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012 ⏍ 高句麗 > -0037+ 고려의 천도

紇升骨城(-037) → 國內(003) → 丸都(209) → 平壤城(247) → 丸都城(342) → 平壤東黄城(343) → 國內(371) → 平壤(427) → 長安城(586)
 
-0037 ❶ 卒本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13 SIBLINGS CHILDREN 30813
 
0003 ❷ 國内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14 SIBLINGS CHILDREN 30814
 
0197 ➔故國川-故國原-故國壤
1883#30827 SIBLINGS CHILDREN 30827
 
0209 ❸ 丸都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15 SIBLINGS CHILDREN 30815
 
0244 ~ 0245 曹魏의 침공
1883#30822 SIBLINGS CHILDREN 30822
 
0247 ❹ 平壤¹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16 SIBLINGS CHILDREN 30816
 
0248 ➔東川-中川-西川-美川
1883#24930 SIBLINGS CHILDREN 24930
 
0270 東川➔中川-西川-美川
1883#30828 SIBLINGS CHILDREN 30828
 
0292 東川-中川➔西川-美川
1883#30829 SIBLINGS CHILDREN 30829
 
0331 東川-中川-西川➔美川
1883#30830 SIBLINGS CHILDREN 30830
 
0342 ❺ 丸都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17 SIBLINGS CHILDREN 30817
 
0342 前燕의 침공
1883#30823 SIBLINGS CHILDREN 30823
 
0343 ❻ 平壤² 黄城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18 SIBLINGS CHILDREN 30818
 
0371 百濟의 침공
1883#30819 SIBLINGS CHILDREN 30819
 
0371 ❼ 國內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24 SIBLINGS CHILDREN 30824
 
0371 故國川➔故國原-故國壤
1883#30831 SIBLINGS CHILDREN 30831
 
0392 故國川-故國原➔故國壤
1883#30832 SIBLINGS CHILDREN 30832
 
0414 廣開土王陵
1883#24931 SIBLINGS CHILDREN 24931
 
0427 ❽ 平壤²
卒本 - 國內 - 丸都 - 平壤¹ - 丸都 - 平壤² - 國內 ➔ 平壤²
1883#30820 SIBLINGS CHILDREN 30820
 
0551 百濟와 新羅의 침공
1883#30826 SIBLINGS CHILDREN 30826
 
0586 ❾ 平壤² 長安城
1883#30821 SIBLINGS CHILDREN 30821
 
 高麗와 百濟의 도읍
高麗와 百濟의 도읍
1883#1631 SIBLINGS CHILDREN COMMENT 1631
 
-0037 ❶紇升骨城
고려의 건국 장소는 사서에 따라 紇升骨城(위서,북사,통전,삼국사기), 紇斗骨城(주서), 卒本(古記,삼국사기), 忽本(광개토왕릉비) 등으로 나타난다. 졸본 또는 홀본은 하천가이고 흘승골성 또는 흘두골성은 그 인근의 산성으로 보여진다. 渾江 인근에 있는 五女山城은 높은 곳에 있는 성으로 高句麗의 어원으로 추정한 '높은 곳에 있는 성'에 부합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高句麗라 했고 그 이름을 따 고구려현과 고구려 국호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1883#6314 SIBLINGS CHILDREN OPEN
 
0003 三國史記(1145) ❷國内
王遷都於國内 築尉那巖城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883#1829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9
 
0179 故國川王(或云國襄)
1883#24911 SIBLINGS CHILDREN 24911
 
0197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
▐ 왕의 무덤을 보통 도읍 인근에 쓰므로 故國川原 또는 國襄은 國內 인근에 있었을 것이다.
1883#24927 SIBLINGS CHILDREN 24927
 
0209 三國史記(1145) ❸丸都
王移都於九都 왕이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
1883#1830 SIBLINGS CHILDREN COMMENT 1830
 
0209 @산성자산성
1883#6044 SIBLINGS CHILDREN 6044
 
0227 東川王(或云東襄)
▐ 東川은 東襄이라는 들을 흐르는 시내일 것이다.
1883#24912 SIBLINGS CHILDREN 24912
 
0234 國壤
▐ 고국천왕의 즉위 기록엔 고국천왕을 國襄이라고도 한다고 했지만 고국천왕의 왕비가 234년에 죽을 때는 고국천왕을 國壤이라 칭했고 무당 또한 國壤이라 칭했다. 따라서 襄과 壤은 같은 뜻으로 쓰였다.
1883#24970 SIBLINGS CHILDREN 24970
 
0234 ◾襄
1883#24909 SIBLINGS CHILDREN 24909
 
0234 ◾壤
1883#24903 SIBLINGS CHILDREN 24903
 
0238 ~ 0245
0238 ~ 0245
漢 왕조를 이은 曹魏는 238년에 요동을 장악하고 있던 공손씨를 토벌하고 낙랑과 대방에 대한 통치도 회복하였다. 이어 위는 부여의 지원을 받으며 244년과 245년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고 도주하는 동천왕을 쫓아 옥저까지 파괴하였다. 낙랑과 대방도 고려에 복속했던 濊를 침공하여 다시 복종을 받아냈다.
1883#5964 SIBLINGS CHILDREN COMMENT 5964
 
0244 三國志(289)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梁音渴) 宮軍破走 고구려가 수차례 침입하고 반하자 244년에 검이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모든 길을 따라 토벌하였다. 구려왕 궁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를 거스러 올라와 량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궁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갔다.
1883#24936 SIBLINGS CHILDREN 24936
 
0244 三國志(289)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관구검은 말을 묶고 수레를 달아 丸都에 오른 뒤 句驪所都를 도륙하고 포로가 된 수천명의 목을 베었다.
1883#24933 SIBLINGS CHILDREN 24933
 
0244 ◾玄菟-沸流水-丸都
0244 ◾玄菟-沸流水-丸都
玄菟에서 출발한 관구검의 군대와 沸流水를 거슬러 올라간 동천왕의 군대는 흘승골성 즈음에서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동천왕의 군대를 격파하자 관구검은 沸流水를 따라 돌아가지 않고 분수령을 넘어 바로 丸都를 침공한 듯하다.
1883#24932 SIBLINGS CHILDREN 24932
 
0245 三國志(289)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世語曰 頎字孔碩 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 頎之孫)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다시 정벌하니 궁은 매구(북옥저)로 도망갔다. 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쫓게 했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바위에 공을 새기고 또 丸都之山에 새기기를 不耐之城이라 명명하였다.
1883#24934 SIBLINGS CHILDREN 24934
 
0247 「三國誤記」 ❹平壤¹城
동천왕이 丸都城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平壤¹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平壤²은 본래 仙人 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여기에 나오는 平壤을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으로 오인하고 왕검 설화를 붙여 놓았다. 당시 대동강 유역에는 낙랑군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平壤은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이 될 수 없다.
1883#41283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83
 
0248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장사지냈다. 이름을 동천왕이라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잡목을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의 이름을 시원이라 하였다.
1883#24917 SIBLINGS CHILDREN 24917
 
0248 中川王(或云中壤)
1883#24913 SIBLINGS CHILDREN 24913
 
0270 葬於中川之原 號曰中川王
1883#24918 SIBLINGS CHILDREN 24918
 
0270 西川王(或云西壤)
1883#24914 SIBLINGS CHILDREN 24914
 
0289 三國志
都於丸都之下 환도의 아래에 도읍이 있다. ▐ 247년에 고려가 도읍을 平壤¹城으로 옮긴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환도산성 아래에 平壤¹城이 있거나 환도를 지나는 강의 하류에 平壤¹城이 있을 수 있다.
1883#1853 SIBLINGS CHILDREN COMMENT 1853
 
0292 葬於西川之原 號曰西川王
1883#24919 SIBLINGS CHILDREN 24919
 
0296.08 三國史記(1145)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 서천왕은 고려의 도읍이 平壤¹일 때의 왕이므로 그의 무덤이 있는 故國原은 平壤¹에서 가까웠을 듯하다. 또 모용외가 도성인 平壤¹을 치기 전에 이른 것으로 보아 故國原은 요동에서 平壤¹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을 듯하다.
1883#1899 SIBLINGS CHILDREN COMMENT 1899
 
0300 美川王(一云好壤王)
▐ 美와 好는 같은 뜻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원래 美 또는 好의 뜻을 가진 내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을 美川으로 訓借한 듯하다.
1883#24920 SIBLINGS CHILDREN 24920
 
0300 ◾好는 美의 뜻으로도 쓰인다.
好東西 好風景 花好月圓 好人好事
1883#24928 SIBLINGS CHILDREN 24928
 
0300 ◾美는 好의 뜻으로도 쓰인다.
鮮美 完美 價廉物美 盡善盡美
1883#24929 SIBLINGS CHILDREN 24929
 
0302.09 三國史記(1145)
미천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平壤으로 옮겼다.
1883#4316 SIBLINGS CHILDREN COMMENT 4316
 
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0307~0312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
1883#5966 SIBLINGS CHILDREN 5966
 
0331 葬於羙川之原 號曰美川王
▐ 羙는 美와 같은 한자다.┆平壤¹城 도읍 시기의 왕들은 무덤이 있는 곳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였다. 동천왕의 무덤은 東川에 있었고 중천왕의 무덤은 中川에 있었으며 서천왕의 무덤은 西川 그리고 미천왕의 무덤은 美川에 있었다. 당연히 모두 平壤¹城 인근에 있었을 것이다.
1883#24915 SIBLINGS CHILDREN 24915
 
0331 故國原王(一云囯罡上王)
1883#24921 SIBLINGS CHILDREN 24921
 
0334.08 三國史記(1145)
平壤城을 증축하였다.
1883#1827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7
 
0337~0370 前燕
0337~0370 前燕
요서 일대에 살던 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鄴으로 옮겼다. 370년 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1883#30812 SIBLINGS CHILDREN 30812
 
0342.08 三國史記(1145) ❺丸都城
가을 8월에 丸都城으로 옮겨 살았다. ▐ 바로 이어진 모용 선비의 침공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모용 선비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거처를 산성으로 옮긴 듯하다. 그렇다면 평양성은 평지에 있었다.
1883#1831 SIBLINGS CHILDREN COMMENT 1831
 
0342.08+ 모용황의 高句麗 침공
모용원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남쪽 길로 침입하여 목저에서 전투를 벌여 釗(고국원왕)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丸都까지 침입하니 쇠는 혼자서 도망쳤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미천왕)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5만여명을 약탈하고 그의 궁실을 불살라 丸都城을 파괴한 뒤 귀환하였다.
1883#9975 SIBLINGS CHILDREN 9975
 
0342.08+ 모용황의 高句麗 침공
▐ 이 기록은 미천왕의 무덤이 丸都城 인근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왕릉은 보통 도읍 인근에 있고 미천왕은 平壤¹城 도읍 시기에 죽었으므로 결과적으로 平壤¹城도 丸都城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1883#23580 SIBLINGS CHILDREN 23580
 
0343.02 三國史記(1145)
고국원왕이 그의 동생을 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1883#1854 SIBLINGS CHILDREN COMMENT 1854
 
0343.07 ❻平壤²東黄城
移居平壤²東黄城 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 평양²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다. ▐ 고려는 313년과 314년에 각각 낙랑과 대방을 병합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평양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평양²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1883#10967 SIBLINGS CHILDREN OPEN
 
0369.09 三國史記(1145)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883#4312 SIBLINGS CHILDREN COMMENT 4312
 
0369.09 고려와 百濟의 대립
▐ 이 전쟁은 고려와 백제가 최초로 충돌한 사건이다. 313년과 314년에 각각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병합되면서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지만 충돌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에 두 나라가 충돌한 것은 고려의 도읍이 백제에 가까이 옮겨간 결과가 아닐까? 요동으로부터 거듭되는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 고려가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고 그 도읍과 백제 사이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침공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83#5967 SIBLINGS CHILDREN COMMENT 5967
 
0371 葬于故國之原
▐ 故國之原 또는 故國原은 故國川原이나 國壤과 같은 곳일 듯하다.
1883#24924 SIBLINGS CHILDREN 24924
 
0371.10 「三國誤記」 ❼國內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²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²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遷都於國内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1883#1824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4
 
0371.10 ◾平壤城
여기에 나오는 平壤城은 343년에 도읍을 옮긴 平壤東黄城이다. 한강 유역에 있는 백제가 대동강과 청천강을 넘어 고려를 공격하기는 어려워 보이므로 이 平壤城이 있을 곳으로는 대동강 유역이 어울린다.
1883#5968 SIBLINGS CHILDREN COMMENT 5968
 
0371.10 ◾故國之原
삼국지 296년의 기록에 至故國原見西川王墓使人發之(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故國原은 서천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고 서천왕은 平壤¹ 도읍 시기의 왕이었으므로 平壤¹은 故國原에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도읍을 다시 故國原 인근으로 옮겼다고 해야 앞뒤로 이어지는 기록과 어울린다.
1883#24935 SIBLINGS CHILDREN 24935
 
0384 故國壤王
▐ 대체로 장사를 지낸 들을 흐르는 내의 이름을 붙여 왕의 명칭을 만들었으나, 179~197년에 재임한 故國川王이 있고 331~371년에 재임한 故國原王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 故國壤王이라 한 듯하다.
1883#24926 SIBLINGS CHILDREN 24926
 
0392 葬於故國壤 號為故國壤王
▐ 고려왕의 명칭에 國壤과 故國壤이 모두 나오는데 國壤이 먼저 나오고 故國壤이 나중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처음 國內에 도읍을 두었을 때 國壤이라 부르던 곳을 도읍을 이리저리 옮기고 난 후대에 故國壤이라 부르게 된 듯하다.
1883#24916 SIBLINGS CHILDREN 24916
 
0399 廣開土王陵碑(414)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1883#1826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6
 
0399 廣開土王陵碑(414)
▐ 고려는 371년에 백제가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²城을 침공해오자 이를 막다 왕이 전사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穰도 대동강 유역에 있는 그 平壤²으로 보아야 한다. 이 광개토왕릉비는 집안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써 당시 고려의 도읍도 그 인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371년에 백제의 침공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환도성 인근으로 도읍을 옮긴 정황과도 잘 부합한다.
1883#13557 SIBLINGS CHILDREN 13557
 
0414 廣開土王陵碑
1883#8430 SIBLINGS CHILDREN 8430
 
0427 三國史記(1145) ❽平壤
移都平壤²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 고려는 342년에 모용선비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丸都城이 파괴되자 이듬해에 도읍을 平壤²東 黄城으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371년에 백제가 平壤²城에 침공해오고 이를 막다 고구원왕이 죽자 도읍을 다시 환도성 인근으로 옮겼다. 399년에는 광개토왕이 平穰²에 행차해 내려갔다가 신라가 보낸 사신을 만나기도 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壤은 그러한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고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穰²이라고 보아야 한다.
1883#1821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1
 
0551~0554 한강 유역과 관산성
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1883#30825 SIBLINGS CHILDREN 30825
 
0552 三國史記(1145)
築長安城 장안성을 쌓았다. ▐ 551년에 백제와 신라의 침공을 받아 한강 유역을 상실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
1883#1822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2
 
0586 三國史記(1145) ❾長安城
移都長安城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1883#41285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85
 
0586 @평양성
1883#5965 SIBLINGS CHILDREN 5965
 
0612 수서(636)
滄海道軍舟艫千里 高帆電逝 巨艦雲飛 橫斷浿江 逕造平壤 창해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했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을 횡단하여 좁은 길을 지나 평양에 이르렀다.
1883#1820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0
 
0612 수서(636)
▐ 고려의 도읍이 환도라는 삼국지(289)의 기록을 옮겨적던 사서들이 수나라와 고려의 전쟁을 계기로 고려의 도읍이 평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 사기(-91)에서 대동강은 열수였고 패수는 청천강이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패강은 대동강을 말한다. 이후에도 대동강은 패수로 기록되었다.
1883#5969 SIBLINGS CHILDREN COMMENT 5969
 
0636 수서
고려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리이다. 국도는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浿水에 닿아 있다. 또 國內城과 漢城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일컫는다.
1883#41279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79
 
0636 양서
其王都於丸都之下 그 나라의 왕도는 환도 아래에 있다. ▐ 양서가 편찬되던 636년은 물론이고 양나라가 세워지던 502년보다도 훨씬 전에 고려는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따라서 이 기록은 낡은 기록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都於丸都之下란 문구는 삼국지(289)에 나오는 것과 똑같다.
1883#1850 SIBLINGS CHILDREN COMMENT 1850
 
0636 주서
국도는 평양성으로, 그 성은 동서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아 있다. 성안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는 날에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궁실을 마련하였으나 평상시에는 거기에 살지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漢城)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
1883#1851 SIBLINGS CHILDREN COMMENT 1851
 
0659 남사
其王都於丸都山 그 나라의 왕도는 환도산에 있다. ▐ 양서와 같은 경우다.
1883#1859 SIBLINGS CHILDREN COMMENT 1859
 
0659 북사
왕은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한다. 도읍은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의 거리가 6리로 산을 따라 굴곡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아 있다. 성 안에는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구적이 쳐들어 오는 날에 대비하였다가, 곧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궁실을 별도로 지어놓지만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았다. 그 외에 또 국내성 및 한성이 있는데, 역시 별도이다.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1883#1852 SIBLINGS CHILDREN COMMENT 1852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945 구당서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平壤城에 도읍하였으니, 곧 漢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1883#41287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87
 
1060 신당서
고려의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은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漢代의 낙랑군으로 長安에서 5천리 밖에 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외성을 쌓았으며, 남쪽은 浿水와 연해 있다.
1883#41288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88
 
1145 三國史記
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427년에 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586년에 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 平壤城은 지금의 西京과 같으며 浿水는 곧 大同江이다.
1883#41286 SIBLINGS CHILDREN COMMENT 41286
 
1145 三國史記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왕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의 역년은 틀림이 없고 상세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東黃城으로 이거하였는데, 성은 지금 西京의 동쪽 木覓山 가운데 있다”라 하니,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1883#1823 SIBLINGS CHILDREN COMMENT 1823
 
1145 三國史記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平壤城은 또 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古記에서 이르기를 “平壤으로부터 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1883#5970 SIBLINGS CHILDREN COMMENT 5970
 
1145 三國史記
漢陽郡은 본래 고구려 北漢山郡(한편 平壤이라 이른다)이었는데 진흥왕이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楊州 옛 터이다. ▐ 平壤이란 지명이 대동강변에 있는 지금의 평양 이외의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명백한 사례다. 이로써 평양은 압록강, 대동강 그리고 한강 유역에 모두 하나씩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83#4308 SIBLINGS CHILDREN COMMENT 4308
 
1145 三國史記의 세 가지 의문
▐ 고려의 도읍에 대한 삼국사기의 의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국내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중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두 번 나온다. 247년의 평양성은 환도 인근에 있었고 343년의 평양동황성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 (2)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동황성으로 이거하였다고 하는데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옳은 기록인데, 고국원왕이 죽을 때 국내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빠져서 ...
1883#1818 SIBLINGS CHILDREN COMMENT 1818
 
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在位十九年九月 升天不復迴雲輧 聖子類利在(扶餘時 婦所孕者)來嗣位 葬遺玉鞭成墳塋 (今龍山墓也) 동명왕 주몽이 재위한지 19년 9개월 만에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으셨네. 성자 유리(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한 사람)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남기신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네. (지금의 용산묘다.)
1883#2071 SIBLINGS CHILDREN 2071
 
1451 고려사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본래 3조선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이 되었다. 周나라 무왕이 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이 되었다.
1883#41523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23
 
1451 고려사
41대 후손 준에 이르러 燕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의 땅을 빼앗아 王險城(險은 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漢나라 무제가 원봉 2년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에 국내성에서 옮겨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1883#41990 SIBLINGS CHILDREN COMMENT 41990
 

1883#8435 SIBLINGS CHILDREN 8435
 
漢城 건너편에 있던 平壤
1883#5972 SIBLINGS CHILDREN COMMENT 5972
 
대방 지역에 있던 漢城
1883#5502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참고 자료
대성산성청암리성평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