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史書 > 1145 三國史記(王高 金富軾) > 三國史記의 五周甲引上(오주갑인상) > 0284~0529 ❰❰ -0017~0229 ❸靺鞨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靺鞨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과 서로 엮여 있으므로, 樂浪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靺鞨의 기록도 그렇게 해야 한다. 靺鞨은 백제와 얽혀 -17년부터 258년까지 275년 동안 26회 나오다 258년부터 387년까지 130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4년부터 558년까지의 사건이 되어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 이 靺鞨은 철원에 있었던 이름모를 소국으로 추정된다.
 
漢城 함락 전후의 연도 조정
① 백제와 고려는 369년부터 399년까지 31년 동안 15차례나 전쟁을 했으나 400년부터 468년까지 69년 동안은 전쟁 기록이 전혀 없다. ② 472년에 백제는 30여년간 고려와 전쟁을 이어오고 있으니 구원해 달라고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 ③ 백제는 475년에 고려에 한성을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쫓겨가는데 기록은 한성 이북과 예성강에서 고려와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고 되어 있다. 정황에 맞지 않는 이 기록들을 60년 앞당기면 모순이 모두 해소된다.
16818#1248 SHARED
 
-0082 @북유말갈(北有靺鞨) @동유낙랑(東有樂浪)
-0082 @북유말갈(北有靺鞨) @동유낙랑(東有樂浪)
철원은 교통의 요지고 넓은 평야가 있어 한나라가 현을 설치할 때 이곳을 빠뜨리지 않았을 듯하다.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할 때, 이곳은 춘천과 함께 한나라의 군현에서 빠졌을 것이다.
16875 SHARED
 
-0037 三國史記(1145) 高句麗
그 땅(도읍을 삼았던 졸본천 또는 흘승골성)이 靺鞨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靺鞨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 이 당시에는 靺鞨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원래 '이질적인 어떤 종족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훗날 '말갈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변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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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0258 ➔ 0284〜0558 百濟+新羅
-0017〜0258 ➔ 0284〜0558 百濟+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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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0258 ➔  0284〜0558 百濟
-0017〜0258 ➔ 0284〜0558 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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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0258 ➔ 0284〜0558 百濟
▐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靺鞨은 철원에 있었던 이름모를 소국으로 추정된다. 이 靺鞨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과 서로 엮여 있으므로, 樂浪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靺鞨의 기록도 그렇게 해야 한다. 백제의 靺鞨 기록은 258년에서 387년까지 130년 동안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전 -17년부터 258년까지 275년 26회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4년부터 558년까지의 사건이 된다.
16818#30040 SHARED
 
-0017✘ 三國史記 百濟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16965 SHARED
 
-0016✘ 三國史記 百濟
靺鞨²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16967 SHARED
 
-0011✘ 三國史記 百濟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29715 SHARED
 
-0009✘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곤미천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청목산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봉현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29717 SHARED
 
-0008 04✘ 三國史記 百濟
樂浪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6966 SHARED
 
-0006.05✘ 三國史記 百濟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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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29791 SHARED
 
0004✘ 三國史記 百濟
왕이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나 한 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6930 SHARED
 
0022.09✘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述川城을 쳐들어왔다.
2892 SHARED
 
0022.11✘ 三國史記 百濟
또 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랜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14847 SHARED
 
0030✘ 三國史記 百濟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16980 SHARED
 
0031✘ 三國史記 百濟
高木城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6830 SHARED
 
0034.09✘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16932 SHARED
 
0034.10✘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또 甁山柵을 습격하였다.
16933 SHARED
 
0055✘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北鄙를 침범하였다.
16829 SHARED
 
0056✘ 三國史記 百濟
왕이 동부에 명하여 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게 하였다.
16950 SHARED
 
0108✘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牛谷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21049 SHARED
 
0125 ~ 0203 ➔  0425 ~ 0503 新羅
0125 ~ 0203 ➔ 0425 ~ 0503 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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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5 ~ 0203 ➔ 0425 ~ 0503 新羅
▐ 靺鞨은 신라와 얽혀 125년부터 203년까지 79년 동안 8회 나오다 204년부터 395년까지 192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425년부터 503년까지의 사건이 된다. 북유말갈은 철원에 있었고 동유낙랑은 춘천에 있었다면, 신라는 동유낙랑이 망한 337년 이후에 말갈의 침공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이와 부합한다.
16818#29915 SHARED
 
0125.01✘ 三國史記 新羅
말갈이 北境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16796 SHARED
 
0125.07✘ 三國史記 新羅
또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넘어왔다. 왕이 글을 백제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주었다. 적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16797 SHARED
 
0137✘ 三國史記 新羅
말갈이 塞를 침입하여 長嶺의 다섯 목책을 불태웠다.
16878 SHARED
 
0139.08✘ 三國史記 新羅
長嶺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붙잡아가고 노략질하였다.
16808 SHARED
 
0139.10✘ 三國史記 新羅
다시 쳐들어왔는데, 눈이 많이 오는 바람에 물러갔다.
16807 SHARED
 
0140✘ 三國史記 新羅
長嶺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비하였다.
16805 SHARED
 
0142✘ 三國史記 新羅
여러 신하를 불러 말갈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찬 웅선이 불가하다는 말을 올리니, 그만두었다.
16806 SHARED
 
0203✘ 三國史記 新羅
말갈이 境을 침범해 왔다.
16804 SHARED
 
0210.02✘ 三國史記 百濟
赤峴城과 沙道城의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들을 옮겼다.
29871 SHARED
 
0210.10✘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29873 SHARED
 
0214.09✘ 三國史記 百濟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29875 SHARED
 
0214.10✘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와서 述川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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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6✘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29878 SHARED
 
0217✘ 三國史記 百濟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29880 SHARED
 
0220✘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29882 SHARED
 
0229✘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29884 SHARED
 
0258 三國史記 百濟
말갈 추장 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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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8✘ 三國史記 百濟
말갈 추장 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29909 SHARED
 
0284 ❰❰ -0017 「三國誤記」 百濟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16820 SHARED
 
0285 ❰❰ -0016 「三國誤記」 百濟
靺鞨²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16821 SHARED
 
0286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阿且城과 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 부여와 대방이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그 부여를 백제로 착각한 것이다.
16859 SHARED
 
0290
0290
8483 SHARED
 
0290 @위례성(慰禮城)
30203 SHARED
 
0290.02 ❰❰ -0011 「三國誤記」 百濟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16822 SHARED
 
0292 ❰❰ -00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16823 SHARED
 
0293 ❰❰ -0008 04 三國誤記 百濟
樂浪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9743 SHARED
 
0295 ❰❰ -0006.05 三國誤記 百濟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29732 SHARED
 
0295 @철원 @궁예고려의 도성
0295 @철원 @궁예고려의 도성
백제가 北有靺鞨이라 부르던 세력은 백제본기에서 靺鞨連我北境, 靺鞨侵北境 그리고 靺鞨寇北境으로 나타나는데, 백제의 북쪽에 접하여 있으며 변경을 자주 침공하였다. 철원은 대동강에서 영흥만이나 춘천으로 가려면 거쳐가야하는 지역이고 영흥만과 한강 하류를 잇는 추가령구조곡의 가운데에 있기도 하다. 농경에 적합한 평지도 넓어 北有靺鞨이 있었음직하다.
19829 SHARED
 
0295 철원(鐵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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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8 三國史記(1145) 百濟
한나라가 貊人과 함께 쳐들어왔다. 왕이 나가서 막다가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16861 SHARED
 
0300 @칠중성(七重城)
30078 SHARED
 
0300.10 ❰❰ -0001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5984 SHARED
 
0304 ❰❰ 0004.09 「三國誤記」 百濟
왕이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나 한 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6827 SHARED
 
0314.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30208 SHARED
 
0322 ❰❰ 0022.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述川城을 쳐들어왔다.
2814 SHARED
 
0322 @술천(述川)
30202 SHARED
 
0322 ❰❰ 0022.11 「三國誤記」 百濟
또 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랜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16831 SHARED
 
0330 ❰❰ 0030 「三國誤記」 百濟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16833 SHARED
 
0330 @마수성(馬首城)
30071 SHARED
 
0331 ❰❰ 0031 「三國誤記」 百濟
高木城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6834 SHARED
 
0334 ❰❰ 0034.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16835 SHARED
 
0334 ❰❰ 0034.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또 甁山柵을 습격하였다.
16836 SHARED
 
0337 ❰❰ 0037 三國誤記 新羅
髙句麗王無恤 襲樂浪²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東有樂浪이다.
30209 SHARED
 
0337 @동유낙랑(東有樂浪) @춘천
30210 SHARED
 
0355 ❰❰⁵ 0055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北鄙를 침범하였다.
16841 SHARED
 
0356 ❰❰⁵ 0056 「三國誤記」 百濟
왕이 동부에 명하여 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게 하였다.
16842 SHARED
 
0369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니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급히 쳐부수고 5천여 명을 잡았는데 사로잡은 포로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819 SHARED
 
0371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듣고 군사를 浿河 가에 매복시켜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19839 SHARED
 
0371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平壤城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20392 SHARED
 
0375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水谷城을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도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다가 흉년이 들어 하지 못하였다.
29713 SHARED
 
0376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북쪽 경계로 쳐들어왔다.
30079 SHARED
 
0377-10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平壤城을 쳤다.
30086 SHARED
 
0377-11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30088 SHARED
 
0386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30182 SHARED
 
0387 三國史記 百濟
말갈과 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6862 SHARED
 
0389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고 약탈하였다.
30183 SHARED
 
0390 ❰❰³ 0210.02 「三國誤記」 百濟
赤峴城과 沙道城의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들을 옮겼다.
16948 SHARED
 
0390 ❰❰³ 0210.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16852 SHARED
 
0390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고구려를 치라고 명령하니 都坤城을 빼앗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30184 SHARED
 
0391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북쪽 변경의 赤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6863 SHARED
 
0392.07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왕 담덕이 4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막지 못하니, 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을 많이 빼앗겼다.
30185 SHARED
 
0392.10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關彌城을 쳐서 빼앗았다.
30186 SHARED
 
0393.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진무는 몸소 군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石峴城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30187 SHARED
 
0394 ❰❰³ 0214.09 「三國誤記」 百濟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16853 SHARED
 
0394.07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와 水谷城 아래에서 싸워 패하였다.
30189 SHARED
 
0395 三國史記 新羅
말갈이 北邊을 침범하였다. 군사를 내어 그들을 悉直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쉈다.
16864 SHARED
 
0395 @실직(悉直)
30073 SHARED
 
0395.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왕 담덕이 몸소 군사 7,000명을 이끌고 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해 죽은 자가 8,000명이었다.
30190 SHARED
 
0395.11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浿水 전투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漢水를 건너 靑木嶺 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30191 SHARED
 
0396 ❰❰³ 0216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16855 SHARED
 
0397 ❰❰³ 0217 「三國誤記」 百濟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6949 SHARED
 
0398.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내어 漢山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날 밤에 큰 별이 군영 내에 떨어졌는데 큰 소리가 났다. 왕이 매우 꺼려하여 곧 그만 두었다.
30192 SHARED
 
0399.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이 전역에 시달려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치니 호구가 줄어들었다.
30193 SHARED
 
0400 ❰❰³ 022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16856 SHARED
 
0408 ❰❰⁵ 0108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牛谷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16843 SHARED
 
0409 ❰❰³ 022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16857 SHARED
 
0425 ❰❰⁵ 0125.01 三國誤記 新羅
말갈이 北境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16844 SHARED
 
0425 ❰❰⁵ 0125.07 三國誤記 新羅
또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넘어왔다. 왕이 글을 백제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주었다. 적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16845 SHARED
 
0437 ❰❰⁵ 0137 「三國誤記」 新羅
말갈이 塞를 침입하여 長嶺의 다섯 목책을 불태웠다.
16846 SHARED
 
0439.09 ❰❰⁵ 0139 「三國誤記」 新羅
長嶺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붙잡아가고 노략질하였다.
16847 SHARED
 
0439.10 ❰❰⁵ 0139 「三國誤記」 新羅
다시 쳐들어왔는데, 눈이 많이 오는 바람에 물러갔다.
16848 SHARED
 
0442 ❰❰⁵ 0142 「三國誤記」 新羅
여러 신하를 불러 말갈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찬 웅선이 불가하다는 말을 올리니, 그만두었다.
16850 SHARED
 
0468 三國史記 新羅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北邊의 悉直城을 습격하였다.
16865 SHARED
 
0468.02 三國史記 高句麗
왕이 말갈 병력 1만으로 신라의 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17017 SHARED
 
0469 三國史記(1145) 百濟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30195 SHARED
 
0475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궁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30204 SHARED
 
0475~0561 百濟의 남하
0475~0561 百濟의 남하
16971 SHARED
 
0480 三國史記 新羅
말갈이 北邊을 침략하였다.
16866 SHARED
 
0481 三國史記 新羅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北邊에 쳐들어와 狐鳴城 등 7성을 빼앗고, 또한 彌秩夫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泥河 서쪽까지 추격해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6867 SHARED
 
0482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漢山城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16868 SHARED
 
0503 ❰❰⁵ 0203 三國誤記 新羅
말갈이 境을 침범해 왔다.
16851 SHARED
 
0503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馬首柵을 소각하고 髙木城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16869 SHARED
 
0506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침입하여 高木城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16870 SHARED
 
0507.05 三國史記 百濟
髙木城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871 SHARED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0507.10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함께 漢城을 치기 위하여 橫岳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16872 SHARED
 
0507.10 @횡악(橫岳) @삼각산
16944 SHARED
 
0510 ❰❰⁵ 0210.02 三國誤記 百濟
赤峴城과 沙道城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들을 옮겼다.
16890 SHARED
 
0510 ❰❰⁵ 0210.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16891 SHARED
 
0514 ❰❰⁵ 0214.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와서 述川에 이르렀다.
16854 SHARED
 
0516 ❰❰⁵ 0216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16934 SHARED
 
0517 ❰❰⁵ 0217 三國誤記 百濟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6955 SHARED
 
0520 ❰❰⁵ 022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16956 SHARED
 
0524 ❰❰⁵ 0214.09 三國誤記 百濟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16894 SHARED
 
0529 ❰❰⁵ 022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16964 SHARED
 
0548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 왕 평성이 濊와 공모하여 漢北의 獨山城을 공격해왔다.
16873 SHARED
 
0551 - 三國史記(1145) 朔州
朔州는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남쪽이자 예의 서쪽 옛 맥의 땅이며(句麗之東南 濊之西 古貊地) 대개 지금 신라의 북쪽인 朔州다. 선덕왕 6년에 牛首州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한편 문무왕 13년에 首若州를 설치했다고 이른다. 경덕왕이 朔州로 고쳐 삼았다. 지금은 春州이다.
16898 SHARED
 
0551 - 三國史記(1145) 朔州
▐ 40년에 화려와 불내의 신라 침공을 중간에서 막았던 貊國에 대응시킬 수 있다. 맥국은 東有樂浪이 멸망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나며 위치도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東有樂浪과 비슷하기 때문에 東有樂浪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東有樂浪은 지금의 춘천에 있었던 것이 된다.
19797 SHARED
 
0551 百濟와 新羅의 고려침공
▐ 백제 성왕이 직접 백제와 임나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을 되찾고 더 진군하여 평양까지 차지하였는데, 이로써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신라 진흥왕도 거칠부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여 죽령에서 고현에 이르는 10군을 빼앗게 하였다. 이때 철원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던 듯하다. 이를 반영하듯 이후의 기록에는 北有靺鞨²이 나타나지 않는다.
19816 SHARED
 
0551 @북유말갈(北有靺鞨) @동유낙랑(東有樂浪)
0551 @북유말갈(北有靺鞨) @동유낙랑(東有樂浪)
551년의 사건 이후 北有靺鞨²은 삼국사기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나오는 말갈은 勿吉靺鞨¹이다.
30201 SHARED
 
0554 魏書
勿吉國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肅愼國의 지역이다.
16901 SHARED
 
0558 ❰❰⁵ 0258 「三國誤記」 百濟
말갈 추장 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30062 SHARED
 
0565 北齊書(636)
是歲 高麗契丹靺鞨¹並遣使朝貢 고려, 거란 그리고 말갈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해왔다. ▐ 北有靺鞨²이 신라에 흡수되고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의 기록에 靺鞨¹이라는 표기가 나타나 勿吉을 대체하였다. 靺鞨¹은 勿吉과 발음이 비슷해서 勿吉이 변해서 생긴 말로 추정된다.
193 SHARED
 
0598 隋書(636)
元率靺鞨¹之衆萬餘騎寇遼西 營州總管韋沖擊走之
16954 SHARED
 
0598 三國史記(1145) 高句麗 靺鞨
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니 영주 총관 위충이 이를 격퇴하였다. ▐ 이 당시 北有靺鞨²이 있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고 요서 지역을 침공하는 데 동원할 병력으로는 北有靺鞨²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말갈은 勿吉靺鞨¹로 볼 수 밖에 없다. 중국의 기록에 北有靺鞨²이 나온 사례는 보지 못했다.
16958 SHARED
 
0612 隋書(636)
兼契丹之黨 虔劉海戍 習靺鞨¹之服 侵軼遼西
16957 SHARED
 
0612 三國史記(1145) 高句麗 靺鞨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동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16959 SHARED
 
0615+ 海東安弘記
海東安弘記云 九韓者一日夲·二中華·三吳越·四乇羅·五鷹逰·六靺鞨·七丹國·八女真·九穢貊 해동안홍기에 이르기를 9한이란 것은 1 일본, 2 중화, 3 오월, 4 탁라, 5 응유, 6 말갈, 7 단국, 8 여진, 9 예맥이라고 하였다.
19373 SHARED
 
0615+ 海東安弘記
▐ 勿吉이 靺鞨이라 불리기 전부터 우연히 신라인들이 靺鞨이라 부르는 존재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신라인들이 북쪽 변경을 자주 침략해 오던 세력을 靺鞨이라 불렀던 것은, 중국인들이 동북 지역의 勿吉을 靺鞨라 부르던 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獫狁은 원래 중국인들이 북방 유목민을 가리키던 말인데 백제는 중국에 보낸 문서에서 자신을 자주 침공해오던 고려를 가리켜 獫狁이라 했다. 신라의 靺鞨도 같은 경우라 볼 수 있다.
19795 SHARED
 
0645 新唐書(1060)
帝曰 虜墮吾策中矣 命左衛大將軍阿史那社尒以突厥千騎嘗之 虜常以靺鞨¹銳兵居前 社尒兵接而北 태종은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을 이끌고 가서 유인하게 하였다. 고구려가 늘 말갈의 예병을 앞세우므로 사이의 군사가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16953 SHARED
 
0645 舊唐書(945)
高麗北部傉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貞率高麗·靺鞨¹之衆十五萬來援安市城 고려의 북부녹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정이 고려·말갈의 무리 15만명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16951 SHARED
 
0645 舊唐書(945)
太宗簡傉薩以下酋長三千五百人 授以戎秩 遷之內地 收靺鞨¹三千三百 盡坑之 餘衆放還平壤 태종은 녹살 이하 추장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군직을 주어서 내지로 옮겼다. 말갈 사람 3천 3백명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평양으로 돌려 보냈다.
16952 SHARED
 
0655 舊唐書(945)
六年 百濟與高麗靺鞨¹率兵侵其北界 攻陷三十餘城 春秋遣使上表求救
16811 SHARED
 
0655 舊唐書(945)
六年 新羅王金春秋又表稱百濟與高麗靺鞨¹侵其北界 已沒三十餘城
14996 SHARED
 
0655 三國史記(1145) 新羅 靺鞨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다.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 北有靺鞨²은 551년에 신라가 차지하였고 고려가 勿吉靺鞨¹을 전쟁에 동원한 것은 598년의 기록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 기록의 말갈도 勿吉靺鞨¹로 볼 수 밖에 없다.
16874 SHARED
 
0658 三國史記(1145) 新羅 靺鞨
王以何瑟羅地連靺鞨²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왕이 하슬라의 땅이 말갈에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을 폐지하여 주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을 북진으로 삼았다. ▐ 北有靺鞨²은 395년에 신라의 北邊에 쳐들어와 悉直의 들판에서 교전한 바 있고 468년에도 고려와 함께 쳐들어와 北邊의 悉直城을 공격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말갈도 北有靺鞨²이다.
17015 SHARED
 
1060 新唐書
黑水靺鞨¹은 肅慎 땅에 있는데 挹婁라고도 하며 탁발魏 때는 勿吉이라고도 불리었다.
16902 SHARED
 
1145 三國史記 靺鞨(90)
5987 SHARED
 
1156 松漠紀聞
女真即古肅慎國也 東漢謂之挹婁 元魏謂之勿吉 隋唐謂之靺鞨 여진은 옛 숙신국이다. 동한은 읍루라 했고 탁발위는 물길, 수당은 말갈이라 했다. ▐ 肅慎 ➔ 挹婁(東漢) ➔ 勿吉(元魏) ➔ 靺鞨(隋唐) ➔ 女真(趙宋)
16900 SHARED
 
東有樂浪(貊國)
삼국사기(1145)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낙랑은 樂浪郡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낙랑은 336년, 314년 그리고 304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299년에 백제를 침공했으며 295년에 백제에 의해 東有樂浪이라 불리웠고 293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했다. 이것이 두번째 의미의 樂浪이다. 東有樂浪이 맥고려에 의해 멸망당한 후 비슷한 위치에서 貊國이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나라로 추정한다.
16889 SHARED
 
樂浪郡
樂浪郡은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군이다. 313년까지 400여년간 대동강 유역에 존속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의미의 樂浪이다.
29711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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