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雄州→海洋┆火串山┆火串嶺
ᐥ雄州는 지금의 吉州 남쪽에 있었다.ᐥ
왕고는 1107년에 동쪽으로 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으로 弓漢嶺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村에 吉州¹를 설치하였다가 1109년에 모두 돌려주었다.
250여년 후 왕고가 다시 이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는, 吉州²를 옛 雄州 북쪽에 설치하고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雄州의 위치가 잊혀졌고 훗날 洪原과 혼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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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漢村→吉州¹┆弓漢嶺
ᐥ처음에 吉州를 깊은 골짜기에 설치한 이유ᐥ
弓漢村은 왕고와 완안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불씨였다. 왕고가 갈라전을 점령할 때도 弓漢村은 전쟁의 계기이자 전략의 소재였고 그래서 깊은 골짜기였지만 왕고는 이곳에 吉州¹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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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嶮鎭→吉州²
ᐥ公嶮鎭은 지금의 吉州에 있었다.ᐥ
1109년에 吉州¹가 포위당하자 오연총이 구원에 나섰는데 그 병력은 인근의 雄州에서 출발했을 듯하다. 雄州에서 吉州¹로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경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곳이다.
그러나 수백년 후 吉州²가 이곳에 설치되면서 公嶮鎭의 위치는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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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曷懶→吉州¹
ᐥ吉州는 曷懶에서 나온 말이다.ᐥ
金史에 나오는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1109년에 있었던 공험진 전투다. 공험진 전투는 지금의 吉州에서 벌어졌으므로 사묘아리 무용담에 나오는 曷懶水는 지금의 吉州를 지나는 浮瑞川이 된다. 1108년에 윤관이 점령지에 명칭을 붙일 때 合懶를 咸州라 한 것처럼 吉州라는 명칭도 曷懶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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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州→三撒(參散)┆蒙羅骨嶺
▐ 고려사(1451)에는 1107년에 蒙羅骨嶺 아래에 英州를 설치했다고 되어 있고, 태종실록(1431)에는 그 뒤 英州가 參散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1356년에 參散에 安北천호방어소를 두었다가 1372년에 北靑州만호부로 고쳤고 1398년에 靑州로 고쳤다가 다시 1416년에 北靑으로 고쳤다고 나와 있다. 지금의 北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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