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朝鮮 → 樂浪 → 高麗(貊·濊·沃沮·夫餘+樂浪·帶方·遼東) ❷ 肅慎 → 挹婁 → 勿吉 → 靺鞨 ❸ 渤海(貊·濊·沃沮·夫餘+靺鞨) → 遼(契丹+女眞) → 金 → 元 → 淸 → 滿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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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黑史
문화권 또는 역사공동체는 대체로 강의 유역과 일치한다. 이는 인류의 문명이 농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 농경은 강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하 유역과 흑수 유역은 역사가 서로 얽혀 있어 별개의 역사공동체로 분리하기 어렵다. 요하 유역과 황하 유역이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과 비교하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요하 유역과 흑수 유역을 하나로 묶어 요흑사로 이름을 붙여 보았다.
동서로는 몽골에서 연해주까지고 남북으로는 흑룡강에서 장백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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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과 농경민
오환과 선비는 유목민이고 부여, 고려 그리고 읍루는 농경민이었다. 부여와 고려인의 주된 관심은 토양이 곡식의 생산에 얼마나 적합한지였다. 부여와 고려에서 유목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데도 없고 부여와 고려인의 유골을 분석해 보아도 채식을 위주로 했다는 사실만 밝혀질 뿐이다. 그런데 고려와 읍루는 농업 생산력이 낮아서 노략질을 많이 하였다.
2658#1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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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❶肅慎②挹婁③勿吉④靺鞨⑤女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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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 ~ -0108 朝鮮
-283년에 朝鮮은 燕에 복속되었다. -221년에 秦이 燕을 포함한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은 다시 秦에 소속되었다. -209년에 진승이 난을 일으키자 중국은 다시 혼란해 졌는데, 이때 燕·齊·趙 지역의 난민 수만명이 조선, 진번 그리고 진국으로 흘러왔다. -202년에 漢이 다시 중국을 통일하는데, 이때 조선은 漢의 영역에서 빠졌다.
그러자 -195+년에 漢의 제후국이던 燕의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했다가 중국의 유민과 토착민을 규합하여 왕이 되었다.
2658#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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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0220
①肅慎❷挹婁③勿吉④靺鞨⑤女真
6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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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0226 三國志(289) 挹婁
漢代 이래로 夫餘에 신속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220~22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번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16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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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東夷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7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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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 奚·契丹
○奚는 동쪽으로는 契丹과 접했고 서쪽은 突厥에 도달했고 남쪽은 白狼河가 가로막고 있고 북쪽은 霫國에 도달했다. 營州 서북쪽의 饒樂水로부터 그들 나라에 도달하게 된다.
○契丹은 潢水의 남쪽, 黃龍의 북쪽에 살았는데, 동으로는 高麗와 이웃하였고 서로는 奚國과 접했고 남으로는 營州에 도달하고 북으로는 室韋에 도달했다. 元魏 때에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2658#7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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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534
①肅慎②挹婁❸勿吉④靺鞨⑤女真
15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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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534 魏書(554)
나라 남쪽에는 ●徒太山이 있는데 魏나라 말로는 大白이다.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들도 산에서는 오줌이나 대변을 보지 않는다. 산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소변, 대변을 물건에 담아 가지고 간다.
7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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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499 魏書(554) 勿吉
477~499년 초에 또 말 5백필을 바쳤다. 을력지는,
“처음 나라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難河를 거슬러 서쪽으로 오르다가 太沵河에 이르러 배를 물속에 감추어 두고, 남으로 육로로 걸어서 洛孤水를 건너 거란의 서쪽 국경을 따라 和龍에 이르렀다.”
고 말하였다.
또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10부락을 함락하고, 은밀히 백제와 함께 물길을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꾀하고 을력지를 대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 가부를 청한다.” 하였다.
1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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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5± 魏書(554) 勿吉
그 나라 근처에는 大莫盧國·覆鍾國·莫多回國·庫婁國·素和國·具弗伏國·匹黎尒國·拔大何國·郁羽陵國·庫伏眞國·魯婁國·羽眞侯國이 있는데, 잇달아 각기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15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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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①肅慎②挹婁③勿吉❹靺鞨⑤女真
15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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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9~0618 隋書(636)
靺鞨은 高麗의 북쪽에 있다. 모두 7 종이 있다. 그 첫째는 粟末部로서 高麗와 인접하여 있다.
둘째는 伯咄部로서 粟末의 북쪽에 있다.
세째는 安車骨部로서 伯咄의 동북쪽에 있다.
네째는 拂涅部로서 伯咄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號室部로서 拂涅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黑水部로서 安車骨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째는 白山部로서 粟末의 동남쪽에 있다.
19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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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舊唐書(945)
靺鞨은 京師에서 동북으로 6천여리 밖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突厥과 접하며 남쪽은 高麗와 경계하고 북쪽은 室韋와 인접해 있다.
그 나라는 모두 수십 부나 되는데 각각 추사가 있어 더러는 高麗에 부용되어 있고 더러는 突厥에 신속되어 있다. 그런데 黑水靺鞨이 가장 북방에 있으면서 제일 강성하여 늘 그 용맹을 과시하므로 항상 이웃 부족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19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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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新唐書(1060)
가장 유력한 부족은 粟末部로서 제일 남쪽에 위치하여 ●太白山에 이른다. 그 산은 또한 徒太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와 서로 닿는다. 粟末水의 연안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은 太白山 서쪽에서 흘러 나와서 북으로 它漏河로 흘러들어 간다. 속말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白山部다.
▐ 장백산 천지의 물은 북쪽에 있는 장백 폭포로 흘러내려 속말수로 들어간다. 속말수 유역에는 속말 말갈이 살고 있었으므로 장백산은 기본적으로 속말 말갈의 산이라는 걸 알 수 있다.
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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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金史(1344)
▐ 隋의 말갈 7부 중에서 속말말갈과 흑수말갈만 唐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속말말갈은 고려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唐이 고려를 멸망시키자 발해를 세웠다.
흑수말갈은 옛 숙신 지역인데 역시 고려에 종속되어 있었다. 唐이 고려를 침공하자 15만 대군을 안시성에 보냈다가 패하였다. 唐의 흑수부로 되었다가 발해가 커지자 거기에 소속되었다.
발해가 遼에 망하자 遼에 소속되었는데, 遼에 적을 둔 숙여진과 그렇지 않은 생여진으로 나뉘었다.
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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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1+ 翰苑(660±)
한원에서 소개된 고려기(641+)에는 鴨綠水水源出東北靺鞨●白山(압록수는 동북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이라 되어 있어 장백산을 말갈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통전(801), 태평환우기(979) 그리고 신당서(1060)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1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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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新唐書(1060)
태종이 高麗를 토벌할 적에 그 북부가 반기를 들고 高麗와 합세하였다. 고혜진 등이 군사를 이끌고 安市을 구원할 적에 싸움마다 늘 靺鞨병을 앞에 내세웠다. 태종은 安市를 함락하고 혜진을 사로잡은 뒤 靺鞨병 3천여명을 모두 묻어 죽였다.
1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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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8~0926 渤海
▐ 구당서(945)에는 靺鞨과 渤海靺鞨이 따로 기술되어 있는데 靺鞨에는 黑水靺鞨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신당서(1060)에는 黑水靺鞨과 渤海가 따로 기술되어 있는데 渤海는 원래 粟末靺鞨이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渤海는 黑水部과 함께 靺鞨을 구성했던 粟末部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금사(1344)에는 靺鞨을 구성했던 7部 중 粟末部과 黑水部만 당나라 초에 남아 있다가 粟末靺鞨은 渤海가 되고 黑水靺鞨은 이 渤海에 종속되었다고 되어 있다.
2658#2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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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3~0741 金史(1344) 黑水靺鞨
713~741년에 내조하여 黑水府를 설치하고 部長으로 하여금 都督刺史를 하게 하고 長史를 설치하여 감독했다. 都督에게는 李씨의 성을 내리고 이름을 獻誠이라 하고 黑水經略使를 명했다. 나중에 渤海가 강성해지자 黑水는 거기에 소속되고 조공을 끊었다.
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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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1125 遼
당나라가 907년에 망한 후 혼란에 빠진 중국을 송나라가 960년에 통일하자 왕고는 963년부터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송나라와 경쟁하던 요나라는 993년에 왕고를 침공하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요나라에 조공하겠다는 항복을 받아냈다. 왕고는 994년부터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해에 왕고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전해에 있었던 요나라의 침공에 대해 보복해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국교를 끊었다.
2658#2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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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①肅慎②挹婁③勿吉④靺鞨❺女真
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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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貊·濊·沃沮·夫餘 ➔ 女眞ꜛ
漢五郡 = 樂浪郡+眞番郡+臨屯郡+玄菟郡+遼東郡 ➔ 高麗 = (貊+濊+沃沮+夫餘) + (樂浪+帶方+遼東) ➔ 渤海 = 高麗 - (樂浪+帶方+遼東) + 靺鞨 = (鴨淥府+南海府+柵城府+扶餘府) + 靺鞨 ➔ 女眞
▐ 高麗는 貊에서 출발하여 濊, 沃沮, 夫餘, 樂浪, 帶方 그리고 遼東을 통합하면서 성장하였다. 渤海는 高麗의 貊, 濊, 沃沮 그리고 夫餘를 각각 鴨淥府, 南海府, 柵城府 그리고 扶餘府로 재편하였다. 渤海가 망한 뒤에는 이들 지역에 女眞만 나타난다.
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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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金史(1344)
五代 시기에 거란이 渤海땅을 취하자 黑水靺鞨은 거란에 부속되었다. 그 남쪽은 거란에 적을 두었는데 熟女直이라 불렀고 그 북쪽은 거란에 적을 두지 않았는데 生女直이라 불렀다. 生女直에는 混同江과 長白山이 있다. 混同江은 黑龍江이라 부르기도 했으므로 白山黑水는 이를 말한다.
1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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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 黃頭
0945 黃頭室韋가 있는데 이 부락은 병사가 강하고 가구 수 또한 많다. ┆ 黃頭生女真 사람들은 우직하고 용감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금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앞장세웠다. 나중에 부역이 심해지고 보상이 줄고 그들의 이득마저 빼앗기자 1133년에 돌아섰다. 토벌하려 했으나 산 아래에서 막혀 그들의 소굴에 오를 수 없었다. 2년 후 나와서 패하자 항복하였다. 수염과 머리털이 노랗고 눈동자는 녹색, 황색 그리고 흰색이 많다.
2658#6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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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3 新五代史 襪劫子
동북쪽으로 가면 말겁자에 이른다. 그 사람들은 다팔머리를 머리 앞부분에만 하고 베를 잘라 옷을 만들어 입었고 안장 없이 말을 탄다. 활이 크고 화살이 긴데 매우 잘 쏘았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여 그 고기를 날로 먹으므로 거란 등의 나라가 모두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거란 기병 5기라도 한 명의 말겁자를 만나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삼면이 모두 실위인데, 하나는 그냥 실위고 또 하나는 황두실위며 나머지 하나는 수실위다.
4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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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3 신오대사 1
契丹甞選百里馬二十匹遣十人齎乾食少北行窮其所見其人自黑車子歷牛蹄國以北行一年經四十三城居人多以木皮為屋
거란은 일찌기 백리마 20필을 가려내고 10명의 사람을 보내 건사를 실고 북쪽으로 가서 그들이 본 바를 모두 기록하게 하였다. 그 사람들은 흑거자로부터 우체국 이북을 거쳐 1년을 가서 43개의 성을 지났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와 가죽으로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4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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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3 신오대사 2
其語言無譯者不知其國地山川部族名號其地氣遇平地則溫和山林則寒冽至三十三城得一人能鐵甸語其言頗可解云地名頡利烏于邪堰
그들의 말을 통역하는 자가 없어 그 나라 땅과 산천, 부족, 이름 등을 알지 못했다. 그 땅의 기운은 평지를 만나면 온화하고 산림을 가게 되면 차고 맑았다. 33번째 성에 도달했을 때 한 사람을 만났는데 철전 말을 할 수 있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전하기를 그 땅의 이름을 힐리오우사언이라 하였다.
4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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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3 신오대사 3
云自此以北龍蛇猛獸魑魅羣行不可往矣其人乃還此北荒之極也
전하기를 '여기서부터 북쪽은 용, 뱀, 맹수, 도깨비 등이 무리지어 다녀 갈 수가 없다.'라고 하며 그 사람들은 곧 돌아왔다. 여기가 북황의 끝이다.
4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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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3 신오대사 牛蹄突厥
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盧瓜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또 북쪽에는 우체 돌궐이 있는데 사람의 몸을 하고 있으나 발은 소의 발굽이다. 땅이 매우 춥다. 호로하(瓠河 盧瓜河)란 강이 있는데 여름과 가을에는 얼음의 두께가 2척이나 되고 봄과 겨울에는 얼음이 더욱 두터워서 항상 그릇에 불을 쬐어 얼음을 녹여 마실 물을 얻는다.
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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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3 신오대사 狗國
又北狗國人身狗首長毛不衣手搏猛獸語為犬嗥其妻皆人能漢語生男為狗女為人自相婚嫁穴居食生而妻女人食
또 북쪽에는 구국이 있는데 사람의 몸을 하고 있으나 머리는 개다. 털이 길고 옷을 입지 않으며 맨손으로 맹수를 잡는다. 개 짖는 소리로 말을 하나 아내는 모두 사람이라 중국말을 할 줄 안다. 남자가 태어나면 개가 되고 여자가 태어나면 사람이 된다. 서로 혼인하여 동굴에 살며 음식을 날로 먹는데 여자들은 사람처럼 먹는다.
4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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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松漠紀聞
女真即古肅慎國也 東漢謂之挹婁 元魏謂之勿吉 隋唐謂之靺鞨
여진은 옛 숙신국이다. 동한은 읍루라 했고 탁발위는 물길, 수당은 말갈이라 했다.
19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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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元明 교체
대체적으로 한국에서의 왕조교체는 중국에서의 왕조교체와 맞물려 일어났다. 중국에서 元이 明으로 교체될 때도 한국에서 왕씨고려가 이씨조선으로 교체되었다. 명나라를 치라고 보낸 왕고의 장수 이성계는 군대를 되돌려 왕씨왕조를 전복하고 이씨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두 국호 안을 올려 조선으로 하라는 결정을 받고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2658#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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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 ~ 1912 淸
요동에서 여진이 성장하자 명나라는 이씨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여 함께 여진을 침공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조에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왕위에 올라 반여진 정책을 강화하자 여진은 1627년에 이조를 침공하여 왕자를 인질로 잡아갔다. 그러나 인질이 가짜 왕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명나라와의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자 1636년에 다시 이조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진짜 왕자를 인질로 잡아갔다.
2658#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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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滿洲源流考
장백산 동쪽에 포고리라는 산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포륵호리라는 연못이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신령스러운 까치가 날아와 세째 선녀의 옷 위에 빨간 열매를 놓고 갔다. 세째 선녀가 그 열매를 입에 넣자 뱃속으로 들어가 임신이 되었다.
...
장백산 동쪽 악다리성에 정착하여 나라의 이름을 만주라 하였다.
7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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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 1945 滿洲國
淸이 망한 후 요흑은 중화민국 군벌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다 1932년 일본이 들어와 이 지역의 군벌을 몰아내고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수도는 지금의 길림성 장춘(당시 명칭은 新京)에 있었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국가원수로 내세운 입헌군주제의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 관동군에 의해 지탱되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만주국은 만주족과 한족이 토대가 되었으나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주하여 다민족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 ...
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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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 vs 遼黑
탁발선비의 위나라, 거란의 요나라, 완안여진의 금나라, 몽골의 원나라 그리고 건주여진의 청나라는 모두 중원을 한번씩 점령하고 통치했었다. 이들은 모두 요흑 지역의 종족들이다. 따라서 동북아의 역사를 중원과 요흑의 대결 구도로 파악할 수 있다.
1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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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分割工程
중국분할공정은 지금의 중국에서 위구르, 티벳 그리고 만주를 분리독립시키고 내몽골을 몽골에 떼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내몽골과 만주 부분은 요흑사에 기반하였다.
中国分割工程主张维吾尔、西藏、满洲应从今天的中国分离和独立,内蒙古应移交给蒙古。内蒙古和满洲以辽黑史为基础。
2658#1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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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족 vs 말겁자
중국의 사서에는 만주에 황두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黃頭, 즉 노랑머리라는 말에서 이미 외모가 황인종이 아닐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수염과 머리털이 노랗고 눈동자는 녹색, 황색 그리고 흰색이 많다는 설명까지 들으면 그러한 짐작은 더욱 굳어진다.
그러면 왜 이곳에 백인종이 살게 되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타림 분지에서 발견되는 백인종의 미라와 연결한 것으로, 원래 이곳에는 백인종이 살고 있었는데 다른 지역이 황인종으로 교체될 때 ...
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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