔까역사」 新羅
攺六部之名 楊山部為(梁部→)喙部 髙墟部為(沙梁部→)沙喙部 大樹部爲(漸梁部→)漸喙部一云(牟梁→)牟喙 于校珍部為夲彼部 加利部為漢祇部 明活部為習比部 6부의 이름을 바꾸었다. 양산부는 닭부라고 하고 고허부는 사닭부라고 하였으며 대수부는 점닭부(모닭부라고도 한다)라고 하고 간진부는 본피부라고 하였으며 가리부는 한기부라고 하고 명활부는 습비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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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2 ❰❰⁵ 0032 「솔까역사」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나팔이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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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4 ❰❰ 0034.10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또 甁山柵을 습격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859
 0334.09 ❰❰ 0034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http://qindex.info/i.php?x=29855
 0336 ❰❰⁵ 0036 「솔까역사」 新羅
樂浪³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http://qindex.info/i.php?x=16927
 0337 ❰❰⁵ 0037 「솔까역사」 新羅
髙句麗王無恤 襲樂浪²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304년, 314년 그리고 336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337년에 고구려에 망해 신라로 투항한 낙랑은 樂浪郡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기록의 樂浪 332년에 고구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병합되었다는 樂浪과도 연결되어, 그 병합이 337년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http://qindex.info/i.php?x=16838
 0340 ❰❰⁵ 0040 「솔까역사」 新羅
華麗縣과 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渠帥가 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337년에 樂浪²이 맥고려에 병합되면서 기록에서 東有樂浪이 사라지고 340년부터 貊國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樂浪²이 貊國이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정황으로 보아 위치도 樂浪²과 어울린다. 맥고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貊國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http://qindex.info/i.php?x=29708
 0342 ❰❰⁵ 0042 「솔까역사」 新羅
貊帥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x=29720
 0345 「솔까역사」 晉書
句麗(百濟→)扶餘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 구려, 부여, 우문 그리고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http://qindex.info/i.php?x=9906
 0346 「솔까역사」 資治通鑑(1084)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高麗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있었는데 고려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방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 부여를 서쪽으로 밀어내는 일은 인접한 고려가 가능하고 백제는 불가능하다.
http://qindex.info/i.php?x=9905
 0350 ❰❰² 0230 「솔까역사」 助賁 - 仇道의 외손
조분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김씨 옥모부인은 仇道葛文王의 딸이다.
http://qindex.info/i.php?x=29991
 0351 ❰❰¹ 0291 「솔까역사」
末仇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성스럽고 절개가 있으며 지략을 갖추고 있어, 왕이 항상 찾아가 정치에서 중요한 점을 물어보았다. ▐ 末仇는 조분이사금의 외삼촌이다.
http://qindex.info/i.php?x=30000
 0355.08 ❰❰⁵ 0055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北鄙를 침범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860
 0356.02 ❰❰⁵ 0056 「솔까역사」 百濟
왕이 동부에 명하여 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861
 0367 ❰❰² 0247 「솔까역사」 沾解 - 仇道의 외손
첨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까지 같은 조분왕의 동생이다. ▐ 첨해이사금은 仇道의 외손이다.
http://qindex.info/i.php?x=29995
 0369 「솔까역사」 日本書紀
仍移兵西廻 至古爰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二邑自然降服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포미지·반고 2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http://qindex.info/i.php?x=40217
 0371.10 「솔까역사」 百濟
移都漢山✘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 古典記의 取髙句麗南平壤都漢城(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과 이 해에 있었던 백제의 평양성 침공을 연결하여 만든 이야기인 듯하다. 그러나 이전에 就漢山下立柵移慰禮城民戸(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라고 하여 이미 漢山下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이 기록은 잘못되었다.
http://qindex.info/i.php?x=1912
 0372⁻ ❰❰ -0018 「솔까역사」 百濟
與髙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 백제의 왕성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372년의 사건이다.
http://qindex.info/i.php?x=8221
 0390.02 ❰❰³ 0210 「솔까역사」 百濟
赤峴城과 沙道城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들을 옮겼다.
http://qindex.info/i.php?x=16948
 0390.10 ❰❰³ 0210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http://qindex.info/i.php?x=16852
 0394.09 ❰❰³ 0214 「솔까역사」 百濟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53
 0396 ❰❰³ 0216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x=16855
 0397 ❰❰³ 0217 「솔까역사」 百濟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949
 0400 ❰❰³ 0220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http://qindex.info/i.php?x=16856
 0401.02 ❰❰⁵ 0101 「솔까역사」 三國史記(1145)
築城名月城 성을 쌓고 월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유물 조사와 약 40점의 시료를 대상으로 한 가속질량분석기 분석을 통해 4세기 중엽에 공사를 시작해 5세기 초반 완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http://qindex.info/i.php?x=15521
 0401.07 ❰❰⁵ 0101 「솔까역사」 三國史記(1145)
王移居月城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http://qindex.info/i.php?x=26854
 0408.07 ❰❰⁵ 0108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牛谷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29862
 0409 ❰❰³ 0229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http://qindex.info/i.php?x=16857
 0420 ❰❰² 0540 「솔까역사」 百濟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牛山城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牛山城은 牛岑城인 듯하다.
http://qindex.info/i.php?x=21851
 0425.01 ❰❰⁵ 0125 「솔까역사」 新羅
말갈이 北境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00
 0425.07 ❰❰⁵ 0125 「솔까역사」 新羅
또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넘어왔다. 왕이 글을 백제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주었다. 적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http://qindex.info/i.php?x=29901
 0428 ❰❰² 0548 「솔까역사」 百濟
고구려왕 평성(양원왕)이 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獨山城을 공격해 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http://qindex.info/i.php?x=21850
 0435.08 ❰❰¹ 0495 「솔까역사」 百濟
고구려가 와서 雉壤城을 포위하자 왕이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나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25940
 0437.02 ❰❰⁵ 0137 「솔까역사」 新羅
말갈이 塞를 침입하여 長嶺의 다섯 목책을 불태웠다.
http://qindex.info/i.php?x=29902
 0439.08 ❰❰⁵ 0139 「솔까역사」 新羅
長嶺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붙잡아가고 노략질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03
 0439.10 ❰❰⁵ 0139 「솔까역사」 新羅
다시 쳐들어왔는데, 눈이 많이 오는 바람에 물러갔다.
http://qindex.info/i.php?x=29904
 0440.02 ❰❰⁵ 0140 「솔까역사」 新羅
長嶺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비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49
 0441.11 ❰❰¹ 0501 「솔까역사」 百濟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水谷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5952
 0442.07 ❰❰⁵ 0142 「솔까역사」 新羅
여러 신하를 불러 말갈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찬 웅선이 불가하다는 말을 올리니, 그만두었다.
http://qindex.info/i.php?x=29905
 0443 ❰❰¹ 0503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馬首柵을 소각하고 髙木城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 髙木城은 馬首柵 인근에 있었을 것이다.
http://qindex.info/i.php?x=25916
 0445 「솔까역사」 後漢書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 (弁辰→)弁韓 한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 集解 王會汾曰 案晋梁二書 皆作弁韓 當從改 下云 弁辰在辰韓之南 弁辰亦弁韓之訛 惠棟曰 魏志作弁韓┆삼국지(289)에 일부 弁辰이라 표기된 데 영향을 받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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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5 「솔까역사」 後漢書
(弁辰→)弁韓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 絜淸 而刑法嚴峻 변한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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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5 「솔까역사」 後漢書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弁韓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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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5 「솔까역사」 後漢書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辰韓者古之辰國也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한다. 진한은 옛 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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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6.07 ❰❰¹ 0506 「솔까역사」 百濟
말갈이 침입하여 高木城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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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7.05 ❰❰¹ 0507 「솔까역사」 百濟
髙木城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馬首柵-髙木城-長嶺城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北有靺鞨이 백제를 침공하는 주요 경로로 漢北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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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63.08 ❰❰¹ 0523 「솔까역사」 百濟
고구려 군사가 浿水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물리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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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69.10 ❰❰¹ 0529 「솔까역사」 百濟
고구려 왕 흥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 穴城을 쳐들어와서 빼앗았다.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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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88 「솔까역사」 宋書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백제는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 동쪽 천여리에 있다. ▐ 서진 말에 모용부 선비가 창려, 요동 등 평주를 차지하자 단부 선비가 요서, 북평 등 유주를 차지한 적이 있는데, 이 모용부와 단부를 각각 고려와 백제로 잘못 적었다는 설명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진평은 북평의 오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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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90.01 「솔까역사」 冊府元龜
武帝 永明 八年 正月 百濟王 (牟太→)牟大遣使上表 490년 1월에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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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03.10 ❰❰⁵ 0203 「솔까역사」 新羅
말갈이 境을 침범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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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6~0539 「솔까역사」 梁職貢圖
百濟舊來夷 馬韓之屬 (晉末 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백제는 옛날 흘러온 오랑캐로 마한에 속했다. ▐ 서진 말에 모용부 선비가 창려, 요동 등 평주를 차지하자 단부 선비가 요서, 북평 등 유주를 차지한 적이 있는데, 송서(488)에서 이 모용부와 단부를 각각 고려와 백제로 잘못 적었고 양직공도는 이를 계승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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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37 「솔까역사」 南齊書
是歲(魏虜→)髙麗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大破之 490년에 고려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그리고 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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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1↶ 「솔까역사」 高句麗 何瑟羅州
也尸忽郡┆助攬郡 靑已縣 屈火縣 伊火兮縣┆于尸郡 阿兮縣 ➔ 于尸郡┆助攬郡 靑已縣 屈火縣 伊火兮縣┆也尸忽郡 阿兮縣 ▐ 于尸郡은 也尸忽郡의 북쪽에 있고 阿兮縣은 也尸忽郡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阿兮縣이 于尸郡에 소속될 수 없다. 也尸忽郡과 于尸郡의 위치를 바꾸면 모순이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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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5⁻ ❰❰ 0065 「솔까역사」 新羅
姓金氏 성을 김씨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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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36 「솔까역사」 梁書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 서진 말에 모용부 선비가 창려, 요동 등 평주를 차지하자 단부 선비가 요서, 북평 등 유주를 차지한 적이 있는데, 송서(488)에서 이 모용부와 단부를 각각 고려와 백제로 잘못 적었고 양서는 이를 계승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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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59 「솔까역사」 南史
(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 양서(636)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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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4 「솔까역사」 支潯州
馬津縣夲(孤山→)馬突 마진현은 본래 마돌이다. ▐ 삼국사기(1145)는 지심주를 변산반도 일대로만 생각하고 현들을 웅천주의 현에 대응시켰다. 그래서 지심주의 馬津도 원래 완산주의 馬突(馬珍)이었는데 웅천주의 烏山에 잘못 대응시켰다. 게다가 烏山도 후대에 개칭한 孤山으로 잘못 적어 馬津縣夲孤山이란 기술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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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4 「솔까역사」 支潯州
巳汶縣夲今勿➔己汶縣一云竒物 기문현은 기물이라고도 한다.┆己汶은 가야에서 竒物이라고 했는데, 이 竒物과 백제 웅천주의 今勿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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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0~0711 「솔까역사」 大唐西域求法高僧傳
雞貴者梵云矩矩咤㗨說羅 矩矩咤是雞 㗨說羅是貴 卽(高麗→)新羅國也 相傳云 彼國敬雞神 (而取尊故戴翎羽而表飾矣✘) 那爛陀有池名曰龍泉 西方喚(高麗→)新羅爲矩矩咤㗨說羅也 계귀는 범어로 구구타예설라이다. 구구타는 닭이고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니, 즉 신라국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는 닭신을 받들어 모신다고 한다. 나란타사에 못이 있는데, 이를 용천이라고 부른다. 서역에서는 신라를 구구타예설라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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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솔까역사」 九州五小京 溟州
野城郡 本髙句麗也尸忽郡 景徳王攺名 今盈德郡 領縣(二→)三┆眞安縣 本髙句麗助欖縣 景徳王改名 今甫城府┆積善縣 本髙句麗青己縣 景徳王改名 今青鳧縣┆✚海阿縣 本髙句麗阿兮縣 景徳王攺名 今清河縣 ▐ 阿兮縣이 于尸郡에 소속되었다는 잘못된 기록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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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솔까역사」 九州五小京 溟州
有鄰郡 本髙句麗于尸郡 景徳王改名 今禮州 領縣一┆✘海阿縣 本髙句麗阿兮縣 景徳王攺名 今清河縣 ▐ 阿兮縣이 于尸郡에 소속되었다는 잘못된 기록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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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솔까역사」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古寧을 加耶가 있었던 高靈과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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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솔까역사」 咸安郡
一云(阿郡加耶→)阿尸耶 안야라고도 한다.┆加良·加耶나 大良·大耶처럼 阿尸良에는 阿尸耶가 짝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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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솔까역사」 奈靈郡
本(百濟奈巳郡→)高句麗大楊管郡 본래 고구려 대양관군이다.┆奈靈과 奈巳가 유사해서 착오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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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솔까역사」 髙靈郡
夲(大×)加耶國 본래 가야국이다.┆加耶를 大耶와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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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01 「솔까역사」 通典
(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 ▐ 서진 말에 모용부 선비가 창려, 요동 등 평주를 차지하자 단부 선비가 요서, 북평 등 유주를 차지한 적이 있는데, 송서(488)에서 이 모용부와 단부를 각각 고려와 백제로 잘못 적었고 통전은 이를 계승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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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0 「솔까역사」 新唐書
謂城為(侵→)健牟羅 邑在內曰喙評 外曰邑勒 有喙評六 邑勒五十二┆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안에 있는 것은 달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한다. 달평은 6군데, 읍륵은 52군데 있다. ▐ 양서(636)와 통전(801)에 健牟羅라 되어 있으므로 侵牟羅는 오기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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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4 「솔까역사」 資治通鑑
永明(六→)八年(魏→)髙麗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 490년에 고려가 군사를 보내 침공했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 남제서(537)의 기록을 요약한 것인데 연도를 잘못 표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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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솔까역사」 百濟
(魏→)髙麗遣兵來伐 爲我所敗 고려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 자치통감(1084)의 오기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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