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종족 > -0108 부여·예·맥·옥저의 기원 I > 고려의 천도

❶ BC 037 紇升骨城 ❷ 003 國內 ❸ 209 丸都 ❹ 247 平壤城 ❺ 342 丸都城 ❻ 343 平壤東黄城 ❼ 371 國內 ❽ 427 平壤 ❾ 586 長安城
 
高麗와 百濟의 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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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1145) ❶紇升骨城
卒本川에 이르렀다.(위서에서는 '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과 물이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沸流水 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高로 氏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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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광개토왕릉비 (414)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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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오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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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오녀산성
오녀산성은 험준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서·남·북은 깎아지른 절벽을 천연장벽으로 삼은 반면, 지세가 험준하지 않고 완만하게 경사진 동쪽과 동남쪽에는 다듬은 돌로 안팎의 성벽을 쌓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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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비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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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삼국사기(1145) ❷國内
王遷都於國内 築尉那巖城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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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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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 삼국사기(1145) ❸丸都
王移都於九都 왕이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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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 산성자산성
6044
 
0238 - 0245
漢 왕조를 이은 위(曹魏)는 238년에 요동을 장악하고 있던 공손씨를 토벌하고 낙랑과 대방에 대한 통치도 회복하였다. 이어 위는 부여의 지원을 받으며 244년과 245년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고 도주하는 동천왕을 쫓아 옥저까지 파괴하였다. 낙랑과 대방도 고려에 복속했던 濊를 침공하여 다시 복종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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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7-02 삼국사기(1145) ❹平壤城
동천왕이 丸都城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仙人 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여기에 나오는 평양을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으로 간주하고 왕검 설화를 붙여 놓았다. 당시 대동강 유역에는 낙랑군이 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평양은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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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都於丸都之下 환도의 아래에 도읍 하였다. ▶247년에 고려가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긴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환도 아래에 평양성이 있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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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08 삼국사기(1145)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모용외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연(前燕)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다. 당시 고려의 도읍은 평양성이었다. 고국원은 요동에서 평양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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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09 삼국사기(1145)
미천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平壤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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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4-08 삼국사기(1145)
平壤城을 증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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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08 삼국사기(1145) ❺丸都城
가을 8월에 丸都城으로 옮겨 살았다. ※바로 이어진 모용 선비의 침공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모용 선비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거처를 산성으로 옮긴 듯하다. 그렇다면 평양성은 평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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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 모용황의 고구려 침공
모용원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남쪽 길로 침입하여 목저에서 전투를 벌여 쇠(釗, 고국원왕)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丸都까지 침입하니 쇠는 혼자서 도망쳤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미천왕)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5만여명을 약탈하고 그의 궁실을 불살라 丸都城을 파괴한 뒤 귀환하였다.
9975
 
0342¦모용황의 고구려 침공
▶이 기록은 미천왕의 무덤이 환도성 인근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왕릉은 보통 도읍 인근에 있고 미천왕은 평양성 도읍 시기인 331년에 죽었으므로 결과적으로 평양성도 환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환도성 인근이라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더 이상 자세히 평양성의 위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천도의 취지를 생각해 볼 때 환도성 기준으로 요동 반대편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참고로, 평양성 도읍 시기의 왕들은 무덤이 있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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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02 삼국사기(1145)
고국원왕이 그의 동생을 연(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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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07 삼국사기(1145) ❻平壤東黄城
移居平壤東黄城 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다. ▶고려는 313년과 314년에 각각 낙랑과 대방을 병합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평양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평양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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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3-07 平壤東黄城
현재까지는 대성 산성이 가장 유력하다.
1883#10967
 
0369-09 삼국사기(1145)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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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고려와 백제의 대립
▶이 전쟁은 기록 상 고려와 백제가 최초로 충돌한 사건이다. 313년과 314년에 각각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병합되면서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지만 충돌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에 두 나라가 충돌한 것은 고려의 도읍이 백제에 가까이 옮겨간 결과가 아닐까? 요동으로부터 거듭되는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 고려가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고 그 도읍과 백제와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침공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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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삼국사기(1145) ❼國內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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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平壤城
▶만약 平壤城이 환도성 인근에 있었다면 한강 유역에 있는 백제가 공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후를 통틀어 백제는 청천강 이북을 공격한 사례가 없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壤城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왕이 피살된 것으로 보아 그곳이 도읍이었으며, 따라서 343년에 도읍을 옮겼다는 그 平壤東黄城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국원은 서천왕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환도성 인근에 있었다. 따라서 이때 도읍을 다시 환도성 인근으로 옮겼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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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 광개토왕릉비(414)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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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 광개토왕릉비(414)
▶고려는 371년에 백제가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城에 침공해오자 이를 막다 왕이 전사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穰도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백제는 한성에 있었다. 이 광개토왕릉비는 집안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써 당시 고려의 도읍도 그 인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371년에 백제에 패하면서 환도성 인근으로 도읍을 옮긴 정황과도 잘 부합한다.
13557
 
0427 삼국사기(1145) ❽平壤
移都平壤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고려는 342년에 모용선비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丸都城이 파괴되자 이듬해에 도읍을 平壤東黄城으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371년에 백제가 平壤城에 침공해오고 이를 막다 고구원왕이 죽자 도읍을 다시 환도성 인근으로 옮겼다. 399년에는 광개토왕이 平穰에 행차해 내려갔다가 신라가 보낸 사신을 만나기도 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壤은 그러한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고 대동강 유역에 있는 평양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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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 삼국사기(1145)
築長安城 장안성을 쌓았다. ▶고려는 551년에 백제와 신라의 침공을 받아 한강 유역을 상실했다. 이것이 장안성을 쌓는 계기가 된 듯하다. 371년에 백제의 침공을 받자 平壤東黄城에서 환도성 인근으로 도읍을 옮겼던 사례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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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6 삼국사기(1145) ❾長安城
移都長安城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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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6 평양성
5965
 
0612 수서(636)
滄海道軍舟艫千里 高帆電逝 巨艦雲飛 橫斷浿江 逕造平壤 창해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했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을 횡단하여 좁은 길을 지나 평양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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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수서(636)
▶고려의 도읍이 환도라는 삼국지(289)의 기록을 옮겨적던 사서들이 수나라와 고려의 전쟁을 계기로 고려의 도읍이 평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사기(BC 91)에서 대동강은 열수였고 패수는 청천강이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패강은 대동강을 말한다. 이후에도 대동강은 패수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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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고려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리이다. 국도는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浿水에 닿아 있다. 또 國內城과 漢城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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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양서
其王都於丸都之下 그 나라의 왕도는 환도 아래에 있다. ▶양서가 편찬되던 636년은 물론이고 양나라가 세워지던 502년보다도 훨씬 전에 고려는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따라서 이 기록은 낡은 기록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都於丸都之下란 문구는 삼국지(289)에 나오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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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주서
국도는 평양성으로,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아 있다. 성안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는 날에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궁실을 마련하였으나 평상시에는 거기에 살지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漢城)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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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남사
其王都於丸都山 그 나라의 왕도는 환도산에 있다. ▶양서와 같은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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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북사
왕은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한다. 도읍은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의 거리가 6리로 산을 따라 굴곡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아 있다. 성 안에는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구적이 쳐들어 오는 날에 대비하였다가, 곧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궁실을 별도로 지어놓지만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았다. 그 외에 또 국내성 및 한성이 있는데, 역시 별도이다.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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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5 구당서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平壤城에 도읍하였으니, 곧 漢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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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신당서
고려의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은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漢代의 낙랑군으로 長安에서 5천리 밖에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외성을 쌓았으며, 남쪽은 浿水와 연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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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427년에 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586년에 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 平壤城은 지금의 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浿水는 곧 大同江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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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왕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의 역년은 틀림이 없고 상세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東黃城으로 이거하였는데, 성은 지금 西京의 동쪽 木覓山 가운데 있다”라 하니,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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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平壤城은 또 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古記에서 이르기를 “平壤으로부터 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5970 COMMENT
 
1145 삼국사기
漢陽郡은 본래 고구려 北漢山郡(한편 平壤이라 이른다)이었는데 진흥왕이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楊州 옛 터이다. ▶平壤이란 지명이 대동강변에 있는 지금의 평양 이외의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명백한 사례다. 이로써 평양은 압록강, 대동강 그리고 한강 유역에 모두 하나씩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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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의 세 가지 의문
▶고려의 도읍에 대한 삼국사기의 의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국내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중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두 번 나온다. 247년의 평양성은 환도 인근에 있었고 343년의 평양동황성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 (2)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동황성으로 이거하였다고 하는데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옳은 기록인데, 고국원왕이 죽을 때 국내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빠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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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在位十九年九月 升天不復迴雲輧 聖子類利在(扶餘時 婦所孕者)來嗣位 葬遺玉鞭成墳塋 (今龍山墓也) 동명왕 주몽이 재위한지 19년 9개월 만에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으셨네. 성자 유리(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한 사람)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남기신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네. (지금의 용산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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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려사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본래 3조선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이 되었다. 周나라 무왕이 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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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려사
41대 후손 준에 이르러 燕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의 땅을 빼앗아 王險城(險은 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漢나라 무제가 원봉 2년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에 국내성에서 옮겨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41990 COMMENT
 
漢城 건너편에 있던 平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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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 지역에 있던 漢城
고려와 백제의 천도   -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25현   0357 안악 동수묘(佟壽墓)   0636 주서   0762-05 삼국사기(1145)   1145 삼국사기   1451 고려사   한서보주(漢書補注)  
 
참고 자료
대성산성   청암리성   평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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