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륙이 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세웠다. 金에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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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東女眞
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東女眞이 왕고와 접촉하는 창구는 和州館이었다.
2364#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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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고려사절요(1452)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었다. 당(唐) 측천무후 때에 고구려 사람인 대조영이 요동으로 달아나 점유하였다. 당 예종이 발해군왕으로 봉하니 이로 인하여 스스로를 발해국이라 부르고 부여·숙신 등 10여 나라를 병합하였다. 거란의 군주가 크게 일으켜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포위한 채 멸망시키고 동단국(東丹國)으로 바꾸었다. 그 세자 대광현과 ... 등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2364#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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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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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 資治通鑑
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력으로 이웃 나라들을 병합하고 자못 강대해졌다. 오랑캐 중 말라를 통하여 고조(석경당)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하였습니다.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니 조정과 함께 그들을 쳐서 구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응답하지 않았다.
▐ 석경당이 요나라의 괴뢰라는 사실을 왕건이 모를 리 없다. 왕건의 이 제의는 단지 요나라와 오대진을 갈라놓으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2364#4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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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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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10 「三國誤記」 高麗史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 전쟁을 불러올 정도의 도발인데 거란의 보복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2364#4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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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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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 資治通鑑
황제(석중귀)가 거란과 원수가 되자 말라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가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을 어지럽혀 그 힘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왕건이 죽고 아들 왕무가 권지국사를 칭하며 표를 올려 이를 알려왔다. 11월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으로 삼고 통사사인 곽인우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거란을 치도록 하였다. 곽인우가 그 나라에 이르러 병력이 매우 약한 것을 보고 말라의 말이 단지 왕건의 과장일 뿐 거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2364#16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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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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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0 定安國
契丹의 침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정안국왕 오현명의 조부가 백성들을 이끌로 이주하여 세웠다. '고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臣本以高麗舊壤渤海遺黎)'을 자처하였다. 정안국에 대한 왕씨고려의 지원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왕고에 의해 장백산 너머로 쫓겨난 듯하다.
정안국은 맥고려의 발상지에 고려계승국인 발해의 유민이 세웠기 때문에, 역시 고려계승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왕고의 건국 명분을 무력화시킬 우려가 있었을 듯하다.
2364#4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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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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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0※ 唐 高麗渤海道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五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 당나라의 고려발해길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가 해안을 따라가다 압록강구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환도현성을 지난 뒤 강 상류에서 육로로 발해 왕성까지 가는 길이었다. 정안국은 발해의 환도현성에 있었을 듯하다.
2364#20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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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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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1 宋史(1345)
女眞의 사신이 조공하러 가는 길이 定安國을 거치게 되자 그 왕 烏玄明이 그 편에 표문을 올렸다. 내용은 宋의 거란 정벌 계획을 지지하며 자신은 고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臣本以高麗舊壤渤海遺黎)인데 契丹의 침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조부가 백성들을 이끌로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扶餘府도 뜻을 같이 한다는 내용이었다.
宋은 겨울을 넘긴 뒤 토벌을 시행할 것이며 발해와 부여도 뜻을 같이 하니(渤海願歸於朝化 扶餘已背於賊庭) 동참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2364#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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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高麗史(1451)
宋이 契丹을 쳐서 燕州와 薊州를 수복하려 하면서 韓國華를 보내 조서를 전달했다.
“幽州와 薊州는 원래 중국의 땅으로 晋과 漢 때 변고가 많아 못난 오랑캐들이 훔쳐 의지하였다. 저 견융과 접해 있어 늘 나쁜 독에 근심하였으니 그 쌓인 분노를 풀어버릴 수 있는 때는 바로 여기 있지 않겠는가! 군사들에게 깨우침을 펴서 번갈아가며 적과 맞서고 이웃나라와 화합하여 힘을 합쳐 적을 소탕할 것이다.”
2364#4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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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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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高麗史(1451)
이보다 앞서 契丹이 女眞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길로 삼았는데 여진은 宋에 말을 바치러 가서는 “고려가 거란과 더불어 우리 백성을 노략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한국화가 왔을 때 이를 해명하였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황제의 총애를 크게 받아들고 있으니 감히 두 마음을 가지고 외국과 교통하겠소? 거란은 遼海 바깥쪽에 끼어 있으며 또 우리와는 큰 강을 두 개 사이에 둘 정도로 험해 따를 만한 길이 없소.”
2364#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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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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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6 高麗史(1451)
거란이 궐열을 보내 화친을 청해왔다.
▐ 전해에 왕고를 치려다 비 때문에 못했으면서 이렇게 화친을 청한 것은 왕고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려는 위장평화공세가 아닌가? 송나라와 협력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7년 후 요나라는 왕고를 침공하게 되는데, 그때 왕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던 듯 여진이 요나라의 군대가 온다고 알려주어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2364#4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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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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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高麗史(1451) 和州
和州는 혹은 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唐文이라 불렀고 혹은 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和州라고 하였다. 995년에 和州安邊都護府라 고쳤다. 1018년에 和州防禦使로 강등시키고 본영으로 삼았다. 고종 때에 몽고에 편입되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 화주가 이로 인해 登州에 합병되었지만 여전히 방어사로 불렀다. 뒤에 通州에 합병되었다. 충렬왕 때에 복구되었다.
2364#23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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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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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5 高麗史(1451)
하공진과 유종을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화주관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으므로 함께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2364#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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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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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遼史(1343)
조칙을 내려 배압이 고려를 토벌하다가 패전한 죄를 낱낱이 책망한 뒤 풀어주었다. 전공이 있는 장교에게는 관직을 높여주고 전사한 장교의 아내에게는 봉작을 더하여 주고 그 아들은 관리로 채용하였다. 남피실 군교들은 전공이 있었으므로 의복ㆍ기물ㆍ은ㆍ견 따위를 차등있게 하사하고 금백도 효리ㆍ열가의 두 해군에게 내렸다.
8월에 낭군 갈불려 등을 파견하여 제부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대군으로 편성해서 함께 고려를 토벌하도록 하니 순(詢)이 사신을 보내와 방물 바치기
2364#4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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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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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1030 興遼國
契丹 東京의 장군 大延琳은 渤海 大祚榮의 7대손인데 반란을 일으켜 興遼國을 세웠다.
王高는 그 틈을 타 압록강 동쪽 기슭을 차지하려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였다.
興遼國의 大延定이 東北女眞을 이끌고 契丹과 서로 공격하다 사신을 보내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王高는 응하지 않고 유소를 鎭으로 보내 興遼國에 대비하였다.
興遼國은 大慶翰, 高吉德 그리고 이광록을 차례로 보내어 원조를 간청하였으나 王高는 응하지 않았고 興遼國이 망하는 바람에 이광록은 돌아가지 못했다.
2364#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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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高麗史(1451)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북방 경계에 처음으로 關防을 설치하였다. 서해 바닷가의 옛 國內城의 경계로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 등의 13개 성을 거쳐 耀德·靜邊·和州 등의 세 성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1,000여 리에 뻗었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각 25척이다.
2364#2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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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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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4 金史(1451)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에서 방어하여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로 들어가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이에 고려왕은
“국경의 분쟁을 충동질한 자는 모두 관속 상단·방도리·석필한 무리들이었다.”
고 하며 단련사 14명과 6로의 사자로서 고려에 있던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동시에 강화하자고 요청하였다.
2364#2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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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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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한 뒤,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364#23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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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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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이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양유송, 정숭용, 견응도 등이 船兵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364#2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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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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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잡지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漢州), 그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 그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말한다.
-- 한주는 백제가 일어났던 곳으로 백제는 이곳에서 500여년간 존재했었다. 고려가 이곳을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의 이 부분은 왕고가 자신의 고려계승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2364#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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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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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 거란국지(契丹國志)
동북쪽으로는 말겁자에 이른다. 거기 사람들은 갈기 머리를 하고 베를 펼친 옷을 입으며 안장 없이 말을 탄다. 활은 크고 화살은 긴데 매우 잘 쏜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여서 그 고기를 날로 먹는다. 거란 등의 나라가 모두 그들을 두려워한다. 거란의 기병 5기라도 1명의 말겁자를 만나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삼면이 모두 실위인데, 하나는 그냥 실위고 또 다른 하나는 황두실위며 나머지 하나는 수실위다.
2364#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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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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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3 遼史(1343)
高麗와 西夏가 遼나라를 섬기면서 일찍이 國婚을 요청하여 下嫁시켰지만, 이것이 어찌 그들의 변치 않는 마음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三韓은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反覆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涼州는 멀리 있음을 믿고서 배반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국경을 침입하여 틈만 있으면 함부로 출동시켰으며, 朝貢하는 사신이 막 가고나면 사건이 뒤따라 발생하곤 하였다.
2364#3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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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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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인과 여진인은 무엇이 달랐나?
요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인을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인과 여진인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발해와 고려까지 요나라의 방식을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지방통치 방식을 군현제와 부족제로 단순화시켜 고찰해 본다.
작은 부족이 연합을 하거나 정복을 해서 규모가 커지면 중앙정치와 지방통치가 분리되게 된다. 지방통치는 부족제와 군현제가 있는데, 부족제는 부족 내에서 결정된 수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이고 군현제는 중앙에서 ...
2364#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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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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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
요(遼)는 중국대륙이 당(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세운 왕조다. (이때 한국에서도 신라에서 왕고로 왕조가 교체되는 사건이 있었다.)
요(遼)는 동서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926년에 병합한 발해도 포함된다.
발해를 병합할 때 요(遼)는 발해왕 대인선을 비롯한 발해의 지배세력들을 요(遼)로 데려가 요(遼)의 지배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일반 백성들도 다수 요(遼)로 이 ...
2364#8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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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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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된 예·맥·부여·옥저
고려에 통합되었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왕씨고려의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자리에 여진이 나타나는데 東, 西, 흑수, 말갈 등과 조합하여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크게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과 마운령 북쪽의 동여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그곳에 살던 예전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어떻게 된 것일까? 고려가 망할 때 고려인 2만 8천호 또는 20만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이 인구는 주로 평양 주변의 사 ...
2364#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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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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