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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1125 金史(1344)
당나라 초엽에는 靺鞨이 粟末·黑水 2부가 있었는데, 모두 高麗에 신속되었었다. 당나라가 高麗를 멸하자 粟末이 東牟山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하여져 渤海라 부르고 성을 大씨라 하였는데 문물과 예악이 있었다.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차츰 쇠퇴하여져 이 뒤로는 다시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벌하자 발해는 귀부하였는데, 대개 靺鞨의 후예들이다.
2726#23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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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4~1102
고려의 의사가 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乙離骨嶺 僕散部의 胡石來 勃堇이 고려와 여진 사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穆宗이 족인 叟阿를 시켜 불러오게 하고, 叟阿로 하여금 의원을 호송하여 고려 국경까지 돌려보내게 하였다. 의원이 돌아가 말하기를 “女眞으로 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왕이 이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2726#2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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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冬 金史(1344)
九年壬午 1102년
冬 蕭海里叛 겨울에 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遼追海里兵數千人 攻之不能克 요나라가 수천명의 군대를 보내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太祖策馬突戰 流矢中海里首 海里墮馬下 執而殺之 大破其軍
아골타가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하였는데 흐르는 화살이 해리의 머리에 명중하여 말에서 떨어지자 잡아서 죽였다. 그 군대를 대파하였다.
2726#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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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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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07~1103.10 金史(1344)
厥後 曷懶甸諸部盡欲來附 高麗聞之不欲使來附 恐近於己而不利也 使人邀止之 斜葛在高麗及往來曷懶道中 具知其事 遂使石適歡往納曷懶甸人
그 뒤 갈라전 등 여러 부족들이 귀부하려고 하자 고려에서 듣고 귀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에 가까워 불리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여 중지시켰다.
사갈이 고려에 있으면서 갈라와 왕래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자세히 알았으므로, 석적환을 보내어 갈라전 사람들을 귀부하도록 하려 하였다.
2726#23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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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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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 金史(1344)
고려에서 사람이 와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고 통고하니 曷懶甸 관속인 斜勒詳穩, 冶剌保詳穩 등을 보내자 石適歡도 盃魯를 보냈다. 고려에서는 冶剌保 등은 잡아두고 盃魯는 돌려보냈다. 이때 5水의 백성들이 모두 고려에 귀부하고 붙잡힌 團練使가 14명이었다.
▐ 五水之民皆附於高麗는 1107년에 윤관이 점령한 지역에 대응시킬 수 있다.
石適歡이 보낸 사람만 돌려보낸 이유는 完顔部의 개입을 거부한다는 뜻인 거 같다.
2726#2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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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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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 金史(1344)
이보다 앞서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통하였었는데, 얼마 있다가 틈이 생겼다. 고려의 사신이 와서 사안을 의논하자고 청하므로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였더니 고려가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5水의 백성으로써 고려에 붙은 자들이 團練使 14명을 사로잡았다.
▐ 五水之民附于高麗은 1107년에 윤관이 점령한 지역에 대응시킬 수 있다.
왕고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石適歡이 보낸 사람 뿐이다.
2726#2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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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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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2.08ꜛ 高麗史(1451)
오아속이 또 別部의 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져 군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려고 국경 근처에 와서 주둔하자, 왕이 임간에게 명령하여 가서 대비하도록 하였다. 임간이 공을 세우는데 급급하여 병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갔는데 그들에게 공격을 받아 연달아 패배하여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 여진이 승세를 타고 定州 宣德關의 성에 난입하여 죽이고 노략질 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2726#2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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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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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4 金史(1451)
四月 高麗復來攻 石適歡以五百人禦於闢登水 復大破之 追入闢登水 逐其殘眾踰境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에서 방어하여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로 들어가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 당시 국경이 定州 인근에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闢登水는 함흥 서쪽을 흐르는 성천강이 유력하다.
2726#2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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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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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6.13+ 金史(1451)
드디어 사갈로 하여금 경계를 바르게 정하도록 하니 을리골수와 갈라전의 활녜수에 이르러 2개월을 머물렀다.
사갈은 송사를 잘 판결하지 못하여 사건마다 지체시키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그래서 강종은 사갈을 소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다. 석적환은 삼존수에다 막부를 설치하고 과거에 고려와 몰래 왕래하여 난리를 조성한 사람은 즉시 죄에 따라 처벌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치니 강종은 그를 유능하게 여겼다.
2726#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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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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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乙離骨
▐ 사갈을 소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으니 사갈이 있던 乙離骨水와 曷懶甸活禰水는 석적환이 있던 三潺水와 같은 지역이거나 인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태종실록(1431)에는 英州를 參散이라 칭하였다고 하고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北靑都護府의 본래 이름이 參散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北靑으로 추정한다.
2726#2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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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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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03.05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가 아뢰기를 “東女眞의 之訓이 기병 2,000명을 이끌고 와서 관외에 진을 치고 성심을 다하여 복종하며 말하기를 ‘지난해의 전쟁은 새로 즉위한 왕이 알지 못하는 것이며 公牙가 내조하였을 때 그 뜻을 깨우치고 후한 상을 주어 돌려보냈으니 왕의 은혜가 지극히 두터운데 어찌 감히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진심으로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726#2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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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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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6 高麗史(1451)
왕이 선정전 남문에서 요불과 사현 등 여섯 명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요불 등이 다음과 같이 애걸했다. “현재 태사를 맡고 있는 오아속도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안정된 생업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면, 하늘에 맹세코 자손대대로 조공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귀국의 영토에 던지지 않겠나이다.”
2726#1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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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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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08 고려사절요(1452)
요(遼)에서 여진을 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청병하였다. 재추ㆍ시신ㆍ도병마판관과 여러 위의 대장군 이상을 불러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파병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오직 위위소경 척준경과 예부낭중 김부일, 호부원외랑 한충, 우사간 김부식ㆍ우정언 민수가 국가에서 정해ㆍ무자의 전란 이후로 군사와 백성들이 겨우 어깨를 쉬게 되었는데, 지금 타국을 위하여 군사를 출동한다면 이것은 자진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니, 장래의 이해가 어찌 될지 두렵습니다."
2726#3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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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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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03 高麗史(1451)
금의 임금 아골타가 서한을 보내 “형인 대여진금국 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문서를 보내오. 우리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고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섬겨왔소. 나는 부득이하게 그에 항거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을 얻어 그들을 섬멸하게 되었소. 생각하건대 왕은 우리와의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관계를 맺어 대대로 무궁한 우호관계를 이루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2726#3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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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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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04 高麗史(1451)
정응문과 이후를 금(金)에 보내 본국을 신하라고 칭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저는 하찮은 작은 지방을 다스리는 덕이 부족한 사람이긴 합니다만 황제폐하의 비상한 위업을 듣고, 이미 오랫동안 존경을 바쳐 왔으니, 넉넉지 못한 예물이나마 충성의 뜻으로 바치고자 합니다. 변변치 못한 공물을 바치는 것이 부끄럽긴 하오나, 크신 은덕으로 받아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2726#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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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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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07 高麗史(1451)
송(趙宋)에서 합문지후인 후장과 귀중부 등 60여 명을 보내왔다. "천하의 군사를 동원해 추악한 오랑캐들의 죄를 묻고자 하니 고려국왕은 군대를 지휘해 우리 군대와 협력해 적에게 천벌을 내리도록 하라." 후장이 송(趙宋)으로 돌아가는 편에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했다. "저희나라는 본래 강성한 나라가 아닐 뿐더러, ... 상국의 군사가 적을 제압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적으나마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2726#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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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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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 異域誌
女真在鴨綠之陽長白山之下古肅慎氏之國也始因新羅人完顏氏者奔於國遂家焉地多產金故女真阿古答稱帝國號大金
여진 - 압록강의 양(陽), 장백산의 아래에 있다. 옛 숙신씨의 나라다. 처음에 신라인 완안씨가 나라에서 도망쳐 나와 마침내 집안을 이루었다. 금이 많이 난다. 옛날 여진 아고답(아골타)이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이라 했다.
2726#40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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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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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 滿洲源流考
新羅王金姓相傳数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金史地理志乃云以國有金水源為名史家附㑹之詞未足憑耳 신라 왕성 김(金)이 수십 대를 이어 왔으므로 금(金)이 신라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나라의 이름 역시 당연히 여기서 나온 것이다. 금사지리지에는 금수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이는 역사가들이 왜곡한 것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
2726#25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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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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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金 국호의 어원
금 국호의 어원에 대해서 금사는 두 가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하나는 요나라의 국호가 쇠를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쇠보다 우수한 금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나라의 뿌리가 금수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강 이름을 따라 국호를 정했다는 것이다.
한편, 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의 시조가 김씨 신라인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 성을 따라 국호를 금나라로 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각각의 이야기에는 나름의 정치적 의도가 ...
2726#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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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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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百科在线 - 佟姓
據考證原遼國的加古氏到金國時期仍爲夾(加)古氏元朝亦爲夾古氏而到了明朝則諧音爲夾溫氏清朝時期又演變爲覺羅氏 고증에 근거하면, 원래 요나라 시기의 가고(加古)씨는 금나라 시기에 협고(夾古)씨와 병행해서 쓰이더니 원나라 시기에는 마침내 협고(夾古)씨가 되었다. 명나라가 끝나갈 무렵에는 음이 변하여 협온(夾溫)씨가 되었고 청나라 시기에는 각라(覺羅)씨로 변하였다.
2726#3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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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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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말갈에 대한 요(遼)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아골타가 말갈 부족들을 통합하고 요(遼)를 격파한 후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이후 금(金)은 1125년에 요(遼)를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송(趙宋)마저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왕조가 오래가지는 못하고 1234년 몽골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금사에는 금(金)의 유래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다.
금사(金史 1345 元 脫脫)
금(金)의 선조는 말갈에서 나왔다. 말갈은 본래 ...
2726#8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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