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餘에서 밀려나 貊人 지역의 忽本으로 온 鄒牟가 桂婁部의 부족장에게 장가들어 그 부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물려받고는 貊人 지역의 5부족을 통합한 뒤 왕망에게 살해되었다. 한편, 忽本에 있는 紇升骨城을 한나라는 高句麗라 칭하며 그곳에 縣을 설치하였는데 훗날 그곳에서 鄒牟 왕조가 성장하자 高句麗는 그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편, 桂婁部 부족장의 외손들은 鄒牟의 장자에게 밀려나 漢城에서 百濟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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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82) -0107
戶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호가 45,006이고 구는 221,845다.
▐ 낙랑군 25현의 호가 62,812이고 구가 406,748인 것과 비교해 볼 때, 고구려·상은태·서개마 세 개 현의 규모로는 너무 크기 때문에 옥저에 처음 설치할 당시의 현도군 호와 구로 추정된다. 이는 후한서(445)에 고구려·상은태·서개마를 포함한 6성이 1,594호 43,163구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도 뒷받침이 된다.
15093#23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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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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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82) -0075 遼山
高句驪(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 水西北經塞外)
고구려(요산은 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 남소가 있어 물이 서북쪽으로 흘러 변경을 경유한다.)
▐ 요수는 지금의 渾河다. 옛날에는 요대의 삼차하에서 대요수 및 太子河와 하나로 합쳐졌다. 혼하 상류에서 南蘇를 지나 서북쪽으로 흐른다는 강은 지금의 蘇子河가 유력하다.
15093#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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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82) 0012
莽發高句驪兵 當伐胡 不欲行 郡強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為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為所殺 州郡歸咎於高句驪侯騶 嚴尤奏言 貉人犯法 不從騶起
왕망이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가지 않으려 했다. 군이 강요하자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주와 군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추에게 돌렸다.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추 때문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 高句驪와 貉人이 동일시되고 있다.
15093#18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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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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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289) -0075
▐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거나 현도군의 동쪽에 경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도군이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겨간 이후의 상황에 어울린다.
현도군에 고구려령이 있어 찾아온 고구려인들에게 조복과 의책을 주는 일을 관장하였다는 이야기는 고구려현이 고구려가 아닌 현도군 치소에 있었고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뜻이 된다.
15093#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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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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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445) -0107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為縣 (前書元封中 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무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한서에는 원봉 중에 조선을 정벌하여 진번, 임둔, 낙랑 그리고 현도 4군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현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과 관악기와 악공을 하사하였다.
▐ 高句驪란 명칭은 高句驪縣이 설치되기 전부터 있었던 듯하다.
15093#1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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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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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고려의 어원
산 위에 쌓은 城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高城이라 할 만하다. 고구려에서는 城을 구루라 했으므로 高城은 高구루가 된다. 구루를 삼국지(289) 시기에는 溝婁라 표기했지만 -107년에는 句驪라 표기했을 수 있다. 이것이 高句麗의 어원인 듯하다. 오녀산성이 이 조건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로 城 아래 물가에 살았기 때문에 忽本이란 沸流谷의 지명을 사용하였고 高句麗는 한나라에 의해 주로 사용된 듯하다.
15093#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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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15093#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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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추모왕 피살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15093#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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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三國志+廣開土王陵碑+魏書+古典記
▐ 夫餘에서 밀려나 貊人 지역의 忽本으로 온 鄒牟가 桂婁部의 부족장에게 장가들어 그 부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물려받고는 貊人 지역의 5부족을 통합한 뒤 왕망에게 살해되었다.
한편, 忽本에 있는 紇升骨城을 한나라는 高句麗라 칭하며 그곳에 縣을 설치하였는데 훗날 그곳에서 鄒牟 왕조가 성장하자 高句麗는 그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편, 桂婁部 부족장의 외손들은 鄒牟의 장자에게 밀려나 漢城에서 百濟를 세웠다.
15093#8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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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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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고려와 한국의 상호 인식
韓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에 高句麗와 별개의 나라로 처음 나타난다. 고려는 광개토왕릉비에서 韓과 穢를 이민족으로 보았으며 중원비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했다. 신라 또한 고려를 이민족으로 보았으며 해동안홍기와 당시장군비 그리고 낭혜화상탑비에서 穢貊이라 했다.
중국은 고려왕에게 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내렸고 고려왕도 스스로를 遼東에 있는 신하라 했다.
당나라는 고려를 침공하기 전에 遼東은 본래 중국 땅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15093#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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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8 발해
발해는 고려에 소속되었던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의 옛 땅을 각각 남해부, 압록부, 부여부 그리고 책성부로 편제하였다. 이는 발해가 고려의 계승국을 자처할 만한 일이다. 왕씨고려가 세워질 때는 그런 발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니 예, 맥, 부여 그리고 옥저의 옛 땅은 왕고에 포함되지 않았다.
15093#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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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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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발해 이후
발해가 망한 이후 요나라에 대항해서 부여, 맥 그리고 발해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모두 일어났다. 특히 맥인이 세운 정안국은 송사(1345)에 970년부터 991년까지 행적이 나타난다. 이는 왕씨고려가 고려를 계승하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고말까지도 맥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는 1370년에 이성계가 압록강 북쪽을 정벌할 때 나타난다.
15093#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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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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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ography - 국조
나라의 시조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신라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셨고 왕고는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셨으며 이조는 추모와 기자에 단군을 더했다.
신라의 후속국인 왕고가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신 건 고려계승이라는 왕조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중원에 기대어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가 단군을 더한 것은 새로이 생겨나 퍼져나간 단군설화를 반영한 것이다.
15093#5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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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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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요약
고려는 맥(貊)의 다섯 부족 연맹체에서 출발하여 동방변군을 밀어내고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과는 요하를 경계로 맞서고 한국과는 한강유역을 두고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이 589년 수(隋)/당(唐) 제국으로 통일되자 고려는 중국의 침략을 받게 된다.
마침내 668년 신라의 협력을 받은 당(唐)의 공격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당(唐)은 고려왕 고장을 비롯한 고려의 지배세력들을 당(唐)으로 데려가 ...
15093#8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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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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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三國志+광개토왕릉비 종합
광개토왕릉비(414)의 鄒牟王은 한서(82)에서 왕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高句驪王 騶에 대응된다. 추모왕 이후의 왕위 계승은 그의 후손이 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분명히 나와 있다. 따라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위가 이동했다는 삼국지(289)의 이야기와 연결되면, 추모왕이 계루부 최초의 왕이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왕조는 후대에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하여 추모설화를 만들고 왕조의 혈통을 신성화했다.
15093#6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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