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012 高句麗

압록강 유역에는 貊이 있었다. 위만 조선에 복속되어 있다가 한나라가 -108년에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4군을 설치할 때 현도군 高句麗현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점차 한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高句麗현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5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을 배출하다 鄒牟부터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독점하였다. 나라 이름은 高句麗현의 이름을 따 高句麗라 불리게 되었다.
 
    史記(-91)
史記(-91)
15603 SHARED
 
史記(-91) -0311
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 및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예맥, 조선 그리고 진번과 교류하여 이익을 얻었다.
11089 SHARED
 
史記(-91) -0109-
諸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 以徃者 東接穢貉朝鮮 모든 좌방의 왕들과 장수들은 동쪽에 거주하고 상곡군에서부터 동쪽으로 예맥 및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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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91) -0108
漢使楊信於匈奴 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為郡 한나라는 양신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는 예맥과 조선을 함락하여 그 땅에 몇 개의 군을 설치했다. ▐ 사기에는 부여, 예맥, 조선 그리고 진번이 나오지만 고구려는 나오지 않는다.
15085 SHARED
 
史記(-91) -0108
以故遂定朝鮮為四郡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16088 SHARED
 
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穢貉
穢 濊 獩 ┆ 貉 貊 㹮 貃 陌 ┆ 狛 貘 獏 ▐ 穢와 濊는 모두 더럽다는 뜻인데 고대 영흥만 일대의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고 貉은 너구리라는 뜻이고 貊과 㹮은 불가사리라는 뜻인데 모두 고대 압록강 유역의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15093#852 SHARED COMMENT
 
   漢書(82)
漢書(82)
23566 SHARED
 
漢書(82) -0108
漢使楊信使於匈奴 是時漢東拔濊貉朝鮮以為郡 한나라는 양신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는 예맥과 조선을 함락하여 그 땅에 몇 개의 군을 설치했다. ▐ 사기의 穢는 한서에서 濊로 표기되어 있다.
15518 SHARED
 
漢書(82) -0108
玄菟樂浪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 현도와 낙랑은 무제가 치소를 두었다. 모두 조선, 예맥 그리고 구려 오랑캐다. ▐ 濊貉과 句驪가 별개로 나오고 있다.
18257 SHARED
 
漢書(82) -0107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 현도군(무제 원봉 4년에 설치했다.) ▐ 이 기록에 의해 현도군의 설치 시기는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보다 한 해 늦은 때로 확인되었다.
16456 SHARED
 
漢書(82) -0107
戶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호가 45,006이고 구는 221,845다. ▐ 낙랑군 25현의 호가 62,812이고 구가 406,748인 것과 비교해 볼 때, 고구려·상은태·서개마 세 개 현의 규모로는 너무 크기 때문에 옥저에 처음 설치할 당시의 현도군 호와 구로 추정된다. 이는 후한서(445)에 고구려·상은태·서개마를 포함한 6성이 1,594호 43,163구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도 뒷받침이 된다.
23571 SHARED
 
漢書(82) -0075
縣三 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현이 세 개다.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 ▐ 삼국지(289)에 -75년에 옥저에 있던 현도군의 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옥저를 낙랑에 소속시켰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 기록은 -75년 이후의 상황이다.
17142 SHARED
 
   漢書(82)   -0075
漢書(82) -0075
▐ 고구려는 혼강(渾江) 유역에 있었고 서개마는 압록강 상류에서 옥저로 넘어가는 개마대산의 서편에 있었으며 강계는 압록강에서 예로 넘어가는 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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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82) -0075 遼山
高句驪(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 水西北經塞外) 고구려(요산은 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 남소가 있어 물이 서북쪽으로 흘러 변경을 경유한다.) ▐ 요수는 지금의 渾河다. 옛날에는 요대의 삼차하에서 대요수 및 太子河와 하나로 합쳐졌다. 혼하 상류에서 南蘇를 지나 서북쪽으로 흐른다는 강은 지금의 蘇子河가 유력하다.
15093#6129 SHARED
 
漢書(82) 0012
莽發高句驪兵 當伐胡 不欲行 郡強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為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為所殺 州郡歸咎於高句驪侯騶 嚴尤奏言 貉人犯法 不從騶起 왕망이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가지 않으려 했다. 군이 강요하자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주와 군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추에게 돌렸다.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추 때문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 高句驪와 貉人이 동일시되고 있다.
18905 SHARED
 
漢書(82) 0012
其更名高句驪為下句驪 布告天下令咸知焉 於是貉人愈犯邊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그러자 맥인들이 더욱 변경을 침략하였다. ▐ 이 이야기를 통해 句麗는 어근이고 高는 관형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高句驪는 지역명이고 貉은 종족명이라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다.
11106 SHARED
 
  三國志(289)
三國志(289)
23567 SHARED
 
三國志(289) -0108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한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 현도군은 처음에 옥저에 설치되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052 SHARED
 
三國志(289) -0075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현도의 고부라는 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 한서(82)의 낙랑군에는 沃沮가 나오지 않고 夫租로 나온다.
15093#19738 SHARED
 
三國志(289) -0075
漢時賜鼓吹伎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於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11100 SHARED
 
三國志(289) -0075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17034 SHARED
 
三國志(289) -0075
▐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거나 현도군의 동쪽에 경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도군이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겨간 이후의 상황에 어울린다. 현도군에 고구려령이 있어 찾아온 고구려인들에게 조복과 의책을 주는 일을 관장하였다는 이야기는 고구려현이 고구려가 아닌 현도군 치소에 있었고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뜻이 된다.
17120 SHARED
 
 後漢書(445)
後漢書(445)
23568 SHARED
 
後漢書(445) -0107
武帝滅朝鮮 以沃沮地爲玄菟郡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17058 SHARED
 
後漢書(445) -0107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為縣 (前書元封中 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한서에는 원봉 중에 조선을 정벌하여 진번, 임둔, 낙랑 그리고 현도 4군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현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과 관악기와 악공을 하사하였다. ▐ 高句驪란 명칭은 高句驪縣이 설치되기 전부터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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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445) -0107
玄菟郡(武帝置 雒陽東北四千里 六城 戶一千五百九十四 口四萬三千一百六十三) 高句驪(遼山遼水出 山海經曰 遼水出白平東 郭璞曰 出塞外衞白平山 遼山 小遼水所出) 西蓋馬 上殷台
23572 SHARED
 
後漢書(445) -0107
현도군(무제가 설치했다. 낙양 동북 4천리다. 6성 1,594호 43,163구가 있다.) 고구려(요산은 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산해경에는 요수가 백평의 동쪽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곽박은 변방 바깥에서 나와 백평산을 지난다고 했으니 요산에서 나오는 것은 소요수다.) 서개마 상은태
23573 SHARED
 
後漢書(445) -0082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 임둔을 현도에 합치고 진번을 낙랑에 합쳤다고 보아야 다른 기록들과 어울린다.
17056 SHARED
 
後漢書(445) 0107
高顯(故屬遼東) 候城(故屬遼東) 遼陽(故屬遼東) 東觀書安帝即位之年 分三縣來屬 고현(예전에는 요동에 속했다.) 후성(예전에는 요동에 속했다.) 요양(예전에는 요동에 속했다.) 동관서에는 107년에 이 3현을 소속시켰다고 한다.
23575 SHARED
 
 연대별
연대별
23569 SHARED
 
-0107 고려의 어원
산 위에 쌓은 城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高城이라 할 만하다. 고구려에서는 城을 구루라 했으므로 高城은 高구루가 된다. 구루를 삼국지(289) 시기에는 溝婁라 표기했지만 -107년에는 句驪라 표기했을 수 있다. 이것이 高句麗의 어원인 듯하다. 오녀산성이 이 조건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로 城 아래 물가에 살았기 때문에 忽本이란 沸流谷의 지명을 사용하였고 高句麗는 한나라에 의해 주로 사용된 듯하다.
15093#11112 SHARED
 
-0037± 고려 건국 연도
삼국사기(1145)에는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고자묘지명(700)에는 -40년으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720)에는 -32±년으로 되어 있으며 안승책문(670)에는 -132±년 그리고 신당서(1060)에 인용된 고려비기에는 -232±년으로 되어 있다.
15093#15536 SHARED
 
-0037± 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15093#4425 SHARED COMMENT
 
-0037+ 고려의 천도
-037 紇升骨城 → 003 國內 → 209 丸都 → 247 平壤城 → 342 丸都城 → 343 平壤東黄城 → 371 國內 → 427 平壤 → 586 長安城
15093#1883 SHARED COMMENT
 
-0037+ 고려의 국호
한나라는 -107년에 忽本의 紇升骨城에 高句驪縣을 설치하였는데 훗날 그곳에서 鄒牟 왕조가 성장하자 高句麗는 그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高句麗 외에도 鄒牟 왕조는 下句麗, 句麗, 高句驪, 句驪, 駒麗 등으로 불려졌다. 高麗란 표기는 중원고려비(449)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15093#1914 SHARED COMMENT
 
-0037+ 고려 초기 왕계
고려의 초기 왕계는 건국 설화와 함께 광개토왕릉비(414)와 위서(554)에서 처음 나타난다. 광개토왕릉비에는 鄒牟-儒留-大朱留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고 위서에는 朱蒙-閭達-如栗-莫來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1145)에는 東明-琉璃-大武神-閔中으로 되어 있다. 수서(636)와 북사(659)는 대체로 위서와 같다.
15093#4419 SHARED COMMENT
 
0012 추모왕 피살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15093#572 SHARED COMMENT
 
0012+ 後漢書(445)
莽大說 更名高句驪王為下句驪侯 왕망이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로 부르게 했다. ▐ 이전에는 고구려왕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는 고구려현은 형식적인 소속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고구려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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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三國志(289)
本有五族 有涓奴部 絕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본디 다섯 족이 있으니, 소노부·절노부·순노부·권노부·계루부가 그것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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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三國志+廣開土王陵碑+魏書+古典記
0012¦三國志+廣開土王陵碑+魏書+古典記
▐ 夫餘에서 밀려나 貊人 지역의 忽本으로 온 鄒牟가 桂婁部의 부족장에게 장가들어 그 부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물려받고는 貊人 지역의 5부족을 통합한 뒤 왕망에게 살해되었다. 한편, 忽本에 있는 紇升骨城을 한나라는 高句麗라 칭하며 그곳에 縣을 설치하였는데 훗날 그곳에서 鄒牟 왕조가 성장하자 高句麗는 그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편, 桂婁部 부족장의 외손들은 鄒牟의 장자에게 밀려나 漢城에서 百濟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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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고려와 한국의 상호 인식
韓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에 高句麗와 별개의 나라로 처음 나타난다. 고려는 광개토왕릉비에서 韓과 穢를 다른 종족으로 보았으며 중원비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했다. 신라 또한 고려를 다른 종족으로 보았으며 해동안홍기와 당시장군비 그리고 낭혜화상탑비에서 穢貊이라 했다. 중국은 고려왕에게 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내렸고 고려왕도 스스로를 遼東에 있는 신하라 했다. 당나라는 고려를 침공하기 전에 遼東은 본래 중국 땅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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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낙랑고려
낙랑고려(樂浪高麗)는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427년부터 패망한 668년까지를 말한다. 제사, 장례, 결혼 등의 풍습이 이전의 맥고려(貊高麗)와 달랐다.
15093#2459 SHARED COMMENT
 
0668 고려의 해체
왕조, 백성 그리고 영토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고려가 망한 후 고려 왕조를 구성했던 지배세력은 대부분 당나라의 귀족이나 관리로 편입되었고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 일반 사람들도 대부분 당나라로 사민을 당했다. 그러나 맥, 예, 옥저, 부여 등 대부분의 고려 영토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15093#1940 SHARED COMMENT
 
0698 발해
발해는 고려에 소속되었던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의 옛 땅을 각각 남해부, 압록부, 부여부 그리고 책성부로 편제하였다. 이는 발해가 고려의 계승국을 자처할 만한 일이다. 왕씨고려가 세워질 때는 그런 발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니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의 옛 땅은 왕고에 포함되지 않았다.
6313 SHARED
 
0918 왕씨고려
왕씨고려는 신라의 영토와 백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왕조만 바뀐 것이다. 고려의 영토와 백성 대부분은 발해로 흡수되었고 그래서 발해는 고려계승국을 자처하였다. 왕씨고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고려를 한국사에 끼워넣었는데, 이때부터 민족 정체성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15093#1719 SHARED COMMENT
 
0926 발해 이후
발해가 망한 이후 요나라에 대항해서 부여, 맥 그리고 발해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모두 일어났다. 특히 맥인이 세운 정안국은 송사(1345)에 970년부터 991년까지 행적이 나타난다. 이는 왕씨고려가 고려를 계승하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고말까지도 맥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는 1370년에 이성계가 압록강 북쪽을 정벌할 때 나타난다.
5840 SHARED
 
expla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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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70 SHARED
 
historiography - 국조
나라의 시조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신라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셨고 왕고는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셨으며 이조는 추모와 기자에 단군을 더했다. 신라의 후속국인 왕고가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신 건 고려계승이라는 왕조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중원에 기대어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가 단군을 더한 것은 새로이 생겨나 퍼져나간 단군설화를 반영한 것이다.
5767 SHARED
 
ᐥ영문국호 Korea를 Silla로 바꾸어야 한다.ᐥ
고려가 우리 역사가 아니라면 영문국호 Korea도 우리의 정체성과 어긋나게 된다. 물론 Korea는 왕씨고려에서 나온 말이지만 왕씨고려의 국호가 고려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영문국호를 Silla로 바꾸는 게 어떨까 생각된다. 이것은 중국의 영문국호 China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秦(Qin)에서 나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 나라를 최초로 통일한 나라는 신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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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丽不是韩国的历史。
高丽和韩国从来就不是一体的,他们不承认彼此是亲属,而继承洛让的高丽则通过继续前往渤海而与韩国历史线分开。 고려는 한국사가 아니다. 고려와 한국은 하나였던 적이 없고,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하지도 않았으며, 낙랑을 이은 고려는 발해로 이어져 한국사 계통과 분리된다.
15093#14477 SHARED
 
고려사 요약
고려는 맥(貊)의 다섯 부족 연맹체에서 출발하여 동방변군을 밀어내고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과는 요하를 경계로 맞서고 한국과는 한강유역을 두고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이 589년 수(隋)/당(唐) 제국으로 통일되자 고려는 중국의 침략을 받게 된다. 마침내 668년 신라의 협력을 받은 당(唐)의 공격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당(唐)은 고려왕 고장을 비롯한 고려의 지배세력들을 당(唐)으로 데려가 ...
8537 SHARED COMMENT
 
다양한 견해
2004.01.26 요동사 - 김한규2005.03.15 고조선과 高句麗, 과연 우리 한민족의 역사인가? - 이전고려계승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서+三國志+광개토왕릉비 종합
광개토왕릉비(414)의 鄒牟王은 한서(82)에서 왕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高句驪王 騶에 대응된다. 추모왕 이후의 왕위 계승은 그의 후손이 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분명히 나와 있다. 따라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위가 이동했다는 삼국지(289)의 이야기와 연결되면, 추모왕이 계루부 최초의 왕이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왕조는 후대에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하여 추모설화를 만들고 왕조의 혈통을 신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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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98~0926 渤海
4486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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