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2.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 > (5) historiography - 시조

나라의 시조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신라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셨고 왕고는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셨으며 이조는 추모와 기자에 단군을 더했다. 신라의 후속국인 왕고가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신 건 고려계승이라는 왕조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중원에 기대어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가 단군을 더한 것은 새로이 생겨나 퍼져나간 단군설화를 반영한 것이다. 기자동래설과 단군조선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고려는 한국사가 아니다.
 
BC 0018 삼국사기(1145)
元年夏五月立東明王廟 온조왕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 여기에 나오는 동명은 고려의 시조 추모가 아니라 부여의 시조 동명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의 시조 추모가 동명으로 인식된 것은 후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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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삼국사기(1145)
신라 종묘의 제(制)는 제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 시조 혁거세의 묘당을 세웠다. 사계절로 제사지내고 친누이 아로로써 제사를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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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 삼국사기(1145)
다루왕 2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의 묘에 아뢰었다. 책계왕 2년 봄 정월·분서왕 2년 봄 정월·계왕 2년 여름 4월·아신왕 2년 봄 정월·전지왕 2년 봄 정월에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동명 또한 온조왕 원년에 나오는 동명과 같이 고려의 시조 추모가 아니라 부여의 시조 동명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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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8 삼국사기(1145)
신대왕 4년 가을 9월에 졸본에 이르러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고국천왕 원년 가을 9월, 동천왕 2년 봄 2월, 중천왕 13년 가을 9월, 고국원왕 2년 봄 2월, 안장왕 3년 여름 4월·평원왕 2년 봄 2월·건무왕 2년 봄 4월에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시조는 추모로 보아야 한다. 백제와 달리 고려는 부여의 시조를 숭배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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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일찍이 기자가 조선에 가서 8조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漢 무제는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부터 胡族과 漢族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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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0247) 삼국사기(1145)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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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魏 給事君夫人 王氏의 墓誌
中國 河南省 洛陽. 부인 왕씨는 낙랑 수성인(遂城人)이다. 燕 儀同三司 武邑公 波의 6世孫이며, 우리 왕조(北魏)의 幽·營二州刺史 廣陽靖侯 道岷의 第3女이며, 翼·齊二州刺史燕郡康公 昌黎人 韓麒麟의 外孫이다. 其辭에 이르기를, 樂浪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王氏는 이름 있는 宗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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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大魏 給事君夫人 韓氏의 墓誌
中國 河南省 洛陽. 부인 한씨는 수성인(遂城人)이다. 燕나라 儀同三司 武邑公 波의 6世孫이며, 우리 왕조(北魏)의 幽·營二州刺史 廣陽靖侯 道岷의 第2女이며, 翼·齊二州刺史 燕郡康公 昌黎人 黃麒麟의 外孫이다. 其辭에 이르기를, 樂浪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韓氏는 이름 있는 宗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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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魏 故 恒州治中 晉陽男 王君 墓誌銘
中國 河南省 洛陽. 군(君)의 휘(諱)는 禎이요, 자(字)는 宗慶이며, 낙랑 수성인(遂城人)이다. 燕나라의 儀同三司 武邑公 波의 6世孫이다. 殷나라에 三人의 어진 신하가 있어, 周나라 武王은 九疇를 물었다. 단지 그 族이 姓을 王氏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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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魏 故 處士 王君 墓誌銘
中國 河南省 洛陽. 君의 諱는 基이고, 字는 洪業이며, 낙랑 수성인(遂城人)이다. 그 先祖는 殷으로부터 나왔으니 周武王이 商을 정복하고 箕子를 朝鮮에 봉하였는데, 子孫이 이로 因하여 姓氏를 삼았다. 6世祖 波는 燕나라의 儀同三司 武邑公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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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의 시조
신라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고 백제는 동명, 고려는 추모를 시조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의 시조는 기자로 인식되었고 조선을 이은 낙랑에는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는 왕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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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ᑅ 구당서(945)
고려의 풍속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아 영성신, 일신, 가한신 그리고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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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ᑅ 구당서(945)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는 사건은 BC 1046년경이다. 그러나 고려의 풍속에는 기자를 숭배했다는 기록이 구당서(945)에 와서야 나타난다. 고려의 건국 설화는 원래 추모 설화이고, 이 설화는 내용 상 기자 숭배와 병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고려의 기자 숭배는 평양천도 이후에 낙랑의 풍습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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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삼국사기(1145)
평양 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의 적의·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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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ᑀ 추모왕릉
추모왕은 왕망의 장수 엄우가 유인하여 살해하고 그 머리를 잘라 장안에 보냈다. 따라서 추모왕의 장례는 시신 없이 이루어졌다. 추모왕이 죽을 때는 고려의 수도가 국내였고 평양은 낙랑군이었으므로 추모왕의 무덤은 평양에 있을 수 없다. 신대왕은 168년에 졸본에 있는 시조묘에 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는 도읍을 343년에 평양으로 옮겼다가 371년에 국내로 되돌아온 적이 있고 427년에 다시 옮긴 뒤에는 망할 때까지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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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ᑀ 추모왕릉 위성지도
평양천도 이후 추모왕의 무덤이 평양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평양은 905년에 평양성주 검용이 궁예고려에 항복해오며 궁예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왕씨고려는 고려의 발상지를 평양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추모왕의 무덤도 평양에서 찾았을 것이다. 지금 추모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은 이때부터 추모왕릉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자릉과 단군릉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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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고려사(1451)
(후당으로부터 받은 조서의 일부)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왕건은 주몽의 계토지정을 따라 군장이 되었고 기자의 작번지적을 밟아 사랑과 평화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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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고려사(1451)
왕씨고려는 신라와 차별되는 독자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계승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국조의 자리는 신라의 혁거세에서 고려의 동명으로 바뀌었다. 왕고는 더 나아가 낙랑고려의 기자 숭배까지 이어받았다. 이는 중원의 왕조에게 자신과 중원과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민족들에게는 중원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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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고려사(1451)
加平壤 木覓橋淵道知巖東明王等神勳號.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렸다. -- 여기에 나오는 동명은 부여의 시조가 아니라 고려의 시조 추모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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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5 고려사(1451)
(거란이 압록강 부근에 전투용 방책을 설치하자 이에 항의하며 보낸 국서의 일부) 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우리나라는 기자의 나라를 물려받아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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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2 고려사(1451)
(송나라로부터 받은 칙서의 일부) 箕子啓封 肇於遼左 僧伽演敎 追在泗濱 원래 기자는 요동에 봉토를 받아 나라를 열었고 승가는 사수가에서 불교를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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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고려사(1451)
禮部奏 我國敎化禮義 自箕子始 而不載祀典 乞求其墳塋 立祠以祭 從之 예부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에 교화되기는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는 빠졌사오니 무덤을 찾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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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ᑀ 기자릉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고,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2천년 후에 발견되는 일도 믿기 힘들다.
5383
 
1102 ᑀ 기자릉
9101
 
1102 ᑀ 기자릉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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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고려사(1451)
숙종이 사자를 보내 동명성제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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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고려사(1451)
동지추밀원사 허경을 보내 평양 목멱산에 있는 동명왕의 신사에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흥복사·영명사·장경사·금강사 등의 절에 문두루도량을 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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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기자서여(箕子胥餘)가 주(周)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진 후 자성(子姓)이 8백여 년을 내려오다 한(漢) 고조 12년(B.C.195)에 연(燕)나라 위만이 추결(椎結 상투)하고 와서 조선왕이 되었다. 한편 부여의 주몽이 흘승골성에 와서 그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驪)’라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소속시켰는데 점점 자라나 왕을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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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海東에 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다. 기자가 周 왕실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부터 漢 초에 위만이 스스로 왕을 칭할 때까지 세월의 흐름이 매우 오래되었지만, 문자기록이 소략하여 상세하게 고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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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삼국지에는 위만 이전에 기자의 후손이 준왕에 이르기까지 왕조를 이어왔었다는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삼국지와 전혀 다른데, 만약 김부식이 삼국지의 기록을 인정했다면 삼국사기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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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8 고려사(1451)
서경의 공해전을 차등을 두어 다음과 같이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유수관은 공해전 50결과 지위전 270결 37부 7속, 육조는 공해전 20결과 지위전 15결, 법조사는 공해전 15결, 각 학원은 공해전 15결과 서적위전 50결, 문선왕(공자)은 유향전 15결, 선성(先聖)은 유향전 50결【선성은 바로 기자(箕子)다】, 약점은 공해전 7결, 승록사는 공해전과 지위전 각 15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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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 고려사(1451)
(금나라로부터 받은 조서의 일부) 粤箕子之故區 寔卞韓之舊壤 根本固而所庇者久 枝葉茂而其承者蕃 옛날 기자가 다스린 지역이며 옛 변한의 땅인 고려는 근본이 튼튼한 까닭에 오래토록 잘 보호되어 왔으며, 왕족이 번성한 까닭에 대대로 왕업이 이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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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8 고려사(1451)
찬성사 원부 등을 시켜 성용전·동명묘 및 평양의 목멱묘 등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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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경(經)에는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 (朝鮮)이라 했으니 고[高,요임금]와 같은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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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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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당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漢이 3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 낙랑(樂浪)· 대방(帶方, 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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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단군기(檀君記)에 이르기를 “군(君)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상관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이다.”라고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異母兄弟)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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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였다.(經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한 백악이라고도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했으니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인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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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본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본기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었다. 환인이 환웅에게 말하기를 '지상의 삼위태백에 내려가 인간을 크게 이롭게 하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환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 왔으니 이 분을 단웅천왕이라 한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이라 했다. 조선의 땅을 차지하여 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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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단군신화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대체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표준으로 여긴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도 요긴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신라와 고려를 조선과 연결시켜주는 부분이다.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은 시조가 각각 혁거세, 추모 그리고 기자였다. 제왕운기의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 그리고 맥은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시대였다'는 구절은 뿌리가 다른 이 나라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제왕운기 외에는 이런 역할을 하는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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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 고려사(1451)
왕이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을 참배한 후 평양군사, 동명왕묘, 목멱묘에 각각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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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 고려사(1451)
기자가 우리나라에 봉해진 때로부터 예악과 교화가 비로소 시행되었으니 평양부에 지시해 그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게 할 것이다. -- 1102년에 기자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로 했고 1178년에는 기자에게 제사지낼 비용으로 토지 50결을 배분한 바 있다. 몽골 침략기에 유실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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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 조연수묘지명(趙延壽墓誌銘)
평양(平壤)의 선조는 仙人 王儉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백성이 남아 있으니 당당한 사공(司空)이 그 분이시네. 평양의 군자는 三韓 전부터 있으면서 수명이 천 년을 넘고 장수하여 신선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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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 고려사(1451)
기자는 우리 땅에 봉해져 지금까지 우리가 그 교화와 예악의 은택을 받고 있으니 평양부로 하여금 그 사당을 수축해 제사를 지내게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충의의 인물들에 대한 제사도 모두 옛날처럼 지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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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고려사(1451)
곽영석이 귀국하는 길에 평양을 지나다가 기자의 사당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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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 고려사(1451)
지밀직사사 홍사범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촉(蜀)지역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 儻容互鄕之童, 得齒虞庠之胄, 臣謹當奉揚聲敎, 永綏 箕子 之封, 罄竭忠誠, 益貢華人之祝. 우리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상국의 학생들과 나란히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폐후의 덕화를 높이 받들어 옛날 기자의 봉토였던 이 땅을 길이 잘 다스리고 상국에 충성을 다할 것이며 폐하의 복록과 만수무강을 빌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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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 고려사(1451)
(왕고의 관원들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들은 교시의 일부) 我是一个農家 與我中原作主 恁是 箕子之國新羅樂浪郡相敵 擄了平百姓 如今恁便都做了恁的奴婢 나는 일개 농민으로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대는 기자의 나라, 신라, 낙랑군에 비견될 수 있으며 그들이 지배했던 백성들은 지금 모두 그대의 노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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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조선왕조실록
예조 전서 조박 등이 상서하였다.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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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 조선왕조실록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아래는 이에 대해 이성계가 올린 표문의 일부다.) 竊惟昔在箕子之世 已有朝鮮之稱 玆用奏陳 敢干聰聽 兪音卽降 異渥尤偏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천자의 대답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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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 조선왕조실록
하윤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의 단군(檀君)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참상하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祀典)에 싣고, 춘추(春秋)에 제사를 드리어 숭덕(崇德)의 의를 밝혀야 합니다. 또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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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 조선왕조실록
예조에서 상서하여 사전(祀典)을 여러 조목 진달하였다. “삼가 당(唐)나라 예악지를 보니, 옛 선제왕들을 아울러 중사(中祀)에 두었고, 국조에서도 선농·선잠·문선왕을 중사에 두었으니, 단군(檀君)·기자(箕子)·전조 태조(前朝太祖)를 마땅히 중사에 올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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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 조선왕조실록
기자 사당(箕子祠堂)을 배알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자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檀君)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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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 단군사당
단군 이야기는 왕씨고려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왕조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이씨왕조부터다. 1392년부터 기자와 함께 단군을 국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12년부터 평양성 안에 있는 기자 사당에 단군 신위를 함께 모시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425년에는 단군 사당을 따로 건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29년에 기자 사당 남쪽에 따로 사당을 만들어 동쪽에는 동명을 모시고 서쪽에는 단군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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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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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기자묘가 부성 북쪽 토산 위에 있는데, 정자각·석인·석양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은 성안 의리방에 있다.【봄·가을에 향축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금상(세종) 12년 경술에 유사에 전지하기를, “예전에 무왕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를 우리 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물 예악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
41572 COMMENT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단군 사당(檀君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금상(今上)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하게 하였다.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
41524 COMMENT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동명왕묘가 부(府) 동남쪽 30리 되는 중화 용산에 있다.【화반석으로 광(壙)을 영조하였다. 진주묘라 한다. 이승휴가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에 돌아오지 않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인리방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도 또한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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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옆에 영명사가 있으니, 곧 동명왕의 구제궁이다. 안에 기린을 기르던 굴이 있는데, 후인이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굴 남쪽 백은탄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조천석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 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에 주사하였다.” 한다. 이승휴가 이르기를, “천상을 오가며 천정에 나아가니, 조천석 위에 기린이 날쌔도다.”한 것은 곧 이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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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_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1) 여기서의 동명은 부여의 시조가 아니라 고려의 시조 추모를 말한다. (2) 추모왕 때는 평양이 낙랑군이었다. 따라서 평양에 있는 추모왕릉은 평양천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추모가 평양에서 기린을 길렀다는 등의 이야기도 평양천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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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江東縣) 대총(大塚),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도마산(刀亇山)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皇帝)의 무덤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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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ᑀ 단군릉
단군이 없었으니 단군릉도 있을 수 없다. 한국의 학자들은 이 릉을 낙랑고려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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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ᑀ 단군릉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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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이후 묘향산지(妙香山誌)
第代朝記云 桓仁之子桓熊 降于太白山神檀下居焉 熊一日與白虎交通生子 是謂檀君 ‘제대조기’에 의하면, 환인의 아들이 환웅이고 태백산의 신단 아래로 내려와 살았다. 한웅이 어느날 백호와 교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단군이시고, 우리 동방에 요임금과 같은 해에 나라를 세우신 군장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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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 조선왕조실록
기자(箕子)의 후손을 거두어다 기용하고 해마다 강동(江東)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平壤)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모두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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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안정복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동방이 병화를 여러 번 겪어서 비장된 국사가 죄다 없어져 남은 것이 없었으나, 승려가 적어 둔 것은 암혈 가운데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므로, 역사를 짓는 이들이 적을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끝에 이를 정사에 엮어 넣는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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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 조선왕조실록
단군(檀君)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을 수호(守護)할 호(戶)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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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조선왕조실록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변변치 않은 말이나마 굽어 살피시고 조정의 의논을 널리 모으시어 특별히 본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강동의 단군묘도 기자와 동명왕 두 능의 예에 따라 똑같이 숭봉하게 하여 성인을 받드는 뜻을 밝히고 백성들의 기대를 위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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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단군릉
원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단군묘로 처음 나타난다. 이후 왕조에서 수리를 하고 수호인을 두었는데, 단군릉으로 승격되어 기자릉 및 동명왕릉과 같은 격이 된 것은 1900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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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대동사강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순종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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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ᑅ 최남선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한족은 항상 주변 종족의 선조와 한족 조보(祖譜)를 연계시켜 종조화(宗祖化)한다”고 했다.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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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이병도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 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1-1.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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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조선통사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이다. 이 신화에서는 왕을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것과 같은 계급사회 특히 노예제도 사회에서의 사회적 관계, 통치계급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신화는 환상적이며 비과학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나 우리 민족의 원시공동체사회 말기, 노예사회 초기의 역사와 함께 당시 사회경제형편과 생활, 사람들의 소박한 의식과 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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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공산주의의 몰락과 단군릉
김조의 경우 처음에는 단군 이야기를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로 보았다. 당연히 단군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는데 1993년에 단군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발굴하고나서는 태도가 돌변했다. 거기서 나온 인골의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서기전 3100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며 단군의 유골이라 주장하고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여 거대한 사각뿔 형태의 돌무덤을 만들었다. 이렇게 김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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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국사교과서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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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고조선역사 개관
신화적 인물에서 실제 역사적 인물로 전환된 단군의 출생에 대해 환웅은 하늘신을 믿던 종족의 공동체 추장을, 웅녀는 곰씨족의 추장 여인을 형상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환웅과 웅녀의 결혼에 대해 곰씨족 추장이 하늘신을 숭배한 종족의 추장과 혼인한 사실을 그린 것인 동시에 이 두 종족 들이 종족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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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송호정
단군은 만들어진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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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희근
(1) 만들어진 고조선상 - 소중화주의자들의 역사의식이 만들어낸 우상, (2) 역사상 존재하지도 않았던 기자조선 - 한나라 이후 중화주의자들의 역사 조작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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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고조선 건국신화’ 역사에 편입
교육인적자원부가 단군왕검 신화를 역사로 편입하고 고조선이 기원전 2000년쯤에 시작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됐다는 점을 고교 역사교과서에 명시한 것은 그동안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시기적으로 단절된 우리 역사의 간극을 메운다는 의미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한민족의 기원을 분명히 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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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김운회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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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후손
청주한씨(淸州韓氏)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행주기씨(幸州奇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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