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가 907년에 망한 후 혼란에 빠진 중국을 송나라가 960년에 통일하자 왕고는 963년부터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송나라와 경쟁하던 요나라는 993년에 왕고를 침공하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요나라에 조공하겠다는 항복을 받아냈다. 왕고는 994년부터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해에 왕고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전해에 있었던 요나라의 침공에 대해 보복해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국교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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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東女眞
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東女眞이 왕고와 접촉하는 창구는 和州館이었다.
2364#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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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고려사절요(1452)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었다. 당(唐) 측천무후 때에 고구려 사람인 대조영이 요동으로 달아나 점유하였다. 당 예종이 발해군왕으로 봉하니 이로 인하여 스스로를 발해국이라 부르고 부여·숙신 등 10여 나라를 병합하였다. 거란의 군주가 크게 일으켜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포위한 채 멸망시키고 동단국(東丹國)으로 바꾸었다. 그 세자 대광현과 ... 등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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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송사(1345)
초에 글단(契丹)의 아보기가 부여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킨 다음에 부여를 고쳐 동단부(東丹府)로 삼고서 그의 아들 돌욕에게 명하여 병사를 주둔시켜 진압하도록 하였다. 아보기가 죽자 발해왕이 다시 부여를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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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02 遼史(1343)
▐ 철려는 鐵利라고도 하는데 발해가 鐵利府를 설치했던 지역이다. 여기에 나오는 濊貊은 발해가 濊貊 지역에 설치했다던 南海府라기보다 貊高麗 지역에 설치했다던 鴨淥府에서 왔을 듯하다.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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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高麗史(1451)
唐에서 왕경과 양소업을 보내 왕을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왕건은) 주몽의 상서로운 개국을 뒤쫓아 나라의 군주가 되고 기자가 번국을 이룩한 자취를 밟아서 자애와 상서를 펼치고 있다.
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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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5.10 三國史記(1145)
왕이 말하기를,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장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 하고, 시랑 김봉휴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해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3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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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 資治通鑑
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력으로 이웃 나라들을 병합하고 자못 강대해졌다. 오랑캐 중 말라를 통하여 고조(석경당)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하였습니다.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니 조정과 함께 그들을 쳐서 구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응답하지 않았다.
▐ 석경당이 요나라의 괴뢰라는 사실을 왕건이 모를 리 없다. 왕건의 이 제의는 단지 요나라와 오대진을 갈라놓으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4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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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10 「三國誤記」 高麗史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 전쟁을 불러올 정도의 도발인데 거란의 보복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4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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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04 高麗史(1451)
왕이 내전으로 나가 대광 박술희를 부른 다음 친히 훈요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우리와는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또한 다르니 복식이나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하라.
강포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니 태평할 때에도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4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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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 資治通鑑
황제(석중귀)가 거란과 원수가 되자 말라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가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을 어지럽혀 그 힘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왕건이 죽고 아들 왕무가 권지국사를 칭하며 표를 올려 이를 알려왔다. 11월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으로 삼고 통사사인 곽인우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거란을 치도록 하였다. 곽인우가 그 나라에 이르러 병력이 매우 약한 것을 보고 말라의 말이 단지 왕건의 과장일 뿐 거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16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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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 資治通鑑
▐ 이전의 왕건이 허풍을 떨었을 수도 있고 당시 왕이었던 왕무가 전쟁에 끌려들어가기 싫어서 일부러 군사력이 약한 것처럼 보이게 했을 수도 있다.
18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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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0 定安國
契丹의 침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정안국왕 오현명의 조부가 백성들을 이끌로 이주하여 세웠다. '고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臣本以高麗舊壤渤海遺黎)'을 자처하였다. 정안국에 대한 왕씨고려의 지원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왕고에 의해 장백산 너머로 쫓겨난 듯하다.
정안국은 맥고려의 발상지에 고려계승국인 발해의 유민이 세웠기 때문에, 역시 고려계승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왕고의 건국 명분을 무력화시킬 우려가 있었을 듯하다.
4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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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0 宋史(1345)
定安國은 본래 馬韓의 종족인데 거란에게 격파당하자 그 우두머리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해서 서쪽 변방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면서 자칭 定安國이라고 하였다.
970년에 定安國왕 烈萬華가 女眞이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표와 방물을 바쳤다.
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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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0※ 渤海 朝貢道
▐ 발해의 鴨湪은 조공길이었고 長嶺은 영주길이었으며 扶餘는 거란길이었다. 정안국 이야기에 나오는 여진도 발해의 길을 이용했다면 정안국의 위치도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곳은 맥고려가 있던 곳이다.
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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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0※ 唐 高麗渤海道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五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 당나라의 고려발해길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가 해안을 따라가다 압록강구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환도현성을 지난 뒤 강 상류에서 육로로 발해 왕성까지 가는 길이었다. 정안국은 발해의 환도현성에 있었을 듯하다.
20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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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2 高麗史(1451)
宋에 내의시랑 서희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자 황제가 왕에게 제서를 내려 식읍을 더하고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의 칭호를 내렸다.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를, 부사인 내봉경 최업에게는 검교사농경 겸 어사대부를, 판관인 광평시랑 강례에게는 검교소부소감을, 녹사인 광평원외랑 유은에게는 검교상서금부낭중을 내리고 아울러 관고도 하사하였다.
4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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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6~0983 宋史(1345)
976~983년에 태종이 원대한 계획을 세워 거란을 토벌하려고 하면서 定安國에 조서를 내려 호응하도록 하였다. 정안국도 원수가 침략을 그치지 않는 것을 원망하던 터에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방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사에 의하여 묵은 울분을 씻을 수 있을까 하여 조서를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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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1 宋史(1345)
女眞의 사신이 조공하러 가는 길이 定安國을 거치게 되자 그 왕 烏玄明이 그 편에 표문을 올렸다. 내용은 宋의 거란 정벌 계획을 지지하며 자신은 고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臣本以高麗舊壤渤海遺黎)인데 契丹의 침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조부가 백성들을 이끌로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扶餘府도 뜻을 같이 한다는 내용이었다.
宋은 겨울을 넘긴 뒤 토벌을 시행할 것이며 발해와 부여도 뜻을 같이 하니(渤海願歸於朝化 扶餘已背於賊庭) 동참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2364#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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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高麗史(1451)
宋이 契丹을 쳐서 燕州와 薊州를 수복하려 하면서 韓國華를 보내 조서를 전달했다.
“幽州와 薊州는 원래 중국의 땅으로 晋과 漢 때 변고가 많아 못난 오랑캐들이 훔쳐 의지하였다. 저 견융과 접해 있어 늘 나쁜 독에 근심하였으니 그 쌓인 분노를 풀어버릴 수 있는 때는 바로 여기 있지 않겠는가! 군사들에게 깨우침을 펴서 번갈아가며 적과 맞서고 이웃나라와 화합하여 힘을 합쳐 적을 소탕할 것이다.”
4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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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高麗史(1451)
이보다 앞서 契丹이 女眞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길로 삼았는데 여진은 宋에 말을 바치러 가서는 “고려가 거란과 더불어 우리 백성을 노략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한국화가 왔을 때 이를 해명하였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황제의 총애를 크게 받아들고 있으니 감히 두 마음을 가지고 외국과 교통하겠소? 거란은 遼海 바깥쪽에 끼어 있으며 또 우리와는 큰 강을 두 개 사이에 둘 정도로 험해 따를 만한 길이 없소.”
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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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高麗史(1451)
▐ 거란이 쳐들어온다고 여진이 알려주었지만 고려는 이를 무시했으며 진짜 거란이 쳐들어와 여진 사람들을 잡아갈 때 고려로 도망간 사람들까지 쫓아가 잡아갔는데 고려는 이를 방치하였다. 이에 여진이 불만을 품고 고려를 공격하자 그들을 잡아 노예로 삼은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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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6 高麗史(1451)
거란이 궐열을 보내 화친을 청해왔다.
▐ 전해에 왕고를 치려다 비 때문에 못했으면서 이렇게 화친을 청한 것은 왕고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려는 위장평화공세가 아닌가? 송나라와 협력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7년 후 요나라는 왕고를 침공하게 되는데, 그때 왕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던 듯 여진이 요나라의 군대가 온다고 알려주어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4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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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 遼史(1343)
(왕고가) 입공하였다. 3월에 왕치(성종)가 사신을 파견하여 사로잡은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니, 조칙을 내려 계속 송환하도록 하고 아울러 사신을 파견하여 위무하였다. 12월에 왕치(성종)가 기악을 바치자 조서를 내려 거절하였다.
4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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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06 高麗史(1451)
遣元郁如宋乞師以報前年之役 宋以北鄙甫寧 不宜輕動 但優禮遣還 自是 與宋絶
거란의 작년 침략 행위를 보복하기 위해 원욱을 송(趙宋)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송은 북방 국경이 가까스로 평안해진 마당에 경솔한 군사행동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한 후 사신을 후하게 대접만 하고 돌려보냈다. 이 일 이후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4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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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06 高麗史(1451)
▐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고, 거절당할 경우 요나라와 약속한 대로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끊기 위한 명분으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985년에 송나라가 같이 요나라를 치자고 했을 때는 왕고가 협조하지 않았으니, 이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왕고가 송나라를 원망할 입장은 못된다.
5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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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遼史(1343)
치(성종)가 이주정을 보내어 공물을 보내오고 매도 함께 바쳤다. 10월에 이지백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11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치(성종)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동자 10명을 보내와 본국의 말을 배우도록 하였다.
4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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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高麗史(1451) 和州
和州는 혹은 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唐文이라 불렀고 혹은 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和州라고 하였다. 995년에 和州安邊都護府라 고쳤다. 1018년에 和州防禦使로 강등시키고 본영으로 삼았다. 고종 때에 몽고에 편입되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 화주가 이로 인해 登州에 합병되었지만 여전히 방어사로 불렀다. 뒤에 通州에 합병되었다. 충렬왕 때에 복구되었다.
23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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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7 遼史(1343)
한언경이 와 빙폐를 바치고, 부마 소항덕(소손녕)의 아내 월국공주의 죽음을 조문하였다.
11월에 治(성종)가 죽자 그의 조카 誦(목종)이 왕동영을 보내와 통고하였다.
12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조서를 내려 그의 조카 誦을 권지국사로 삼았다.
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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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5 高麗史(1451)
하공진과 유종을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화주관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으므로 함께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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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11 遼史(1343)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강조가 銅州에서 항거하였는데 패퇴하였다. 강조가 다시 나오자 우피실 상온 야률적로가 강조 등을 사로잡고, 도망하는 군사들을 수십리 추격하여 군량ㆍ갑옷ㆍ무기 따위를 노획하니 銅州ㆍ곽주ㆍ귀주ㆍ녕주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순(詢)이 표를 올려 조회하겠다고 하니 이를 허락하고, 군사들에게 사로잡거나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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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01 遼史(1343)
군사를 철수시키니 항복하였던 모든 성들이 다시 반하였다. 군사가 귀주 남령곡에 다다르자 큰 비가 연일 내려 비가 개서야 강을 건넜는데, 말이나 낙타들이 지쳐 갑옷과 무기들을 많이 버리고 압록강에 진을 쳤다. 사로잡은 사람들을 여러 능묘에 나누어 배치하고 나머지는 친척들이나 대신들에게 주었다.
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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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遼史(1343)
순(詢 현종)이 채충순을 보내와 옛날처럼 칭신하겠다고 청하므로 순(詢)에게 조서를 내려 친조하도록 하였다.
8월에 (왕고가) 전공지를 보내와 표를 올리고 병을 칭하여 조회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조칙을 내려 다시 6주를 빼앗도록 하였다.
4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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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遼史(1343)
북부재상 유진행은 도통으로, 추밀사 야율세량은 부도통으로, 전전도점검 소허열은 도감으로 삼았다. 그런데 진행이 변방까지 가족을 데리고 가 출군할 시기가 더뎌지자 뒤쫓아가 그를 되돌아오도록 하고, 세량과 소허열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4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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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遼史(1343)
조칙을 내려 동평군왕 소배압을 도통, 소허열을 부도통, 동경유수 야율팔가를 도감으로 삼아 다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12월에 소배압이 다하ㆍ타하 사이에서 싸웠는데, 요나라 군사가 불리하여 천운ㆍ우피실 2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으며, 전운군 상온 해리ㆍ요련 장상온 아과달ㆍ객성사 작고ㆍ발해상온 고청명 등은 싸움터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4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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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遼史(1343)
조칙을 내려 배압이 고려를 토벌하다가 패전한 죄를 낱낱이 책망한 뒤 풀어주었다. 전공이 있는 장교에게는 관직을 높여주고 전사한 장교의 아내에게는 봉작을 더하여 주고 그 아들은 관리로 채용하였다. 남피실 군교들은 전공이 있었으므로 의복ㆍ기물ㆍ은ㆍ견 따위를 차등있게 하사하고 금백도 효리ㆍ열가의 두 해군에게 내렸다.
8월에 낭군 갈불려 등을 파견하여 제부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대군으로 편성해서 함께 고려를 토벌하도록 하니 순(詢)이 사신을 보내와 방물 바치기
4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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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1030 興遼國
契丹 東京의 장군 大延琳은 渤海 大祚榮의 7대손인데 반란을 일으켜 興遼國을 세웠다.
王高는 그 틈을 타 압록강 동쪽 기슭을 차지하려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였다.
興遼國의 大延定이 東北女眞을 이끌고 契丹과 서로 공격하다 사신을 보내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王高는 응하지 않고 유소를 鎭으로 보내 興遼國에 대비하였다.
興遼國은 大慶翰, 高吉德 그리고 이광록을 차례로 보내어 원조를 간청하였으나 王高는 응하지 않았고 興遼國이 망하는 바람에 이광록은 돌아가지 못했다.
2364#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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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高麗史(1451)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북방 경계에 처음으로 關防을 설치하였다. 서해 바닷가의 옛 國內城의 경계로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 등의 13개 성을 거쳐 耀德·靜邊·和州 등의 세 성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1,000여 리에 뻗었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각 25척이다.
23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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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5 高麗史(1451)
"우리나라는 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 요나라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국서의 일부분이다.
3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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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1.06 高麗史(1451)
東女眞酋長烏雅束 與別部夫乃老有隙 遣公兄之助 發兵攻之 騎兵來屯定州關外
동여진의 추장 오아속이 별부의 부내로와 사이가 벌어지자 공형지조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이 정주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23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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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2.08┆金史(1451)
二年甲申 高麗來攻 石適歡大破之 殺獲甚眾 追入其境 焚略其戍守而還
1104년에 고려가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크게 쳐부수어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고려 국경까지 추격하여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2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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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4 金史(1451)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에서 방어하여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로 들어가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이에 고려왕은
“국경의 분쟁을 충동질한 자는 모두 관속 상단·방도리·석필한 무리들이었다.”
고 하며 단련사 14명과 6로의 사자로서 고려에 있던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동시에 강화하자고 요청하였다.
2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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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한 뒤,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3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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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이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양유송, 정숭용, 견응도 등이 船兵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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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靑邱圖(1834)
발해가 망한 후 왕고는 長州에 이어 定州로 조금씩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定州와 咸州 사이에는 크고 작은 강과 시내 그리고 호수가 있었는데, 이것이 자연적인 경계가 된 듯하다. 왕고와 여진의 충돌도 이 지역에서 자주 발생했다.
왕고로서는 定州城과 咸州 사이에 鎭을 하나 더 설치할 필요가 있었을 듯하다.
23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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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2.27± 尹瓘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다.
▐ 公嶮鎭도 이 300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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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高麗史(1451)
公嶮鎭은 1111년에 산성을 쌓았다.
▐ 1109년에 咸州를 포함한 여러 성들을 여진에 돌려줄 때 公嶮鎭은 돌려준 기록이 없었다. 이 기록을 통하여 公嶮鎭은 그때 돌려주지 않았고 그 이유는 咸州 남쪽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국경선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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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잡지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도 3주를 설치하였다. 서쪽 제일 첫 번째가 한주(漢州), 그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 그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말한다.
-- 한주는 백제가 일어났던 곳으로 백제는 이곳에서 500여년간 존재했었다. 고려가 이곳을 점유한 기간은 80여년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의 이 부분은 왕고가 자신의 고려계승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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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 거란국지(契丹國志)
동북쪽으로는 말겁자에 이른다. 거기 사람들은 갈기 머리를 하고 베를 펼친 옷을 입으며 안장 없이 말을 탄다. 활은 크고 화살은 긴데 매우 잘 쏜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여서 그 고기를 날로 먹는다. 거란 등의 나라가 모두 그들을 두려워한다. 거란의 기병 5기라도 1명의 말겁자를 만나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삼면이 모두 실위인데, 하나는 그냥 실위고 또 다른 하나는 황두실위며 나머지 하나는 수실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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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3 遼史
요사는 원나라가 편찬했지만 요나라의 기록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런데 요나라는 고려 계승을 놓고 왕씨고려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가 남긴 기록에도 고려 계승과 관련하여 요나라에게 유리한 이야기가 들어있었을 듯하다.
2364#16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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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3 遼史(1343)
高麗와 西夏가 遼나라를 섬기면서 일찍이 國婚을 요청하여 下嫁시켰지만, 이것이 어찌 그들의 변치 않는 마음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三韓은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反覆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涼州는 멀리 있음을 믿고서 배반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국경을 침입하여 틈만 있으면 함부로 출동시켰으며, 朝貢하는 사신이 막 가고나면 사건이 뒤따라 발생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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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인과 여진인은 무엇이 달랐나?
요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인을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인과 여진인의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발해와 고려까지 요나라의 방식을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지방통치 방식을 군현제와 부족제로 단순화시켜 고찰해 본다.
작은 부족이 연합을 하거나 정복을 해서 규모가 커지면 중앙정치와 지방통치가 분리되게 된다. 지방통치는 부족제와 군현제가 있는데, 부족제는 부족 내에서 결정된 수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이고 군현제는 중앙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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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
요(遼)는 중국대륙이 당(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세운 왕조다. (이때 한국에서도 신라에서 왕고로 왕조가 교체되는 사건이 있었다.)
요(遼)는 동서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926년에 병합한 발해도 포함된다.
발해를 병합할 때 요(遼)는 발해왕 대인선을 비롯한 발해의 지배세력들을 요(遼)로 데려가 요(遼)의 지배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일반 백성들도 다수 요(遼)로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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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된 예·맥·부여·옥저
고려에 통합되었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왕씨고려의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자리에 여진이 나타나는데 東, 西, 흑수, 말갈 등과 조합하여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크게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과 마운령 북쪽의 동여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그곳에 살던 예전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어떻게 된 것일까? 고려가 망할 때 고려인 2만 8천호 또는 20만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이 인구는 주로 평양 주변의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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