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History Cheat Sheet > 地理志ꜛ > -0006 樂浪과 靺鞨

樂浪¹郡┆東有樂浪²(貊國)┆崔理樂浪³(東暆)┆靺鞨¹(勿吉)┆北有靺鞨²
 
고구려의 어원
ᐥ고구려는 한나라가 설치한 현도군 고구려현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ᐥ
 
汲冢周書
良夷在子 在子幣身人首 脂其腹 炙之藿則鳴曰在子 (良夷樂浪¹之夷也貢奇獸) 양이는 재자를 바친다. 재자는 화폐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머리는 사람이다. 배에 기름이 있어 그것을 태운다. (양이는 낙랑 오랑캐를 말한다. 거기서 나는 짐승을 바쳤다.)
10167
 
汲冢周書
▐ 재자는 물범을 말한다. 당시 쓰이던 화폐 중에는 물범과 비슷한 모양을 한 화폐가 있었다. 대동강 하구에서 멀지 않은 백령도에는 지금도 물범이 살고 있다. 279년에 달린 것으로 보이는 주석의 良夷樂浪¹之夷也란 문구에 의해 樂浪¹이란 말이 良夷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생긴다. 樂浪¹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
15920
 
樂浪¹郡
樂浪¹郡은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군이다. 313년까지 400여년간 대동강 유역에 존속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의미의 樂浪¹이다.
21047
 
東有樂浪²(貊國)
삼국사기(1145)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낙랑은 樂浪¹郡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낙랑은 36년, 14년 그리고 4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2년에 백제를 침공했으며 -6년에 백제에 의해 東有樂浪²이라 불리웠고 -8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했다. 이것이 두번째 의미의 樂浪²이다. 東有樂浪²이 맥고려에 의해 멸망당한 후 비슷한 위치에서 貊國이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나라로 추정한다.
21048
 
崔理樂浪³(東暆)
삼국사기(1145)에는 32년에 맥고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병합된다는 樂浪³王 崔理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세 번째 의미의 樂浪³이다. 이 樂浪³은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樂浪¹郡에서 빠진 東暆로 추정된다.
21049
 
北有靺鞨²
삼국사기(1145)에는 맥고려가 건국되던 -37년부터 靺鞨이 나타난다. 백제가 北有靺鞨²이라 부르던 세력은 백제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자주 침공하였다.
16
 
-0037 三國史記(1145) 고구려 靺鞨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그 땅(도읍을 삼았던 졸본천 또는 흘승골성)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 이 당시에는 靺鞨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원래 '이질적인 어떤 종족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훗날 '말갈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변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6684
 
-0028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¹
樂浪²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户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盗 可謂有道之國 吾儕濳師而襲之 無異於盗 得不愧乎 乃引還 낙랑인이 병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변경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곡식도 한곳에 쌓아 들판에 널린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곳의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군사를 내어 습격하는 것은 도적이나 다를 바 없으니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돌아갔다.
16819
 
-0028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¹
▐ 樂浪¹郡의 군대같지 않고 순박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 낙랑을 樂浪¹郡과 구별하여 樂浪²라 이름붙여 추적해 본다.
16892
 
-0020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
遣瓠公聘於馬韓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²倭人 無不畏懷 호공에게 마한을 방문하게 하였다. 호공이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연 이래 인사가 잘 갖추어지고 천시가 조화로워 창고가 충실하고 인민은 공경하며 겸양하니,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과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이 낙랑은 -28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그냥 돌아간 樂浪²을 말한다.
16637
 
-0017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16820
 
-0017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 이 당시에는 靺鞨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원래 '이질적인 종족이 북쪽에 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훗날 '말갈이 북쪽에 접했다'는 이야기로 변질된 것이다. 이 말갈을 훗날 勿吉을 대체한 명칭인 靺鞨¹과 구별하여 靺鞨²라 이름붙여 추적해 본다.
16969
 
-001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靺鞨²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 전해에 北境과 접하고 있다고 언급된 그 말갈이다.
16821
 
-0015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
遣使樂浪²修好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16928
 
-0011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 5년 전에 침공해온 말갈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22
 
-0011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 이 낙랑은 -15년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은 樂浪과 동일한 나라인데, 백제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929
 
-0009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곤미천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청목산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봉현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 2년 전에 침공해온 말갈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이 말갈은 -17년과 -16년의 기록에도 北境과 연관되어 등장한다.
16823
 
-0008 04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
樂浪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이 낙랑은 -11년에 백제가 병산책을 쌓자 사신을 보내 항의한 樂浪과 동일한 나라다.
16882
 
-0008 07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 -8년 4월에 말갈을 사주해서 백제를 침공하게 한 樂浪과 동일한 나라다.
16883
 
-000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國家東有樂浪² 北有靺鞨² 侵軼疆境 少有寧曰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圡壤膏腴 冝都於彼 以圖久安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5794
 
-000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 여기에서 언급된 말갈은 3년 전에 침공해온 말갈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그 말갈은 -17년, -16년 그리고 -9년의 기록에서 北境과 연관되어 등장했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 또한 2년 전에 목책을 쌓아 통로를 봉쇄한 樂浪과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16879
 
-000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000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 말갈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靺鞨連我北境, 靺鞨侵北境 그리고 靺鞨寇北境이라고 되어 있어 北有靺鞨이란 표현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東有樂浪이란 표현이 어색하다. 백제의 초기 도읍으로 추정되는 서울 광진구에서 동쪽은 북한강 유역이다. 그렇다면 東有樂浪이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16881
 
-0006 ¦철원
▐ 철원은 영흥만과 한수를 잇는 추가령구조곡의 가운데에 있다. 농경에 적합한 평지도 넓어 北有靺鞨이 있었음직하다. 이곳은 또한 대동강에서 영흥만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가야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할 때도 한나라가 이 지역은 포기하지 않았을 듯하다.
16889
 
-0006 ¦춘천
▐ 춘천은 북한강 물길의 요지로 선사 시대부터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은 고고학적 양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이 東有樂浪이 있었음직한 곳이다. -82년에 진번과 임둔이 폐지될 때 이곳은 한나라의 군현에서 빠졌지만 계속해서 낙랑을 자처하며 주변에 대해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16818#16932
 
-0005 三國史記(1145) 신라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쳤다.
16825
 
-0002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
봄에 樂浪이 쳐들어와서 위례성을 불태웠다. ▐ 이 낙랑은 -6년에 변경을 위협하는 것으로 언급된 樂浪과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16930
 
-0002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 이 말갈은 4년 전에 변경을 위협하는 것으로 언급된 北有靺鞨²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靺鞨¹ 사람들을 구덩이에 파묻는 이야기는 645년의 전쟁에서도 나타난다.
16826
 
-0001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 -2년에 백제의 위례성을 침공한 데 대해 보복하려는 목적이었던 듯하다. 이 사건 이후 백제의 기록에서는 246년까지 낙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까지가 東有樂浪이고 246년부터는 낙랑군으로 볼 수 있다.
16886
 
0004-07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
樂浪兵이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16828
 
0004-07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
▐ 여기서 말하는 상은 이 해에 있었던 박혁거세의 죽음을 말한다. 이 낙랑을 마한에 가서 호공이 언급한 樂浪과 달리 볼 이유는 없다. 또 이 낙랑을 -1년에 백제가 침공하려 한 樂浪과 다른 별도의 낙랑으로 설정하면,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군을 제외하고도 동시대에 두 개의 낙랑이 있게 되어 매우 어색해진다.
16931
 
0004-08 三國史記(1145) 백제
石頭城과 高木城 두 성을 쌓았다.
16950
 
0004-09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왕이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나 한 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이 말갈은 5년 전에 습격해온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27
 
0014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6부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이들을 막게 하였다. 樂浪이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 낙랑의 행태가 4년에 침공해왔던 樂浪兵과 같다. 그리고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에서 왔다고 보기에는 거리상 힘든 정황이다.
16829
 
0022-09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述川城을 쳐들어왔다. ▐ 이 말갈은 18년 전인 4년에 교전한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30
 
0022-11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또 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랜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 이 말갈은 두 달 전에 쳐들어온 그 北有靺鞨이다. 北有靺鞨과는 4년에도 斧峴의 동쪽에서 교전한 바 있다.
16831
 
0025 三國史記(1145) 백제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가가 부양으로 와서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16832
 
0030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 이 말갈은 8년 전에 쳐들어온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33
 
0030 동부도위 폐지
▐ 광무제는 30년에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縣에 있던 우두머리를 縣侯로 삼았다. 이때 불내·화려·옥저 등의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16922
 
0031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高木城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 이 말갈은 1년 전에 교전한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34
 
0032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낙랑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낙랑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16887
 
0034-09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 이 말갈은 3년 전에 교전한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北有靺鞨과는 30년에도 馬首山 서쪽에서 교전한 바 있다.
16835
 
0034-10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또 甁山柵을 습격하였다. ▐ 이 말갈은 한 달 전에 침공해온 그 北有靺鞨이다. 北有靺鞨은 -8년에도 甁山柵을 침공해온 바 있다.
16836
 
0036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
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 이 낙랑을 14년에 금성을 침공했던 樂浪과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16927
 
0037 三國史記(1145) 신라 樂浪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이 낙랑을 36년에 변경을 침공했던 樂浪과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16838
 
0037 三國史記(1145) 고구려 樂浪
王襲樂浪²滅之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 이 사건 이후 백제의 동변과 신라의 북변을 자주 침략하던 낙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때 멸망당한 낙랑은 삼국사기에서 ᐥ36년, 14년 그리고 4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2년에 백제를 침공했으며 -6년에 백제에 의해 東有樂浪²이라 불리웠고 -8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했다ᐥ는 그 樂浪²과 동일한 낙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6906
 
0037 樂浪² ↔ 樂浪¹
0037 樂浪² ↔ 樂浪¹
37년의 사건 이후 樂浪²은 삼국사기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이 사건 이후 나오는 樂浪은 樂浪¹을 의미한다.
19818
 
0040 三國史記(1145) 신라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 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화려현과 불내현 두 현의 사람들이 연계하여 모의하고서는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맥국의 거수가 군사를 내어 곡하의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6731
 
0040※ 三國遺事(1281)
三國史云 溟州古穢國 野人耕田得穢王印献之 又 春州古牛首州古貊國 삼국사에 이르기를 “명주는 옛날 예국이다. 야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을 얻어 나라에 바쳤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춘주는 옛날의 우수주로 옛적의 맥국이다.”라고 하였다. ▐ 春州는 지금은 春川이다.
16839
 
0040¦ 貊國
▐ 37년에 樂浪이 맥고려에 망하면서 기록에서 東有樂浪이 사라지고 40년부터 貊國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東有樂浪이 貊國이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東有樂浪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므로 화려 및 불내와 신라 사이에 있었을 貊國과 위치도 비슷하다. 따라서 貊國을 東有樂浪으로 가정해 본다. 그러면 樂浪을 자처하다 37년에 맥고려에 병합되면서 貊國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12283
 
0040¦北有靺鞨
0040¦北有靺鞨
-8년에 東有樂浪은 北有靺鞨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하였다. 東有樂浪과 北有靺鞨은 우호적인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貊國이 東有樂浪이라면 貊國에 의해 신라침공이 차단된 화려와 불내는 北有靺鞨이 아닐 듯하다. 낙랑군 동부도위 7현 중에서 원래 임둔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현은 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그리고 前莫인데, 이 중에서 北有靺鞨이 될 수 있는 현은 蠶台, 邪頭昧 그리고 前莫으로 범위가 줄어든다.
16875
 
0042 三國史記(1145) 신라
貊帥가 사냥을 하다가 새와 짐승을 잡아 왕에게 바쳤다.
16840
 
0044 三國史記(1145) 고구려 樂浪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樂浪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이 기록은 중국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의 저자가 전래 기록에 나오는 동유낙랑 또는 최리낙랑을 낙랑군으로 오인하고 후한서에 나오는 낙랑군 기록에 짜맞추다보니 만들어진 듯하다.
16923
 
0047 三國史記(1145) 고구려 樂浪
잠지락부의 대가인 대승 등 1만여 가가 樂浪에 가서 한나라에 의탁하였다. ▐ 이 기록은 후한서에서 기원한 것이므로 이 사건에 나오는 낙랑은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다.
16909
 
0055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北鄙를 침범하였다. ▐ 이 말갈은 34년에 쳐들어온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北有靺鞨은 -17년, -16년 그리고 -9년의 기록에서 北境과 연관되어 등장하고 -6년에는 北有와 연관되어 등장한다.
16841
 
005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왕이 동부에 명하여 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게 하였다. ▐ 이 말갈은 전해에 침공해온 그 北有靺鞨이다.
16842
 
0108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牛谷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 이 말갈은 56년에 牛谷城을 쌓아 침략에 대비한 그 北有靺鞨이 아닌 다른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43
 
0125 신라에 말갈이 침공해오기 시작한다.
0125 신라에 말갈이 침공해오기 시작한다.
16934
 
0125-01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²
말갈이 北境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 이 당시에는 靺鞨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원래 '이질적인 어떤 종족이 북쪽 변경을 쳐들어왔다'는 이야기였는데, 훗날 '말갈이 북쪽 변경을 쳐들어왔다'는 이야기로 변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6844
 
0125-07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²
또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넘어왔다. 왕이 글을 백제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주었다. 적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16845
 
0125-07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²
▐ 이 말갈은 6개월 전에 침공해왔던 그 말갈이다. 백제가 원병을 보내준 것으로 보아 백제에게도 적대적인 세력이었고 백제를 자주 침공했던 말갈과 동일한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 말갈도 백제의 北有靺鞨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동쪽에 있던 東有樂浪이 37년에 망한 뒤 맥국이 나타나 얼마간 지속하다 그마저 사라지면서 백제의 북쪽에 있던 北有靺鞨이 그 빈 공간을 채우면서 점차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신라의 북변에 다다른 듯하다.
16943
 
0137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말갈이 塞를 침입하여 長嶺의 다섯 목책을 불태웠다. ▐ 이 말갈은 12년 전인 125년에 침공해 왔던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46
 
0139-08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長嶺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붙잡아가고 노략질하였다. ▐ 2년 전에 동일한 長嶺을 침공했던 그 北有靺鞨이다.
16847
 
0139-10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다시 쳐들어왔는데, 눈이 많이 오는 바람에 물러갔다. ▐ 두 달 전에 침공해왔던 그 北有靺鞨이다.
16848
 
0140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長嶺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비하였다. ▐ 137년과 139년 두 차례에 걸쳐 長嶺을 침공했던 그 北有靺鞨이다.
16849
 
0142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여러 신하를 불러 말갈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찬 웅선이 불가하다는 말을 올리니, 그만두었다. ▐ 2년 전에 목책을 세워 방비했던 그 北有靺鞨이다.
16850
 
0146 三國史記(1145) 고구려 樂浪¹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樂浪大守의 처자를 잡아왔다.
16818#7241
 
0203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말갈이 境을 침범해 왔다. ▐ 61년 전인 142년에 정벌을 검토했던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51
 
0210 말갈이 백여 년만에 다시 백제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0210 말갈이 백여 년만에 다시 백제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16817
 
0210-02 三國史記(1145) 백제
赤峴城과 沙道城의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들을 옮겼다.
16948
 
0210-10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 108년에 北有靺鞨의 침공을 받고 102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신라가 北有靺鞨의 침공을 받은 지 7년만의 일이어서, 이 말갈 역시 北有靺鞨로 볼 수 있다. 이후의 침공 지역이 이전에 北有靺鞨이 침공해왔던 지역과 동일한 경우가 많아 이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16852
 
0214-09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 4년 전에 침공해온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53
 
0214-10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와서 述川에 이르렀다. ▐ 한 달 전에 침공해온 그 北有靺鞨이다. 北有靺鞨은 22년에도 述川城을 침공해온 바 있다.
16854
 
021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 2년 전에도 쳐들어왔던 北有靺鞨이다. 北有靺鞨은 210년에도 沙道城을 침공한 바 있다.
16855
 
0217 三國史記(1145) 백제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6949
 
0220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 4년 전에 쳐들어왔던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北有靺鞨은 -17년, -16년 그리고 -9년의 기록에서 北境과 연관되어 등장하고 -6년에는 北有와 연관되어 등장하며 55년에는 北鄙와 연관되어 등장한 바 있다.
16856
 
0229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 4년 전에 쳐들어왔던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백제는 56년에 牛谷城을 쌓아 北有靺鞨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北有靺鞨은 108년에 牛谷을 침공한 바 있다.
16857
 
0238~0246 曹魏의 요동 평정
16858
 
0238~0246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0238~0246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14854
 
0238~0246 東夷
弱水┆鮮卑┆扶餘┆挹婁┆高句麗┆沃沮┆朝鮮┆濊┆馬韓┆辰韓┆弁韓┆倭
14847
 
0246 三國史記(1145) 고구려 樂浪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樂浪에서 퇴각하였다. ▐ 이 이야기는 중국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여기 나오는 낙랑은 낙랑군 동부도위였던 예로 볼 수 있다.
16911
 
0246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樂浪太守 유무, 삭방 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樂浪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무가 듣고 노하였다. 왕이 침략 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 이 이야기는 중국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16912
 
0258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 추장 나갈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 이 말갈은 29년 전인 229년에 침공해온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60
 
0298 三國史記(1145) 백제
한나라가 貊人과 함께 쳐들어왔다. 왕이 나가서 막다가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 한나라는 220년에 망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한나라는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 나오는 맥인은 동유낙랑이 맥고려에 망한 뒤 등장했던 맥국으로 보아야 한다. 이 즈음에는 다시 낙랑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거 같다.
16861
 
0304 三國史記(1145) 백제 樂浪¹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16920
 
0313 자치통감(1084)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16903
 
0313 三國史記(1145) 고구려 樂浪¹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16938
 
0313 樂浪¹ ↤
0313 樂浪¹ ↤
19834
 
0387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²
말갈과 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258년에 말 10필을 바친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이후의 침공 지역이 이전에 北有靺鞨이 침공해왔던 지역과 동일한 경우가 많아 이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16862
 
0391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북쪽 변경의 赤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4년 전에 교전했던 北有靺鞨이다. 北有靺鞨은 216년에도 赤峴城에 쳐들어온 바 있다.
16863
 
0391 日本書紀(720)
왜가 바다를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다.
16947
 
0391 광개토왕릉비(414)
▐ 광개토왕릉비에는 東有樂浪과 北有靺鞨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16945
 
0395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말갈이 北邊을 침범하였다. 군사를 내어 그들을 悉直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쉈다. ▐ 203년에 北有靺鞨의 침공을 받고 192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백제가 北有靺鞨의 침공을 받은 지 4년만의 일이어서, 이 말갈 역시 北有靺鞨로 볼 수 있다. 이후의 침공 지역이 이전에 北有靺鞨이 침공해왔던 지역과 동일한 경우가 있어 이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16864
 
0449? 중원고려비
▐ 중원고려비에는 東有樂浪과 北有靺鞨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16966
 
0449? 삼한의 지명
0449? 삼한의 지명
중원고려비가 설치될 즈음에 백제는 여전히 한성에 있었지만 철원과 춘천 지역은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16965
 
0468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北邊의 悉直城을 습격하였다. ▐ 395년에 신라의 北邊에 쳐들어와서 悉直의 들판에서 교전한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이후의 침공 지역이 이전에 北有靺鞨이 침공해왔던 지역과 동일한 경우가 있어 이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16865
 
0468-02 三國史記(1145) 고구려 靺鞨
왕이 말갈 병력 1만으로 신라의 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17017
 
0475 백제 한성 함락
16944
 
0475~0561 百濟의 남하
0475~0561 百濟의 남하
16971
 
0480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말갈이 北邊을 침략하였다. ▐ 12년 전에 北邊에 쳐들어온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66
 
0481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北邊에 쳐들어와 狐鳴城 등 7성을 빼앗고, 또한 彌秩夫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泥河 서쪽까지 추격해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 1년 전에 北邊에 쳐들어온 그 北有靺鞨이다. 北有靺鞨은 125년에도 泥河를 넘어온 적이 있다.
16867
 
0482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漢山城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 1년 전에 고려와 함께 신라를 침공했던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16868
 
0503?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馬首柵을 소각하고 髙木城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 9년 전에 쳐들어왔던 北有靺鞨과 다른 별개의 말갈로 볼 이유가 없다. 백제는 -11년에 馬首城을 쌓았고 北有靺鞨과는 30년에 馬首山 서쪽에서 교전하였으며 34년에는 馬首城이 北有靺鞨의 침공을 받은 바 있다. 다만 이 당시는 한성이 고려에 함락된 이후이고 馬首라는 곳은 한성 북쪽에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이 사건의 연대는 오류일 수 있다.
16869
 
0506?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말갈이 침입하여 高木城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 3년 전에 髙木城을 침공한 그 北有靺鞨이다.
16870
 
0507?-05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髙木城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말갈은 503?년과 506?년에 髙木城을 침공한 그 北有靺鞨이다.
16871
 
0507?-10 三國史記(1145) 백제 靺鞨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함께 漢城을 치기 위하여 橫岳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 고려와 北有靺鞨은 481년에도 함께 신라를 침공한 바 있다.
16872
 
0548 三國史記(1145) 백제
고구려 왕 평성이 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 이 당시 濊는 고려에 흡수된 이후지만 종족적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北有靺鞨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16873
 
0551 - 三國史記(1145)
부평군은 본래 고구려 부여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금화현이다.
16967
 
0551 - 三國史記(1145)
철성군은 본래 고구려 철원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동주이다. 거느리는 현은 2개이다.
16968
 
0551 - 三國史記(1145) 朔州
朔州는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남쪽이자 예의 서쪽 옛 맥의 땅이며(句麗之東南 濊之西 古貊地) 대개 지금 신라의 북쪽인 朔州다. 선덕왕 6년에 牛首州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한편 문무왕 13년에 首若州를 설치했다고 이른다. 경덕왕이 朔州로 고쳐 삼았다. 지금은 春州이다.
16898
 
0551 - 三國史記(1145) 朔州
▐ 40년에 화려와 불내의 신라 침공을 중간에서 막았던 貊國에 대응시킬 수 있다. 맥국은 東有樂浪이 멸망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나며 위치도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東有樂浪과 비슷하기 때문에 東有樂浪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東有樂浪은 지금의 춘천에 있었던 것이 된다.
19797
 
0551 백제와 신라의 고려침공
▐ 백제 성왕이 직접 백제와 임나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을 되찾고 더 진군하여 평양까지 차지하였는데, 이로써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신라 진흥왕도 거칠부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여 죽령에서 고현에 이르는 10군을 빼앗게 하였다. 이때 철원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던 듯하다. 이를 반영하듯 이후의 기록에는 北有靺鞨²이 나타나지 않는다.
19816
 
0551~0565 靺鞨² ↔ 靺鞨¹
0551~0565 靺鞨² ↔ 靺鞨¹
551년의 사건 이후 北有靺鞨²은 삼국사기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나오는 말갈은 勿吉靺鞨¹이다.
16859
 
0554 魏書
勿吉國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肅愼國의 지역이다.
16901
 
0565 北齊書(636)
是歲 高麗契丹靺鞨¹並遣使朝貢 고려, 거란 그리고 말갈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해왔다. ▐ 北有靺鞨²이 신라에 흡수되고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의 기록에 靺鞨¹이라는 표기가 나타나 勿吉을 대체하였다. 靺鞨¹은 勿吉과 발음이 비슷해서 勿吉이 변해서 생긴 말로 추정된다.
193
 
0598 隋書(636)
元率靺鞨¹之衆萬餘騎寇遼西 營州總管韋沖擊走之
16954
 
0598 三國史記(1145) 고구려 靺鞨
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니 영주 총관 위충이 이를 격퇴하였다. ▐ 이 당시 北有靺鞨²이 있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고 요서 지역을 침공하는 데 동원할 병력으로는 北有靺鞨²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말갈은 勿吉靺鞨¹로 볼 수 밖에 없다. 중국의 기록에 北有靺鞨²이 나온 사례는 없어 보인다.
16958
 
0612 隋書(636)
兼契丹之黨 虔劉海戍 習靺鞨¹之服 侵軼遼西
16957
 
0612 三國史記(1145) 고구려 靺鞨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동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16959
 
0636+ 三國遺事(1281)
海東安弘記云 九韓者一日夲·二中華·三吳越·四乇羅·五鷹逰·六靺鞨·七丹國·八女真·九穢貊 해동안홍기에 이르기를 9한이란 것은 1 일본, 2 중화, 3 오월, 4 탁라, 5 응유, 6 말갈, 7 단국, 8 여진, 9 예맥이라고 하였다.
19373
 
0636± 三國遺事(1281)
▐ 靺鞨이라는 말은 565년의 중국 기록에 사용된 것이 확인되고 있고 신라에서는 655년에 중국에 보낸 문서에서 사용된 것이 확인된다. 안홍은 615년에 수나라로 유학을 갔으므로 勿吉이 靺鞨이라 불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靺鞨을 女真과 별개로 나란히 나열한 것은 「해동안홍기가 씌어질 당시 신라인들이 靺鞨이라 부르는 존재가 勿吉말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39
 
0636± 三國遺事(1281)
▐ 勿吉이 靺鞨이라 불리기 전부터 우연히 신라인들이 靺鞨이라 부르는 존재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신라인들이 북쪽 변경을 자주 침략해 오던 세력을 靺鞨이라 불렀던 것은 중국인들이 동북 지역의 勿吉을 靺鞨라 부르던 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獫狁은 원래 중국인들이 북방 유목민을 가리키던 말인데 백제는 중국에 보낸 문서에서 자신을 자주 침공해오던 고려를 가리켜 獫狁이라 했다. 신라의 靺鞨도 같은 경우라 볼 수 있다.
16818#19819
 
0645 新唐書(1060)
帝曰 虜墮吾策中矣 命左衛大將軍阿史那社尒以突厥千騎嘗之 虜常以靺鞨¹銳兵居前 社尒兵接而北 태종은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을 이끌고 가서 유인하게 하였다. 고구려가 늘 말갈의 예병을 앞세우므로 사이의 군사가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16953
 
0645 舊唐書(945)
高麗北部傉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貞率高麗·靺鞨¹之衆十五萬來援安市城 고려의 북부녹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정이 고려·말갈의 무리 15만명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16951
 
0645 舊唐書(945)
太宗簡傉薩以下酋長三千五百人 授以戎秩 遷之內地 收靺鞨¹三千三百 盡坑之 餘衆放還平壤 태종은 녹살 이하 추장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군직을 주어서 내지로 옮겼다. 말갈 사람 3천 3백명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평양으로 돌려 보냈다.
16952
 
0655 舊唐書(945)
六年 百濟與高麗靺鞨¹率兵侵其北界 攻陷三十餘城 春秋遣使上表求救
16811
 
0655 舊唐書(945)
六年 新羅王金春秋又表稱百濟與高麗靺鞨¹侵其北界 已沒三十餘城
14996
 
0655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다.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 北有靺鞨²은 551년에 신라가 차지하였고 고려가 勿吉靺鞨¹을 전쟁에 동원한 것은 598년의 기록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 기록의 말갈도 勿吉靺鞨¹로 볼 수 밖에 없다.
16874
 
0658 三國史記(1145) 신라 靺鞨
王以何瑟羅地連靺鞨²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왕이 하슬라의 땅이 말갈에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을 폐지하여 주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을 북진으로 삼았다. ▐ 北有靺鞨²은 395년에 신라의 北邊에 쳐들어와 悉直의 들판에서 교전한 바 있고 468년에도 고려와 함께 쳐들어와 北邊의 悉直城을 공격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말갈도 北有靺鞨²이다.
17015
 
1060 新唐書
黑水靺鞨¹은 肅慎 땅에 있는데 挹婁라고도 하며 탁발魏 때는 勿吉이라고도 불리었다.
16902
 
1145 三國史記 고구려 樂浪
논하여 말한다. 현도와 樂浪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 사서마다 낙랑을 이야기할 때는 으례 한나라가 樂浪¹郡을 설치한 사실을 빼놓지 않고 말하는데, 삼국사기에는 사서 전체를 통틀어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다. 樂浪이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는데, 전래 기록에는 한나라가 설치했다고 보기 어려운 東有樂浪²이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16962
 
1156 松漠紀聞
女真即古肅慎國也 東漢謂之挹婁 元魏謂之勿吉 隋唐謂之靺鞨 여진은 옛 숙신국이다. 동한은 읍루라 했고 탁발위는 물길, 수당은 말갈이라 했다. ▐ 肅慎 ➔ 挹婁(東漢) ➔ 勿吉(元魏) ➔ 靺鞨(隋唐) ➔ 女真
16900
 
2018 김창석
춘천의 맥국은 맥족이 아니라 예족이 중심이었으며 신라가 6세기 중엽에 이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오랫 동안 이곳을 통치했던 고구려를 의식하여 맥족의 본거지라고 오인했다.
16899
 
¦중국의 추정도
¦중국의 추정도
1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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