紇升骨城(-037) → 國內(003) → 丸都(209) → 平壤城(247) → 丸都城(342) → 平壤東黄城(343) → 國內(371) → 平壤(427) → 長安城(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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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❶紇升骨城
고려의 건국 장소는 사서에 따라 紇升骨城(위서,북사,통전,삼국사기), 紇斗骨城(주서), 卒本(古記,삼국사기), 忽本(광개토왕릉비) 등으로 나타난다.
졸본 또는 홀본은 하천가이고 흘승골성 또는 흘두골성은 그 인근의 산성으로 보여진다. 渾江 인근에 있는 五女山城은 높은 곳에 있는 성으로 高句麗의 어원으로 추정한 '높은 곳에 있는 성'에 부합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高句麗라 했고 그 이름을 따 고구려현과 고구려 국호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1883#6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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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三國志(289)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梁音渴) 宮軍破走 고구려가 수차례 침입하고 반하자 244년에 검이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모든 길을 따라 토벌하였다. 구려왕 궁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를 거스러 올라와 량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궁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갔다.
1883#2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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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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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世語曰 頎字孔碩 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 頎之孫)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다시 정벌하니 궁은 매구(북옥저)로 도망갔다. 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쫓게 했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바위에 공을 새기고 또 丸都之山에 새기기를 不耐之城이라 명명하였다.
1883#2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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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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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7 「三國誤記」 ❹平壤¹城
동천왕이 丸都城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平壤¹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平壤²은 본래 仙人 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여기에 나오는 平壤을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으로 오인하고 왕검 설화를 붙여 놓았다. 당시 대동강 유역에는 낙랑군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平壤은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이 될 수 없다.
1883#4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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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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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08 三國史記(1145)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 서천왕은 고려의 도읍이 平壤¹일 때의 왕이므로 그의 무덤이 있는 故國原은 平壤¹에서 가까웠을 듯하다.
또 모용외가 도성인 平壤¹을 치기 전에 이른 것으로 보아 故國原은 요동에서 平壤¹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을 듯하다.
1883#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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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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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08+ 모용황의 高句麗 침공
모용원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남쪽 길로 침입하여 목저에서 전투를 벌여 釗(고국원왕)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丸都까지 침입하니 쇠는 혼자서 도망쳤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미천왕)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5만여명을 약탈하고 그의 궁실을 불살라 丸都城을 파괴한 뒤 귀환하였다.
1883#9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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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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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고려와 百濟의 대립
▐ 이 전쟁은 고려와 백제가 최초로 충돌한 사건이다.
313년과 314년에 각각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병합되면서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지만 충돌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에 두 나라가 충돌한 것은 고려의 도읍이 백제에 가까이 옮겨간 결과가 아닐까?
요동으로부터 거듭되는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 고려가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고 새 도읍과 백제 사이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침공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83#5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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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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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平壤城
한강 유역에 있는 백제가 대동강과 청천강을 넘어 고려를 공격하기는 어려워 보이므로 이 平壤城이 있을 곳으로는 대동강 유역이 어울린다.
그리고 왕이 전사한 것으로 보아 당시는 이곳이 도읍이었을 것이다.
343년에 도읍을 平壤 동쪽의 黄城으로 옮긴다는 기록 이후 또 다른 천도 기록이 없으므로 이 平壤城은 동쪽에 黄城이 있었다는 그때 그 平壤에 있는 城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343년에 도읍을 옮긴 平壤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²이었다.
1883#5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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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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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故國之原
故國之原 또는 故國原은 故國川原이나 國壤과 같은 곳인 듯하다. 故國川王 또는 國襄王은 國內에 도읍이 있던 시기의 왕이므로 故國原 또한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平壤²에서 백제에게 패하면서 도읍을 다시 國內로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는 244~246년에 조위의 침공을 받자 247년에 도읍을 丸都에서 平壤¹으로 옮겼고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자 343년에 도읍을 丸都에서 平壤²으로 옮긴 바 있다.
1883#2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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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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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 國內가 있는 들을 國壤이라 불렀는데 다른 곳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는 故國壤, 故國之原, 故國原 등으로 불린 듯하다. 東川·東襄·柴原, 中川·中壤, 西川·西壤 그리고 美川·好壤도 그곳에 있었다.
國內에 도읍이 있던 시기에 죽은 광개토왕의 무덤 또한 그곳에 있었을 것이므로 그곳은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현재의 집안이다.
1883#8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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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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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三國史記(1145) ❽平壤
移都平壤²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 고려는 342년에 모용선비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丸都城이 파괴되자 이듬해에 도읍을 平壤²東 黄城으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371년에 백제가 平壤²城에 침공해오고 이를 막다 고구원왕이 죽자 도읍을 다시 國內로 옮겼다. 399년에는 광개토왕이 平穰²에 행차해 내려갔다가 신라가 보낸 사신을 만나기도 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壤은 그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穰²이라고 보아야 한다.
188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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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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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4 한강 유역과 관산성
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1883#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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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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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주서
국도는 평양성으로,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아 있다. 성안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는 날에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궁실을 마련하였으나 평상시에는 거기에 살지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漢城)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
1883#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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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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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북사
왕은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한다. 도읍은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의 거리가 6리로 산을 따라 굴곡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아 있다. 성 안에는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구적이 쳐들어 오는 날에 대비하였다가, 곧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궁실을 별도로 지어놓지만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았다. 그 외에 또 국내성 및 한성이 있는데, 역시 별도이다.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1883#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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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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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漢陽郡은 본래 고구려 北漢山郡(한편 平壤이라 이른다)이었는데 진흥왕이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楊州 옛 터이다.
▐ 平壤이란 지명이 대동강변에 있는 지금의 평양 이외의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명백한 사례다. 이로써 평양은 압록강, 대동강 그리고 한강 유역에 모두 하나씩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83#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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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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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의 세 가지 의문
▐ 고려의 도읍에 대한 삼국사기의 의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국내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중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두 번 나온다. 247년의 평양성은 환도 인근에 있었고 343년의 평양동황성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
(2)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동황성으로 이거하였다고 하는데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옳은 기록인데, 고국원왕이 죽을 때 국내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빠져서 ...
1883#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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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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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在位十九年九月 升天不復迴雲輧 聖子類利在(扶餘時 婦所孕者)來嗣位 葬遺玉鞭成墳塋 (今龍山墓也)
동명왕 주몽이 재위한지 19년 9개월 만에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으셨네. 성자 유리(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한 사람)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남기신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네. (지금의 용산묘다.)
1883#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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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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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려사
41대 후손 준에 이르러 燕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의 땅을 빼앗아 王險城(險은 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漢나라 무제가 원봉 2년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에 국내성에서 옮겨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1883#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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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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