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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0343~0427 ❸ 高麗의 南下 |
313년과 314년에 각각 樂浪과 帶方을 병합한 고려는 342년에 모용 선비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丸都城이 파괴되자 이듬 해에 平壤 동쪽의 黄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즈음 백제도 예성강 유역까지 차지한 듯하다.
369년부터 고려는 백제의 예성강 유역을 침공하기 시작했는데, 371년에는 패해서 다시 도읍을 國內城으로 옮기기도 했지만, 399년 즈음에는 백제의 탈환 의지를 꺾고 임진강 유역까지 완전히 차지하였고, 427년에는 도읍도 平壤으로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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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晉書(648) 幽州 (7군국 34현 59020호)
范陽國(涿, 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燕國(薊, 安次, 昌平, 軍都, 廣陽, 潞, 安樂, 泉州, 雍奴, 狐奴)┆北平郡(徐無, 土垠, 俊靡, 無終)┆上谷郡(沮陽, 居庸)┆廣甯郡(下洛, 潘, 涿鹿)┆代郡(代, 廣昌, 平舒, 當城)┆遼西郡(陽樂, 肥如, 海陽)
196#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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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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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晉書(648) 平州 (5군국 26현 18100호)
昌黎郡(昌黎, 賓徒)┆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樂浪郡(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196#3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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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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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晉書(648) 平州
우임금 시절을 상고해 보면 기주 지역은 周의 유주가 되었고 漢의 우북평군과 접하였다.
後漢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하였고 그의 아들 강, 강의 아들 문의가 멋대로 요동을 점거하고 동이 9종을 모두 복종시켰다.
曹魏가 동이교위를 양평에 두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갈라 평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를 만들었다. 문의가 죽자 나중에 호동이교위를 양평에 두었다.
276년 10월에 평주를 설치하였다.
196#1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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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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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 晉書(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秦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196#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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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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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 晉書(648)
时二京倾覆幽冀沦陷廆刑政修明虚怀引纳流亡士庶多襁负归之廆乃立郡以统流人冀州人为冀阳郡豫州人为成周郡青州人为营丘郡并州人为唐国郡
두 서울이 무너지고 유주와 기주가 함락되었는데 모용외가 형벌을 밝게 하고 마음을 비워 사람들을 끌어안으니 떠돌던 많은 선비와 서민들이 아이를 업거나 짐을 지고 그에게 귀부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군을 세워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니 기주인은 기양군, 예주인은 성주군, 청주인은 영구군 그리고 병주인은 당국군에 속하게 했다.
196#9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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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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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資治通鑑(1084)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 350여년 전의 낙랑 목간에는 낙랑 인구의 14%인 4만여 명이 한족이었다. 1천여가는 5천에서 1만 정도의 인구이니, 이때 모용선비로 옮겨간 한족은 일부분이었다.
196#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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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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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8 遼寧省錦州市義縣
조선령 창려 손영은 무리를 거느리고 후조를 막았다. 대성 왕청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후조에 호응하니 왕청 등의 목을 베었다. 함께 모의한 수백명이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죄를 청하니 손영은 이들을 모두 풀어주고 함께 막고 지켰다. 낙랑 태수 국팽이 자신의 경내 무리들이 모두 배반하자 향리에서 장사 200여명을 뽑아 함께 극성으로 돌아왔다.
▐ 義縣의 西北에 棘城이 있었다.
196#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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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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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5 三國史記(1145) 高句麗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 征東大將軍은 2품이다.
자사는 주의 행정 장관인데 영주는 전연때 사용되지 않은 지명이어서 營州刺史가 허구의 관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公은 5등급 작위다.
196#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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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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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7 冬壽墓
冬壽 -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
▐ 동수는 요동 사람이다. 낙랑, 창려, 현도 그리고 대방은 晋의 평주 5군국 중 요동을 제외한 4군이다. 낙랑과 대방은 고려가 병합했지만 그 나머지는 모용선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용선비는 낙랑과 대방의 유민도 받아 따로 낙랑군을 설치한 바 있다. 동수는 336년에 고려로 망명하였는데 이 관작은 그 전에 모용선비에 있을 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6#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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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
고려가 314년에 대방군을 멸망시킬 때, 백제는 그 남부인 예성강 유역을 차지한 듯하다.
고려는 342년에 모용씨의 침공을 받아 도읍이 파괴되는데, 이듬해에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은 백제와 가까웠으므로, 이때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내려 한 듯하다.
고려와 백제의 충돌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6#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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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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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三國史記 百濟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髙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고려는 도읍을 다시 국내성으로 옮겼다.
196#2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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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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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廣開土王陵碑(414)
①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②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③ 六年 王躬率□軍討伐殘國
④ 九年 百殘違誓與倭和通
⑤ 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
⑥ 十年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⑦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
⑧ 十四年 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 王躬率□□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斬煞無數
196#2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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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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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 ↶ 廣開土王陵碑 ①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 백제가 고려의 속민이었을 리는 없다. 백제는 371년에 평양을 침공하여 고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었다.
고대의 기록을 보면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상대가 과거 자기 나라의 땅이었다거나 자기 나라의 속국이었다는 이유를 대는 경우가 많다.
①은 ②와 함께 ③의 명분을 강화시켜준다.
196#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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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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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 廣開土王陵碑 ②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런데 왜가 391년에 □을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자 □□ 신라는 신민이 되었다.
▐ 永樂1년에 있었다는 이 이야기는 永樂5년과 永樂6년의 기록 사이에 들어와 永樂6년에 있었던 백제 정벌의 배경이 되고 있다.
아래 ④의 경우처럼 이 사건은 단지 396년 이전에 있었지만 광개토왕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의 즉위년인 辛卯年의 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
19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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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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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01 三國史記(1145)
九年春遣使新羅修好新羅王遣姪實聖為質
9년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사이좋게 지내니 신라 왕이 조카 실성을 보내서 인질로 삼았다.┆三十七年春正月髙句麗遣使王以髙句麗強盛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나물 이사금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신라가 왜의 신민 상태가 되어 있었다면 고려에 기대어 볼 계산으로 볼모를 보냈을 것이다. 新羅以爲臣民
196#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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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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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10 @관미성 @關彌城
▐ 백제의 石峴等十餘城은 고려와의 사이에 있는 임진강과 북유말갈과의 사이에 있는 한탄강을 따라 수축되어 있었을 듯하다.
여기에 關彌城까지 더하면 386년에 서해에서 靑木嶺을 거쳐 八坤城까지 구축했다는 관방에 어울린다.
이 일대를 모두 빼앗긴 것은 백제의 안보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진사왕의 소극적인 대처에 책임을 물을 만하다.
196#3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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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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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11 辰斯→阿花
❶ 日本書紀(720) 0272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紀角宿禰는 백제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❷ 三國史記(1145) 0392 辰斯王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阿莘王이 왕위를 이었다.
196#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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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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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11 辰斯→阿花
▐ 385년에 침류왕이 죽자 왕자 아화(아신)이 어려 숙부인 진사가 왕이 되었는데, 392년에 그 진사왕도 갑자기 죽자 아화(아신)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한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고만 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왜가 사신을 보내 왕을 교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였다(來渡□破百殘)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196#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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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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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3.08 三國史記 百濟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진무는 몸소 군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石峴城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196#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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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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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5.11 三國史記 百濟
왕이 浿水 전투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漢水를 건너 靑木嶺 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386년에 관방을 설치할 때, 靑木嶺으로부터 북으로는 八坤城에 닿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靑木嶺은 적성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어울린다. 이곳을 넘으면 임진강을 건너는 여울이 있다.
196#2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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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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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 ③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96#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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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
...
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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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96#10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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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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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廣開土王陵碑 ④
九年 百殘違誓與倭和通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 397년에 백제가 왜에 왕자를 볼모로 보낸 사실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하므로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고정한다. 광개토왕릉비에 백제와 왜가 399년에 화통하였다는 부분은 잘못 알고 있거나 광개토왕이 399년에 평양으로 행차한 배경으로 397년의 사건이 끼워진 것이다.
196#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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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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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 廣開土王陵碑 ⑤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 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遣使還告以□計
왕이 평양에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96#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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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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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廣開土王陵碑 ⑥
十年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신라와 남가라를 잇는 육로는 양산단층이다.
196#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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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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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廣開土王陵碑 ⑧
▐ 광개토왕릉비는 396년에 백제를 대파하여 복종을 받아냈다고 하나 백제는 이내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또 400년에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와 가라에 들어온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나 404년에 왜군은 고려의 대방을 직접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01년에 고려에 가 있던 신라의 볼모가 돌아오고 이듬해에 신라는 왜에 볼모를 보냈다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공적에는 허세가 있는 듯하다.
196#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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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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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이덕일의 영산 왜
가운데 그림은 영산강 유역에 왜가 있었다는 이덕일의 가설이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왜가 391년에 바다를 건너왔고 399년에는 신라를 점령한 상태였으며 400년에는 그 신라 점령군이 고려에 쫓겨 임나가라로 퇴각하였고 404년에는 대방을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반도에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설정해야 자연스러우며 그 주둔지로는 영산강 유역이 가장 자연스럽다.
196#1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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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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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436 北燕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196#1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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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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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기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광개토왕릉비를 만들 때에는 이미 중원의 신화와 전설이 고려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196#14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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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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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낙랑 천도
고려는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자 이듬해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371년에 백제의 침공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자 다시 환도성으로 되돌아갔다. 고려는 광개토왕때 백제를 여러 차례 격파한 후에야 장수왕이 마침내 평양으로 도읍을 다시 옮길 수 있었다. 313년에 낙랑을 병합한 후 100여년만의 일이다.
196#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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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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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최연식의 주장
반파란 국명을 넣어 해석을 시도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渡伴破百殘合攻新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반파로 건너오자 백제가 그들과 함께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았다.
▐ 문제점, (1) 반파(伴跛,叛波)는 513년 이후 기록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국명이다. (2) 반파는 가라와 함께 사용된 예가 없다. (3) 渡의 목적어로 국명이 오는 게 자연스런 문장인가? (4) '그들과 함께 침공하다'란 뜻이 두 글자에 담길 수 있나?
196#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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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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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9 谷井 濟一 기록
1913년 일본인 학자들이 고구려 유적을 조사할 때, 현지의 중국인 초붕도가 1900년대부터 석회를 발라 마모된 글자를 재현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찍은 사진에는 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가 나오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일본이 초붕도처럼 석회를 발라 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을 날조했다는 주장이 또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조작했다면, 왜 369년으로 해서 일본서기와 일치시키지 않고 391년으로 해서 일본서기와 어긋나게 했을까?
196#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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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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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 분석
먼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392년과 397년의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고정한다. 각각 '왜가 백제의 왕을 교체했다'는 이야기와 '백제가 왜에 볼모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어서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396년의 사건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고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58성을 빼앗아갔다'는 이야기다. 광개토왕릉비의 나머지 기록은 이 사실들에 맞추어 해석한다.
196#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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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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