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343~0427 ❸ 高麗의 南下

313년과 314년에 각각 樂浪과 帶方을 병합한 고려는 342년에 모용 선비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丸都城이 파괴되자 이듬 해에 平壤 동쪽의 黄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즈음 백제도 예성강 유역까지 차지한 듯하다. 369년부터 고려는 백제의 예성강 유역을 침공하기 시작했는데, 371년에는 패해서 다시 도읍을 國內城으로 옮기기도 했지만, 399년 즈음에는 백제의 탈환 의지를 꺾고 임진강 유역까지 완전히 차지하였고, 427년에는 도읍도 平壤으로 다시 옮겼다.
 
0348 張撫夷 - 帶方太守
196#32707 SIBLINGS CHILDREN 32707
 
0353 佟利 - 遼東韓玄菟太守領
196#32708 SIBLINGS CHILDREN 32708
 
0357 冬壽 - 樂浪相 昌黎玄菟帶方太守
196#32709 SIBLINGS CHILDREN 32709
 
0369 고려 ▼ 백제 雉壤
196#1650 SIBLINGS CHILDREN 1650
 
0371 고려 ▼ 백제 浿河
196#1736 SIBLINGS CHILDREN 1736
 
0371 백제 ⬆ 고려 平壤城
196#1740 SIBLINGS CHILDREN 1740
 
0373 백제, 青木嶺에 축성
196#1754 SIBLINGS CHILDREN 1754
 
0375 고려 ▼ 백제 水谷城
196#1755 SIBLINGS CHILDREN 1755
 
0377 백제 ⬆ 고려 平壤城
196#1756 SIBLINGS CHILDREN 1756
 
0386 백제, 關防 설치
196#21900 SIBLINGS CHILDREN 21900
 
0390 백제 ⬆ 고려 都坤城
196#1759 SIBLINGS CHILDREN 1759
 
  0391.05 고려 고국양왕 → 광개토왕
0391.05 고려 고국양왕 → 광개토왕
196#21906 SIBLINGS CHILDREN 21906
 
0392.01 신라, 고려에 인질을 보내다.
196#21880 SIBLINGS CHILDREN 21880
 
0392.07 고려 ▼ 백제 石峴等十餘城
196#21897 SIBLINGS CHILDREN 21897
 
0392.10 고려 ▼ 백제 關彌城
196#21899 SIBLINGS CHILDREN 21899
 
  0392.11 백제 진사왕 → 아신왕
0392.11 백제 진사왕 → 아신왕
196#21877 SIBLINGS CHILDREN 21877
 
0393.08 백제 아신왕① ⬆ 고려 關彌城
196#21881 SIBLINGS CHILDREN 21881
 
0394.07 백제 아신왕② ⬆ 고려 水谷城
196#21882 SIBLINGS CHILDREN 21882
 
0395.08 백제 아신왕③ ⬆ 고려 浿水
196#21883 SIBLINGS CHILDREN 21883
 
0395.11 백제 아신왕④ ⬆ 靑木嶺에서 회군
196#21884 SIBLINGS CHILDREN 21884
 
0396 고려 ▼ 백제
196#21885 SIBLINGS CHILDREN 21885
 
0397 백제, 왜에 인질을 보내다.
196#21891 SIBLINGS CHILDREN 21891
 
0397 백제 違誓與倭和通
196#21886 SIBLINGS CHILDREN 21886
 
0398 백제 아신왕⑤ ⬆ 漢山 북쪽에서 회군
196#21887 SIBLINGS CHILDREN 21887
 
0399 고려 王巡下平穰
196#21888 SIBLINGS CHILDREN 21888
 
0399.08 백제 아신왕⑥ ⬆ 준비
196#21905 SIBLINGS CHILDREN 21905
 
0400 고려 ▼ 왜(신라·임나)
196#21889 SIBLINGS CHILDREN 21889
 
0402 신라, 왜에 인질을 보내다.
196#21892 SIBLINGS CHILDREN 21892
 
0404 왜 ⬆ 고려 帶方
196#21890 SIBLINGS CHILDREN 21890
 
0408 鎭 - 遼東太守 幽州刺史
196#32710 SIBLINGS CHILDREN 32710
 
  高麗의 南下
高麗의 南下
196#21903 SIBLINGS CHILDREN 21903
 
-0082 後漢書(445)
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196#10924 SIBLINGS CHILDREN 10924
 
-0082 南部都尉 치소 昭明(→漢城)
-0082 南部都尉 치소 昭明(→漢城)
196#10925 SIBLINGS CHILDREN 10925
 
-0082 南部都尉 치소 昭明(→漢城)
진번이 폐지될 때 15개 현 중 7개 현을 낙랑군 남부도위로 재편하고 치소를 소명에 두었다. 신천과 안악 일대에 한나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곳에 위치한 동수묘는 한사군과 고려를 이어주는 의미가 있다.
196#10923 SIBLINGS CHILDREN 10923
 
-0045 새로 발견된 樂浪木簡
조선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학술지 '력사과학'에 게재된 손영종의 논문에는 낙랑 총 인구의 14%인 4만 명이 漢族이며, 나머지 86%는 土着民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196#10970 SIBLINGS CHILDREN 10970
 
0247
紇升骨城(-037) → 國內(003) → 丸都(209) ➔ 平壤城(247) → 丸都城(342) → 平壤東黄城(343) → 國內(371) → 平壤(427) → 長安城(586)
196#32705 SIBLINGS CHILDREN 32705
 
0265 ~ 0316 西晉
0265 ~ 0316 西晉
196#10959 SIBLINGS CHILDREN 10959
 
0265 晉書(648) 幽州 (7군국 34현 59020호)
范陽國(涿, 良鄉, 方城, 長鄉, 遒, 故安, 范陽, 容城)┆燕國(薊, 安次, 昌平, 軍都, 廣陽, 潞, 安樂, 泉州, 雍奴, 狐奴)┆北平郡(徐無, 土垠, 俊靡, 無終)┆上谷郡(沮陽, 居庸)┆廣甯郡(下洛, 潘, 涿鹿)┆代郡(代, 廣昌, 平舒, 當城)┆遼西郡(陽樂, 肥如, 海陽)
196#10914 SIBLINGS CHILDREN 10914
 
0276 晉書(648) 平州 (5군국 26현 18100호)
昌黎郡(昌黎, 賓徒)┆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樂浪郡(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196#32702 SIBLINGS CHILDREN 32702
 
0276 晉書(648) 平州
우임금 시절을 상고해 보면 기주 지역은 周의 유주가 되었고 漢의 우북평군과 접하였다. 後漢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하였고 그의 아들 강, 강의 아들 문의가 멋대로 요동을 점거하고 동이 9종을 모두 복종시켰다. 曹魏가 동이교위를 양평에 두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갈라 평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다시 합하여 유주를 만들었다. 문의가 죽자 나중에 호동이교위를 양평에 두었다. 276년 10월에 평주를 설치하였다.
196#10899 SIBLINGS CHILDREN 10899
 
0291~0337 韓의 再編
0291~0337 韓의 再編
중국에서 서진이 망해가면서 요동과 한국은 재편되었다. 낙랑과 대방은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려에 병합되었고 고려와 백제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고려는 기존의 한사군 잔존 세력과 전연으로부터 이탈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역을 다스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196#10933 SIBLINGS CHILDREN 10933
 
0291~0337 韓의 再編
0291~0337 韓의 再編
196#9834 SIBLINGS CHILDREN 9834
 
0292 葬於西川之原 號曰西川王
196#2179 SIBLINGS CHILDREN 2179
 
0292.10 ❰❰ -0009 솔까역사 百濟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青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即退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곤미천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청목산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봉현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196#21910 SIBLINGS CHILDREN 21910
 
0294⁻ 晉書(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秦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196#7520 SIBLINGS CHILDREN 7520
 
0296.08 三國史記(1145)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196#2178 SIBLINGS CHILDREN 2178
 
0300.03 三國史記(1145) 新羅
樂浪帶方两國歸服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 낙랑은 313년에, 대방은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었다. 이때는 단지 망하기 직전에 있던 낙랑과 대방의 난민들이 신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196#9845 SIBLINGS CHILDREN 9845
 
0302.09 三國史記(1145)
미천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平壤으로 옮겼다.
196#32703 SIBLINGS CHILDREN 32703
 
0307~0312 梁書(636)
晉永嘉亂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元帝授平州刺史句驪王乙弗利頻寇遼東廆不能制 진나라 영가의 난리 때에 선비족의 모용외가 창려의 대극성을 점거하니 원제는 평주자사를 제수하였다. 구려왕 을불리가 자주 요동을 침범하였으나 외는 막을 수 없었다.
196#9835 SIBLINGS CHILDREN 9835
 
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창려, 요동, 현도 등 서진의 평주는 일찌감치 모용선비의 차지가 되었고 뒤이어 유주를 포함한 하북 지역도 모용선비가 차지하게 된다.
196#10964 SIBLINGS CHILDREN 10964
 
0311 晉書(648)
时二京倾覆幽冀沦陷廆刑政修明虚怀引纳流亡士庶多襁负归之廆乃立郡以统流人冀州人为冀阳郡豫州人为成周郡青州人为营丘郡并州人为唐国郡 두 서울이 무너지고 유주와 기주가 함락되었는데 모용외가 형벌을 밝게 하고 마음을 비워 사람들을 끌어안으니 떠돌던 많은 선비와 서민들이 아이를 업거나 짐을 지고 그에게 귀부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군을 세워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니 기주인은 기양군, 예주인은 성주군, 청주인은 영구군 그리고 병주인은 당국군에 속하게 했다.
196#9841 SIBLINGS CHILDREN 9841
 
0313 資治通鑑(1084)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 350여년 전의 낙랑 목간에는 낙랑 인구의 14%인 4만여 명이 한족이었다. 1천여가는 5천에서 1만 정도의 인구이니, 이때 모용선비로 옮겨간 한족은 일부분이었다.
196#2466 SIBLINGS CHILDREN COMMENT 2466
 
0313.10 三國史記(1145) 高句麗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196#32917 SIBLINGS CHILDREN COMMENT 32917
 
0313~0338 遼西國
단부 선비가 서진의 燕, 漁陽, 范陽, 上谷, 廣寧, 代, 遼西, 北平 8군을 차지하고 건립하였다.
196#9883 SIBLINGS CHILDREN 9883
 
0314.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南侵帶方郡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196#32746 SIBLINGS CHILDREN COMMENT 32746
 
0315 三國史記(1145)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현도성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 고려는 낙랑과 대방은 차례로 병합했지만 현도는 차지하지 못했다.
196#10971 SIBLINGS CHILDREN 10971
 
0315 현도와 高句麗
0315 현도와 高句麗
현도군은 심양과 薩爾滸城(살이허성) 사이에 있었고 고구려현은 赫圖阿拉(혁도아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10968 SIBLINGS CHILDREN 10968
 
0316 慕容鲜卑段氏鲜卑进入辽东和辽西
0316 慕容鲜卑段氏鲜卑进入辽东和辽西
196#14774 SIBLINGS CHILDREN 14774
 
0316 晉(西晉) 멸망
311년 흉노족은 진의 수도인 洛陽을 약탈하고 황제를 죽였다. 진은 고대의 수도였던 長安에 새 황제를 세우고 나라를 재건했지만 이는 이민족의 침입을 잠시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316년 사마염의 손자인 민제는 흉노족의 부족장에게 항복하고 퇴위했다가 후에 살해당했다.
196#10902 SIBLINGS CHILDREN 10902
 
0317~0420 東晉→劉宋→蕭齊→蕭梁→陳
0317~0420 東晉→劉宋→蕭齊→蕭梁→陳
司馬睿에 의해 강남에 세워진 晉의 망명 왕조이다. 이후 북중국에서는 북방계의 다섯 민족이 세운 16개의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고 남중국에서는 東晉이 劉宋, 蕭齊, 蕭梁, 陳으로 차례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196#14780 SIBLINGS CHILDREN 14780
 
0318~0321 晉書(648)
高句麗寇遼東廆遣眾擊敗之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자 모용외가 무리를 보내어 이를 물리쳤다.
196#9934 SIBLINGS CHILDREN 9934
 
0331 葬於羙川之原 號曰美川王
196#32704 SIBLINGS CHILDREN 32704
 
0333
0333
모용 선비는 모용황과 모용인으로 갈라졌었다.
196#14778 SIBLINGS CHILDREN 14778
 
0333 晉書(648)
皝遣其弟建武幼 司馬佟壽等討之 황이 그 동생 건무장군 유와 사마 동수 등을 보내어 토벌하였다. 仁盡眾距戰 幼等大敗 皆沒於仁 인이 군대를 다하여 막아 싸우니, 유 등이 대패하므로 다 인에게 함몰되었다. ▐ 이때 동수는 仁에게 붙었다.
196#41541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41
 
0333 資治通鑑(1084)
皝賜昭死 遣軍祭酒封弈慰撫遼東 以高詡為廣武將軍 將兵五千與庶弟建武將軍幼 稚 廣威將軍軍 寧遠將軍汗 司馬遼東佟壽共討仁 與仁戰於汶城北 皝兵大敗 幼 稚 軍皆為仁所獲 壽嘗為仁司馬 遂降於仁
196#41545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45
 
0334.08 三國史記(1145)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
196#10938 SIBLINGS CHILDREN 10938
 
0336 資治通鑑(1084)
慕容幼 慕容稚 佟壽 郭充 翟楷 龐鑒皆東走 幼中道而還 皝兵追及楷 鑒 斬之 壽 充奔高麗 모용유, 모용치, 동수, 곽충, 적해, 방감은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유는 도중에 돌아왔고 황의 군사가 추급하여 적해, 방감은 베어죽였는데 동수, 곽충은 고려로 달아났다.
196#41543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43
 
0337~0370 前燕→後燕→北燕
0337~0370 前燕→後燕→北燕
요서 일대에 살던 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鄴으로 옮겼다. 370년 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196#10960 SIBLINGS CHILDREN 10960
 
0338 資治通鑑(1084)
朝鮮令昌黎孫泳帥眾拒趙 大姓王清等密謀應趙 泳收斬之 同謀數百人惶怖請罪 泳皆釋之 與同拒守 樂浪太守鞠彭以境內皆叛 選鄉里壯士二百餘人共還棘城
196#11619 SIBLINGS CHILDREN 11619
 
0338 遼寧省錦州市義縣
조선령 창려 손영은 무리를 거느리고 후조를 막았다. 대성 왕청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후조에 호응하니 왕청 등의 목을 베었다. 함께 모의한 수백명이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죄를 청하니 손영은 이들을 모두 풀어주고 함께 막고 지켰다. 낙랑 태수 국팽이 자신의 경내 무리들이 모두 배반하자 향리에서 장사 200여명을 뽑아 함께 극성으로 돌아왔다. ▐ 義縣의 西北에 棘城이 있었다.
196#11624 SIBLINGS CHILDREN 11624
 
0342
紇升骨城(-037) → 國內(003) → 丸都(209) → 平壤城(247) ➔ 丸都城(342) → 平壤東黄城(343) → 國內(371) → 平壤(427) → 長安城(586)
196#10939 SIBLINGS CHILDREN 10939
 
0342 모용황의 高句麗 침공
모용외의 아들 晃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釗(고국원왕)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구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196#9865 SIBLINGS CHILDREN 9865
 
0343.02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그의 동생을 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196#10919 SIBLINGS CHILDREN 10919
 
0343.07
紇升骨城(-037) → 國內(003) → 丸都(209) → 平壤城(247) → 丸都城(342) ➔ 平壤東黄城(343) → 國內(371) → 平壤(427) → 長安城(586)
196#21907 SIBLINGS CHILDREN 21907
 
0343.07 동명왕릉
196#10966 SIBLINGS CHILDREN 10966
 
0345 솔까역사 晉書
句麗(百濟→)扶餘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 구려, 부여, 우문 그리고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196#11625 SIBLINGS CHILDREN 11625
 
0346 솔까역사 資治通鑑(1084)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高麗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있었는데 고려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방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 부여를 서쪽으로 밀어내는 일은 인접한 고려가 가능하고 백제는 불가능하다.
196#15251 SIBLINGS CHILDREN 15251
 
0348 張撫夷墓
帶方太守 張撫夷 ▐ 帶方太守라는 명문은 이 지역을 한사군의 帶方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撫夷는 동수묘에 나오는 護撫夷校尉라는 명문과 연결하여 오환교위, 선비교위 그리고 동이교위처럼 변방의 종족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추정한다.
196#10926 SIBLINGS CHILDREN 10926
 
0349 三國史記(1145)
王送前東夷護軍宋晃于燕 燕王雋赦之 更名曰活 拜爲中尉 왕이 전 동이호군 송황을 연으로 보내다. 연왕 모용준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바꾸어 활이라 하고 벼슬을 내려 중위를 삼았다.
196#32532 SIBLINGS CHILDREN COMMENT 32532
 
0350~0394 前秦
0350~0394 前秦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은 오호십육국시대 초기에는 포홍을 지도자로 하여 前趙 및 後趙의 용병으로 각지를 전전하였다. 특히 후조에 의해 하북성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포홍의 아들 부건이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351년에 전진을 건국하였다. 전진은 370년에 전연을 멸망시켰다.
196#10961 SIBLINGS CHILDREN 10961
 
0353 영화9년명 문자전돌
永和九年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353년에 요동·한·현도군을 관할하는 태수인 동리가 만들었다. ▐ 요동과 현도는 晋의 평주 5군국 중 2군국이다. 이 당시 요동은 모용 선비가 차지하고 있었고 현도는 고려가, 韓은 백제와 신라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6#41536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36
 
0353 遼東 韓 玄菟
佟利 - 遼東韓玄菟太守 ▐ 동리는 336년에 고려로 망명해온 佟壽(冬壽)와 어떤 관계일까? 두 사람은 이름 외에도 현도 태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196#10934 SIBLINGS CHILDREN 10934
 
0355 三國史記(1145) 高句麗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 征東大將軍은 2품이다. 자사는 주의 행정 장관인데 영주는 전연때 사용되지 않은 지명이어서 營州刺史가 허구의 관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公은 5등급 작위다.
196#10916 SIBLINGS CHILDREN 10916
 
0355 營州 樂浪
前燕 - 故國原王 - 征東大將軍 營州刺史 樂浪公
196#10935 SIBLINGS CHILDREN 10935
 
0357 冬壽墓
冬壽 -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 ▐ 동수는 요동 사람이다. 낙랑, 창려, 현도 그리고 대방은 晋의 평주 5군국 중 요동을 제외한 4군이다. 낙랑과 대방은 고려가 병합했지만 그 나머지는 모용선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용선비는 낙랑과 대방의 유민도 받아 따로 낙랑군을 설치한 바 있다. 동수는 336년에 고려로 망명하였는데 이 관작은 그 전에 모용선비에 있을 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6#1359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369.09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니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급히 쳐부수고 5천여 명을 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6#21854 SIBLINGS CHILDREN 21854
 
0369.09 @치양 @雉壤
196#30205 SIBLINGS CHILDREN 30205
 
0369.09 ◾
고려가 314년에 대방군을 멸망시킬 때, 백제는 그 남부인 예성강 유역을 차지한 듯하다. 고려는 342년에 모용씨의 침공을 받아 도읍이 파괴되는데, 이듬해에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은 백제와 가까웠으므로, 이때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내려 한 듯하다. 고려와 백제의 충돌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6#30206 SIBLINGS CHILDREN 30206
 
0369.09 三國史記(1145)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96#10947 SIBLINGS CHILDREN 10947
 
0371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듣고 군사를 浿河 가에 매복시켜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 전후 관계를 보았을 때 이때의 패하는 예성강이 어울린다.
196#21855 SIBLINGS CHILDREN 21855
 
0371 三國史記 百濟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髙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왕이 태자와 정예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 왕 사유가 힘껏 싸우며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고려는 도읍을 다시 국내성으로 옮겼다.
196#21856 SIBLINGS CHILDREN 21856
 
0371 三國史記(1145) 百濟
移都漢山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196#1738 SIBLINGS CHILDREN 1738
 
0371.10 솔까역사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平壤城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故國之原에 장사지냈다. 國内로 도읍을 옮겼다.
196#10948 SIBLINGS CHILDREN 10948
 
0373.07 三國史記(1145) 百濟
築城於青木嶺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196#21865 SIBLINGS CHILDREN 21865
 
0375.07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가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와 水谷城을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도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다가 흉년이 들어 하지 못하였다.
196#21857 SIBLINGS CHILDREN 21857
 
0375.07 @수곡성 @水谷城
196#30207 SIBLINGS CHILDREN 30207
 
0376.11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북쪽 경계로 쳐들어왔다.
196#21862 SIBLINGS CHILDREN 21862
 
0377.10 三國史記 百濟
왕이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平壤城을 쳤다.
196#21859 SIBLINGS CHILDREN 21859
 
0377.11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196#21860 SIBLINGS CHILDREN 21860
 
0384~0407 前燕➔後燕→北燕
0384~0407 前燕➔後燕→北燕
선비족 慕容垂가 건국한 나라이다.
196#10963 SIBLINGS CHILDREN 10963
 
0386 三國史記(1145) 百濟
發國内人年十五歳已上 設關防 自青木嶺(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국내의 15세 이상인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방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으로부터 북으로는 팔곤성에 닿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196#21894 SIBLINGS CHILDREN 21894
 
0386.08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196#21861 SIBLINGS CHILDREN 21861
 
0386~0534 拓跋魏(北魏)
0386~0534 拓跋魏(北魏)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나라다.
196#10942 SIBLINGS CHILDREN 10942
 
0389.09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고 약탈하였다.
196#21863 SIBLINGS CHILDREN 21863
 
0390.09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고구려를 치라고 명령하니 都坤城(都押城)을 빼앗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196#21864 SIBLINGS CHILDREN 21864
 
0391 廣開土王陵碑(414)
①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②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③ 六年 王躬率□軍討伐殘國 ④ 九年 百殘違誓與倭和通 ⑤ 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 ⑥ 十年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⑦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 ⑧ 十四年 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 王躬率□□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斬煞無數
196#24655 SIBLINGS CHILDREN 24655
 
0391 @廣開土王陵碑 @광개토왕릉비
196#10949 SIBLINGS CHILDREN 10949
 
0391 葬於故國壤 號為故國壤王
196#32706 SIBLINGS CHILDREN 32706
 
0391.05 ❰❰ 0392 솔까역사
故國壤王 八年王薨 太子即位 고국양왕 8년에 왕이 사망하여 태자가 즉위하였다.
196#21867 SIBLINGS CHILDREN 21867
 
0391~0412 廣開土王
196#7966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392 ↶ 廣開土王陵碑 ①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 백제가 고려의 속민이었을 리는 없다. 백제는 371년에 평양을 침공하여 고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었다. 고대의 기록을 보면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상대가 과거 자기 나라의 땅이었다거나 자기 나라의 속국이었다는 이유를 대는 경우가 많다. ①은 ②와 함께 ③의 명분을 강화시켜준다.
196#1558 SIBLINGS CHILDREN COMMENT 1558
 
0392 廣開土王陵碑 ②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런데 왜가 391년에 □을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자 □□ 신라는 신민이 되었다. ▐ 永樂1년에 있었다는 이 이야기는 永樂5년과 永樂6년의 기록 사이에 들어와 永樂6년에 있었던 백제 정벌의 배경이 되고 있다. 아래 ④의 경우처럼 이 사건은 단지 396년 이전에 있었지만 광개토왕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의 즉위년인 辛卯年의 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
196#1415 SIBLINGS CHILDREN COMMENT 1415
 
0392.01 三國史記(1145)
九年春遣使新羅修好新羅王遣姪實聖為質 9년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사이좋게 지내니 신라 왕이 조카 실성을 보내서 인질로 삼았다.┆三十七年春正月髙句麗遣使王以髙句麗強盛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나물 이사금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신라가 왜의 신민 상태가 되어 있었다면 고려에 기대어 볼 계산으로 볼모를 보냈을 것이다. 新羅以爲臣民
196#1758 SIBLINGS CHILDREN 1758
 
0392.07 三國史記 百濟
髙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䧟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徳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고구려왕 담덕이 4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많이 빼앗겼다.
196#21868 SIBLINGS CHILDREN 21868
 
0392.07 三國史記 百濟
▐ 백제의 石峴等十餘城은 고려와의 사이에 있는 임진강과 북유말갈과의 사이에 있는 한탄강을 따라 수축되어 있었을 듯하다. 386년에 서해에서 靑木嶺을 거쳐 八坤城까지 구축한 관방과 어울린다. 이 일대를 모두 빼앗긴 것은 백제의 안보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진사왕의 소극적인 대처에 책임을 물을 만하다.
196#21893 SIBLINGS CHILDREN 21893
 
0392.10 三國史記 髙句麗
백제의 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다. 왕이 군대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 386년에 서해에서 靑木嶺을 거쳐 八坤城까지 구축한 관방의 서쪽 끝일 듯하다.
196#21869 SIBLINGS CHILDREN 21869
 
0392.10 @관미성 @關彌城
▐ 백제의 石峴等十餘城은 고려와의 사이에 있는 임진강과 북유말갈과의 사이에 있는 한탄강을 따라 수축되어 있었을 듯하다. 여기에 關彌城까지 더하면 386년에 서해에서 靑木嶺을 거쳐 八坤城까지 구축했다는 관방에 어울린다. 이 일대를 모두 빼앗긴 것은 백제의 안보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것으로 진사왕의 소극적인 대처에 책임을 물을 만하다.
196#30074 SIBLINGS CHILDREN 30074
 
0392.11 辰斯→阿花
❶ 日本書紀(720) 0272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紀角宿禰는 백제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❷ 三國史記(1145) 0392 辰斯王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阿莘王이 왕위를 이었다.
196#1491 SIBLINGS CHILDREN 1491
 
0392.11 辰斯→阿花
▐ 385년에 침류왕이 죽자 왕자 아화(아신)이 어려 숙부인 진사가 왕이 되었는데, 392년에 그 진사왕도 갑자기 죽자 아화(아신)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한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고만 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왜가 사신을 보내 왕을 교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였다(來渡□破百殘)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196#1764 SIBLINGS CHILDREN COMMENT 1764
 
0393.05 三國史記(1145) 新羅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나물 이사금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196#1651 SIBLINGS CHILDREN COMMENT 1651
 
0393.08 三國史記 百濟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진무는 몸소 군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石峴城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196#1737 SIBLINGS CHILDREN 1737
 
0394.07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와 水谷城 아래에서 싸워 패하였다. ▐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수축된 石峴等十餘城을 빼앗겼는데 어떻게 그 너머에 있는 水谷城을 침공할 수 있었을까?
196#21870 SIBLINGS CHILDREN 21870
 
0395.08 三國史記 百濟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왕 담덕이 몸소 군사 7,000명을 이끌고 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해 죽은 자가 8,000명이었다. ▐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수축된 石峴等十餘城을 빼앗겼는데 어떻게 그 너머에 있는 浿水까지 갈 수 있었을까?
196#21871 SIBLINGS CHILDREN 21871
 
0395.11 三國史記 百濟
왕이 浿水 전투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000명을 이끌고 漢水를 건너 靑木嶺 아래에 진을 쳤다. 마침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대를 돌려 漢山城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386년에 관방을 설치할 때, 靑木嶺으로부터 북으로는 八坤城에 닿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靑木嶺은 적성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어울린다. 이곳을 넘으면 임진강을 건너는 여울이 있다.
196#21898 SIBLINGS CHILDREN 21898
 
0396 廣開土王陵碑 ③
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 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1145)에 나오지 않지만 전과가 상세히 나오고 일본서기(720)에 나오는 왜의 반응과도 어울리기 때문에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196#1476 SIBLINGS CHILDREN COMMENT 1476
 
...
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0396 廣開土王陵碑 ③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96#1419 SIBLINGS CHILDREN COMMENT 1419
 
0396 廣開土王陵碑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96#10965 SIBLINGS CHILDREN 10965
 
0397 볼모 直支(腆支) ④
❶ 일본서기(720) 277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백제의 침미다례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왜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 ❷ 삼국사기(1145) 397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196#1739 SIBLINGS CHILDREN 1739
 
0397 中原高麗碑
중원고려비의 건립 연도를 영락7년으로 판독하는 견해가 있다.
196#17688 SIBLINGS CHILDREN 17688
 
0397 廣開土王陵碑 ④
九年 百殘違誓與倭和通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 397년에 백제가 왜에 왕자를 볼모로 보낸 사실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하므로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고정한다. 광개토왕릉비에 백제와 왜가 399년에 화통하였다는 부분은 잘못 알고 있거나 광개토왕이 399년에 평양으로 행차한 배경으로 397년의 사건이 끼워진 것이다.
196#1652 SIBLINGS CHILDREN 1652
 
0398.08 三國史記 百濟
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내어 漢山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날 밤에 큰 별이 군영 내에 떨어졌는데 큰 소리가 났다. 왕이 매우 꺼려하여 곧 그만 두었다.
196#21873 SIBLINGS CHILDREN 21873
 
0399 廣開土王陵碑 ⑤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 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遣使還告以□計 왕이 평양에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96#1478 SIBLINGS CHILDREN COMMENT 1478
 
0399.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이 전역에 시달려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치니 호구가 줄어들었다.
196#21874 SIBLINGS CHILDREN 21874
 
0400 廣開土王陵碑 ⑥
十年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신라와 남가라를 잇는 육로는 양산단층이다.
196#1430 SIBLINGS CHILDREN 1430
 
0400 廣開土王陵碑 ⑦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고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조공하였다.
196#1439 SIBLINGS CHILDREN COMMENT 1439
 
0401.07 三國史記(1145) 新羅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196#1788 SIBLINGS CHILDREN COMMENT 1788
 
0402.03 三國史記(1145) 新羅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 ▐ 볼모를 보낸다는 것은 종속을 의미한다. 게다가 고려에 갔던 볼모가 돌아온 이듬해에 왜에 볼모를 보냈다는 것은 고려가 왜로부터 신라를 안정적으로 보호해주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196#1789 SIBLINGS CHILDREN COMMENT 1789
 
0404 廣開土王陵碑 ⑧
十四年 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 王躬率□□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斬煞無數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連船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왜군은 바닷길로 온 듯하다.
196#1452 SIBLINGS CHILDREN COMMENT 1452
 
0404 廣開土王陵碑 ⑧
▐ 광개토왕릉비는 396년에 백제를 대파하여 복종을 받아냈다고 하나 백제는 이내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또 400년에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와 가라에 들어온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나 404년에 왜군은 고려의 대방을 직접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01년에 고려에 가 있던 신라의 볼모가 돌아오고 이듬해에 신라는 왜에 볼모를 보냈다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공적에는 허세가 있는 듯하다.
196#1790 SIBLINGS CHILDREN COMMENT 1790
 
0404 이덕일의 영산 왜
0404 이덕일의 영산 왜
가운데 그림은 영산강 유역에 왜가 있었다는 이덕일의 가설이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왜가 391년에 바다를 건너왔고 399년에는 신라를 점령한 상태였으며 400년에는 그 신라 점령군이 고려에 쫓겨 임나가라로 퇴각하였고 404년에는 대방을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반도에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설정해야 자연스러우며 그 주둔지로는 영산강 유역이 가장 자연스럽다.
196#11603 SIBLINGS CHILDREN 11603
 
0407~0436 北燕
0407~0436 北燕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196#15252 SIBLINGS CHILDREN 15252
 
0408 鎭墓
鎭 -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龍驤將軍 遼東太守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史 ▐ 鎭은 하북 사람이다. 요동과 유주는 전진과 후연이 번갈아가며 차지했었다. 따라서 요동태수나 유주자사는 전진 또는 후연에서 받은 관직일 것이다.
196#1356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414 廣開土王陵碑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 하백은 황하에 산다는 신이다. 광개토왕릉비를 만들 때에는 이미 중원의 신화와 전설이 고려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196#14769 SIBLINGS CHILDREN 14769
 
0414 廣開土王陵碑
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기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광개토왕릉비를 만들 때에는 이미 중원의 신화와 전설이 고려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196#14771 SIBLINGS CHILDREN 14771
 
0427
紇升骨城(-037) → 國內(003) → 丸都(209) → 平壤城(247) → 丸都城(342) → 平壤東黄城(343) → 國內(371) ➔ 平壤(427) → 長安城(586)
196#2467 SIBLINGS CHILDREN COMMENT 2467
 
0427 낙랑 천도
0427 낙랑 천도
고려는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자 이듬해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371년에 백제의 침공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자 다시 환도성으로 되돌아갔다. 고려는 광개토왕때 백제를 여러 차례 격파한 후에야 장수왕이 마침내 평양으로 도읍을 다시 옮길 수 있었다. 313년에 낙랑을 병합한 후 100여년만의 일이다.
196#4641 SIBLINGS CHILDREN COMMENT 4641
 
0432.09 魏書(554)
徙營丘成周遼東樂浪帶方玄菟六郡民三萬家于幽州 開倉以賑之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주민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눠주었다.
196#15257 SIBLINGS CHILDREN 15257
 
0432.09⁺ 魏書(554) 註 朝鮮
二漢晉屬樂浪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復置屬焉 조선현은 전후한과 서진 때에 낙랑에 속했는데 나중에 폐지했다. 432년에 조선인들을 비여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하여 이들을 소속시켰다.
196#15881 SIBLINGS CHILDREN 15881
 
0449 中原高麗碑
196#17687 SIBLINGS CHILDREN 17687
 
0469.10 三國史記(1145) 百濟
雙峴城을 수리하였다. 靑木嶺에 큰 목책을 세우고 北漢山城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 靑木嶺은 아차산에서 멀지 않았다.
196#21896 SIBLINGS CHILDREN 21896
 
0472 魏書(554)
其王餘慶始遣使上表曰 백제왕 여경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였다.
196#32137 SIBLINGS CHILDREN 32137
 
0479~0502 東晉→劉宋➔蕭齊→蕭梁→陳
0479~0502 東晉→劉宋➔蕭齊→蕭梁→陳
난릉 출신의 하급병사 蕭道成이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 뒤 宋順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했다.
196#10953 SIBLINGS CHILDREN 10953
 
0490 百濟 東城王 票文(495)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196#32138 SIBLINGS CHILDREN 32138
 
0495 南齊書(537)
百濟 東城王 票文
196#32136 SIBLINGS CHILDREN 32136
 
0507.10 三國史記 百濟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함께 漢城을 치기 위하여 橫岳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196#21872 SIBLINGS CHILDREN 21872
 
0551 高句麗 漢山州
買省郡(馬忽)┆七重縣(難隠別)┆波害平史縣(頟)┆泉井口縣(於乙買串)┆述尒忽縣(首泥忽)┆逹乙省縣(髙烽)
196#9455 SIBLINGS CHILDREN 9455
 
0551 高句麗 漢山州 買省郡
196#21909 SIBLINGS CHILDREN 21909
 
0551 高句麗 漢山州 北漢山郡
北漢山郡(平襄)┆骨衣内縣┆王逢縣
196#21955 SIBLINGS CHILDREN 21955
 
0757 九州五小京 漢州
來蘇郡 夲校髙句麗買省縣 景徳王改名 今見州 領縣二┆重城縣 本髙句麗七重縣 景徳王改名 今積城縣┆波乎縣 夲髙句麗波害平吏縣 景徳王攺名 今因之
196#1965 SIBLINGS CHILDREN 1965
 
0757 九州五小京 漢州 來蘇郡
買省郡·馬忽 → 來蘇 → 見州┆七重 → 重城 → 積城┆波害平吏 → 波乎
196#9456 SIBLINGS CHILDREN 9456
 
0757 九州五小京 漢州
交河郡 本髙句麗泉井口縣 景徳王改名 今因之 領縣二┆峯城縣 本髙句麗述尒忽縣 景徳王改名 今因之┆髙烽縣 本髙句麗逹乙省縣 景徳王改名 今因之
196#9457 SIBLINGS CHILDREN 9457
 
0757 九州五小京 漢州 交河郡
泉井口縣 → 交河郡┆述尒忽縣 → 峯城縣┆逹乙省縣 → 髙烽縣
196#21959 SIBLINGS CHILDREN 21959
 
0757 九州五小京 漢州 漢陽郡
北漢山郡 → 漢陽郡 → 楊州┆骨衣奴縣 → 荒壤縣 → 豐壤縣┆皆伯縣 → 遇王縣 → 幸州
196#1799 SIBLINGS CHILDREN 1799
 
1454 世宗實錄地理志 楊州都護府
고구려 買省郡은 신라의 來蘇郡이 되었다가 고려에서 見州로 고쳤다. 고구려의 北漢山郡은 신라의 漢陽郡이 되었다가 고려에서 楊州로 바뀌었는데, 1018년에 見州를 흡수했다가 1397년에 치소를 見州 옛터로 옮겼다.
196#21947 SIBLINGS CHILDREN 21947
 
1834 靑邱圖 積城┆파주
196#21923 SIBLINGS CHILDREN 21923
 
1834 靑邱圖 고양
196#21960 SIBLINGS CHILDREN 21960
 
2019.04.16 최연식의 주장
반파란 국명을 넣어 해석을 시도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渡伴破百殘合攻新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반파로 건너오자 백제가 그들과 함께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았다. ▐ 문제점, (1) 반파(伴跛,叛波)는 513년 이후 기록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국명이다. (2) 반파는 가라와 함께 사용된 예가 없다. (3) 渡의 목적어로 국명이 오는 게 자연스런 문장인가? (4) '그들과 함께 침공하다'란 뜻이 두 글자에 담길 수 있나?
196#1762 SIBLINGS CHILDREN COMMENT 1762
 
2023.05.09 谷井 濟一 기록
1913년 일본인 학자들이 고구려 유적을 조사할 때, 현지의 중국인 초붕도가 1900년대부터 석회를 발라 마모된 글자를 재현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찍은 사진에는 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가 나오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일본이 초붕도처럼 석회를 발라 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을 날조했다는 주장이 또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조작했다면, 왜 369년으로 해서 일본서기와 일치시키지 않고 391년으로 해서 일본서기와 어긋나게 했을까?
196#20163 SIBLINGS CHILDREN 20163
 
2025.03.31 #youtube
백제를 왜의 괴뢰국으로 전락시킨 고려 광개토왕
196#32813 SIBLINGS CHILDREN 32813
 
광개토왕릉비 분석
먼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392년과 397년의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고정한다. 각각 '왜가 백제의 왕을 교체했다'는 이야기와 '백제가 왜에 볼모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어서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396년의 사건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고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58성을 빼앗아갔다'는 이야기다. 광개토왕릉비의 나머지 기록은 이 사실들에 맞추어 해석한다.
196#13914 SIBLINGS CHILDREN 13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