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illa > 0284~0551 濊史(靺鞨²) |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靺鞨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과 서로 엮여 있으므로, 樂浪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靺鞨의 기록도 그렇게 해야 한다. 靺鞨은 백제와 얽혀 -17년부터 258년까지 275년 동안 26회 나오다 258년부터 387년까지 130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4년부터 558년까지의 사건이 되어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
이 靺鞨은 철원에 있었던 이름모를 소국으로 추정된다.
•
-0037 三國史記(1145) 高句麗
그 땅(도읍을 삼았던 졸본천 또는 흘승골성)이 靺鞨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靺鞨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 이 당시에는 靺鞨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원래 '이질적인 어떤 종족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훗날 '말갈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변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6818#2557
SIBLINGS
CHILDREN
2557
•
0281 ❰❰⁵ -0020 솔까역사 新羅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16818#16806
SIBLINGS
CHILDREN
16806
•
0281~0337 ❰❰⁵ -0020~0037 樂浪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은 -20년부터 37년까지 57년 동안 13회 등장한다. 이후 266년 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304년 2월과 10월에 잠깐 등장하고는 사라진다.
-20년부터 37년까지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1년에서 337년 사이의 기록이 되어 304년의 두 기록과 잘 어울린다.
이 樂浪은 춘천에 있었던 樂浪郡의 부용국이었던 듯하다.
337년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망한 樂浪이 바로 이 樂浪일 것이다.
16818#16808
SIBLINGS
CHILDREN
16808
•
0286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阿且城과 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 부여와 대방이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그 부여를 백제로 착각한 것이다.
16818#16859
SIBLINGS
CHILDREN
16859
•
0332 ❰❰⁵ 0032 솔까역사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나팔이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16818#22575
SIBLINGS
CHILDREN
22575
•
0343 ~ 0427 高麗의 南下
313년과 314년에 각각 樂浪과 帶方을 병합한 고려는 342년에 모용 선비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丸都城이 파괴되자 이듬 해에 平壤 동쪽의 黄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즈음 백제도 예성강 유역까지 차지한 듯하다.
369년부터 고려는 백제의 예성강 유역을 침공하기 시작했는데, 371년에는 패해서 다시 도읍을 國內城으로 옮기기도 했지만, 399년 즈음에는 백제의 탈환 의지를 꺾고 임진강 유역까지 완전히 차지하였고, 427년에는 도읍도 平壤으로 다시 옮겼다.
16818#16869
SIBLINGS
CHILDREN
16869
•
0369 ~ 0562 倭의 介入
369년에 왜는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치고 比自㶱, 南加羅, 㖨國, 安羅, 多羅, 卓淳 그리고 加羅를 복속시킨 뒤 서쪽으로 돌아 忱彌多禮를 치자 比利, 辟中, 布彌支 그리고 半古가 항복해 왔다. 왜는 점령 지역을 백제와 나눠 가졌다가 392년에는 백제왕을 교체하면서 대부분 빼앗았다.
이후 백제에게 영토를 조금씩 돌려주고 신라에게는 조금씩 잠식당하다가 562년에 加羅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모두 잃었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任那의 유산이다.
16818#16890
SIBLINGS
CHILDREN
16890
•
0393.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진무는 몸소 군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石峴城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16818#30187
SIBLINGS
CHILDREN
30187
•
0395 三國史記 新羅
말갈이 北邊을 침범하였다. 군사를 내어 그들을 悉直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쉈다.
❶ 신라를 여러 차례 침공해 오던 동유낙랑이 337년에 고려에 망하자 신라는 동유낙랑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동해안의 예 지역을 잠식하여 삼척에까지 이르렀던 듯하다. 그러나 395년부터 고려의 사주를 받는 북유말갈로부터 침략을 받게 된다.
16818#16864
SIBLINGS
CHILDREN
16864
•
0396 廣開土王陵碑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6818#22619
SIBLINGS
CHILDREN
22619
•
0400 廣開土王陵碑
十年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16818#22622
SIBLINGS
CHILDREN
22622
•
0464.02 日本書紀(720)
新羅王은 高麗軍이 모두 新羅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高麗王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任那王이 膳臣 반구, 吉備臣 소리, 難波吉士 적목자에게 권하여 新羅를 구해주도록 했다.
16818#22624
SIBLINGS
CHILDREN
22624
•
0465.03 日本書紀(720)
기소궁숙니 등이 곧 신라에 들어가 이웃 군을 같이 공격하였다.
新羅王 夜聞官軍四面鼓聲 知盡得喙地 與數百騎亂走
신라왕은 밤에 관군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喙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기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소궁숙니는 쫓아가 진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喙地悉定 遣衆不下
喙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16818#22625
SIBLINGS
CHILDREN
22625
•
0475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궁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16818#30204
SIBLINGS
CHILDREN
30204
›
0481 ❸
395년부터 468년까지 신라가 삼척을 점유하고 있었다면 삼척에서 청하까지의 지역에 고려가 통치기구를 설치한 것은 468년에서 481년 사이 밖에 안된다.
그것도 이 기록의 「髙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을 468년의 일로 해석해야 가능하다.
여기서 7성은 悉直郡, 羽谷縣, 于珍也郡, 波旦縣, 于尸郡, 也尸忽郡 그리고 阿兮縣인 듯하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후속 국가인 왕고의 고려계승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라에 있는 고려의 흔적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16818#22627
SIBLINGS
CHILDREN
OPEN
•
0551 百濟와 新羅의 고려침공
▐ 백제 성왕이 직접 백제와 임나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을 되찾고 더 진군하여 평양까지 차지하였는데, 이로써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신라 진흥왕도 거칠부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여 죽령에서 고현에 이르는 10군을 빼앗게 하였다. 이때 철원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던 듯하다. 이를 반영하듯 이후의 기록에는 北有靺鞨²이 나타나지 않는다.
16818#19816
SIBLINGS
CHILDREN
19816
•
0615+ 海東安弘記
▐ 勿吉이 靺鞨이라 불리기 전부터 우연히 신라인들이 靺鞨이라 부르는 존재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신라인들이 북쪽 변경을 자주 침략해 오던 세력을 靺鞨이라 불렀던 것은, 중국인들이 동북 지역의 勿吉을 靺鞨라 부르던 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獫狁은 원래 중국인들이 북방 유목민을 가리키던 말인데 백제는 중국에 보낸 문서에서 자신을 자주 침공해오던 고려를 가리켜 獫狁이라 했다.
신라의 靺鞨도 같은 경우라 볼 수 있다.
16818#19795
SIBLINGS
CHILDREN
19795
•
0658 三國史記(1145) 新羅 靺鞨
王以何瑟羅地連靺鞨²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왕이 하슬라의 땅이 말갈에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을 폐지하여 주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을 북진으로 삼았다.
▐ 北有靺鞨²은 395년에 신라의 北邊에 쳐들어와 悉直의 들판에서 교전한 바 있고 468년에도 고려와 함께 쳐들어와 北邊의 悉直城을 공격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말갈도 北有靺鞨²이다.
16818#17015
SIBLINGS
CHILDREN
17015
•
東有樂浪(貊國)
삼국사기(1145)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낙랑은 樂浪郡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낙랑은 336년, 314년 그리고 304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299년에 백제를 침공했으며 295년에 백제에 의해 東有樂浪이라 불리웠고 293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했다.
이것이 두번째 의미의 樂浪이다.
東有樂浪이 맥고려에 의해 멸망당한 후 비슷한 위치에서 貊國이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나라로 추정한다.
16818#16889
SIBLINGS
CHILDREN
168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