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 (10) 왕고와 이조의 다문화
 
 요하와 흑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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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의 형성
한민족은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단일정치단위로 통합한 뒤 형성된 민족이다. 그러나 한국통일 이후에도 왕고와 이조시대에 걸쳐 외부의 유민들이 간헐적으로 섞여 들어왔다. 백정(白丁), 향화인(向化人), 황당인(荒唐人), 항왜(降倭) 등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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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씨고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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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6 요(遼) 건국
요(遼)는 중국대륙이 당(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세운 왕조다. 요(遼)는 동서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926년에 병합한 발해도 포함된다. 요(遼)는 200여 년 간 존속하다 1125년 금(金)에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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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5 고려사절요(1452)
세자 대광현과 장군 신덕·예부경 대화균·균로사정 대원균·공부경 대복모·좌우위장군 대심리·소장 모두간·검교 개국남 박어·공부경 오흥 등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과 이름을 내려주면서 그를 왕실의 적에 붙이고,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였다. 보좌하는 신료들에게도 모두 작위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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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6 발해 패망
발해(渤海)는 고려가 망한 지 30여년 뒤인 698년에 고려의 유민 대조영이 세운 왕조인데 200여 년 간 왕조를 이어가다 926년에 요(遼)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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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36 고려사
대상인 유금필과 원윤인 관무·관헌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변방의 정예 기병 9천 5백 명을 지휘하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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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3 강동6주 획득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후방의 주민들을 사민시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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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0 고려사(1451)
거란의 수군지휘사·호기위 대도와 이경 등 여섯 사람이 투항해왔다. 이 사건 이후 많은 거란 사람들과 발해 사람들이 투항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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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 금(金) 건국
말갈에 대한 요(遼)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아골타가 말갈 부족들을 통합하고 요(遼)를 격파한 후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이후 금(金)은 1125년에 요(遼)를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송(趙宋)마저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왕조가 오래가지는 못하고 1234년 몽골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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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5 요(遼) 패망
요(遼)는 중국대륙이 당(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세운 왕조다. 요(遼)는 동서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926년에 병합한 발해도 포함된다. 요(遼)는 200여 년 간 존속하다 1125년 금(金)에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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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 고려사(1451) - 楊水尺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으로 있을 때에 양수척이 흥화·운중도에 많이 살았다. ... 양수척 등이 크게 원망하였다. 거란의 군사가 이르자 양수척이 맞아들여 항복하고 길을 인도한 까닭으로 ... 모두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에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종으로 본래 관적과 부역도 없었다. 수초를 따라 옮겨 살면서 일정한 거주가 없이 다만 사냥을 일삼고 또 고리를 엮어 이를 판매하여 생업을 삼았다. 대개 기생들은 본래 유기장(柳器匠)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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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 고려사(1451) - 楊水尺
흥화도와 운중도는 서북 지역의 역참로다. 삭주는 흥화도에 속했다. 고리는 유기라고도 하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한다. 楊水尺이란 명칭은 여기서 나온 듯하다. 왕건은 936년에 견훤백제를 병합하였는데, 이때 견훤백제의 도읍이었던 전주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사민시켰을 것이다. 병합에 사민이 따라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것을 이 기록과 연결시켜보면 전주의 주민들을 서북 지역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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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7 고려사(1451) - 楊水尺
거란병 6명이 국청사로 들어오니, 중이 한 사람을 사로잡아 죽이자, 나머지가 다 흩어져 달아났다. 또 첩자 3 명이 선의문으로 들어오자 문졸이 잡아서 신문하니 바로 양수척(楊水尺)과 항복한 우리 군사였다. 적 5, 6 명이 또 와서 문졸 세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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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 고려사절요(1452) - 契丹場
합진이 부녀자와 사내 아이 7백 명, 우리나라 백성 중에 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자 2백 명을 우리에게 돌려 보내고, 15세 내외의 여자 9명씩과 준마 9필씩을 조충과 취려에게 각각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조충이 거란 포로를 각도의 주ㆍ현에 나눠 보내어서 빈 땅을 골라 모여 살게 하고,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백성이 되게 하니, 이것이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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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4 금(金) 패망
말갈에 대한 요(遼)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아골타가 말갈 부족들을 통합하고 요(遼)를 격파한 후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이후 금(金)은 1125년에 요(遼)를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송(趙宋)마저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왕조가 오래가지는 못하고 1234년 몽골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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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8~1356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는 몽골의 직할지였다. 한사군에 한족이 이주해왔던 것처럼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도 달단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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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1 원(元) 건국
원(元)은 몽골제국의 쿠빌라이가 분열된 제국 내에서 자신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을 묶어 1271년에 세운 나라로 1279년까지는 조송(趙宋)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동쪽으로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왕고와 함께 일본을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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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8 고려사절요(1452)
상국에서 굳이 소방에 군대를 두려고 한다면, 차라리 달단(韃靼)과 한인의 군대를 보내시고 다구는 소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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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4-01-07 고려사(1451) - 契丹場
태조성무황제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때 금산왕자라는 자가 있었는데 중원의 민을 노략질하며 망한 요의 왕업을 회복하려고 도모하다가 세력이 다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도서에서 날뛰었습니다. 우리 충헌왕이 조충과 김취려 등을 보내어 병사를 원조하고 군량을 주어서 일거에 적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만세에 이르는 자손까지 오늘날을 잊지 말자고 하고서 인하여 잡은 포로를 나누어 신표로 삼으니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거란장(契丹場)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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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4-01-07 고려사(1451) - 契丹場
여기에 나오는 거란장은 121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적어도 120여년간 거란장이 지속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상당히 오래 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원래 유목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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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6 고려사(1451) - 禾尺 才人
양광도·전라도에 사신을 보내 제주 사람 및 화척(禾尺)과 재인(才人)을 추쇄하여 서북면의 수졸로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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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6 고려사(1451) - 禾尺 才人
양광도는 오늘날의 경기 및 충청도에 해당된다. 수졸은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말한다. 몽골의 지배를 받은 후 화척과 재인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을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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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8-1644 명(明)
명(明)은 1368년 남중국에서 세워진 왕조로 원(元)을 몽골로 몰아내고 북중국까지 차지하였다. 1592년 일본이 이조를 침략하자 원병을 보내어 도와주었는데 이때 국력을 많이 소모한 탓에 1616년에 요동에서 후금(後金)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명(明)은 1619년 이조의 지원군과 함께 후금(後金)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청(淸)은 명(明)의 마지막 황제가 반란세력에 포위되어 1644년에 자살하자 북경을 점령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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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0 고려사(1451)
3월에 달단왕(韃靼王) 합라팔독과 야선불화가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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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2 고려사(1451) - 禾尺
화척(禾尺)들이 무리를 지어 왜구를 사칭하면서 영해군을 침략하여 관아와 민가를 불살랐다. 판밀직 임성미, 동지밀직 안소, 밀직부사 황보림, 전 밀직부사 강서 등을 보내 그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임성미 등은 포로로 잡혀갔던 남녀 50여 인과 말 200필을 바쳤다. 화척은 양수척(揚水尺)을 말한다. -- 영해군은 지금의 경북 영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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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2 고려사절요(1452) - 楊水尺
양수척(楊水尺)이 무리를 이루어 왜적이라고 거짓 행세를 하며 영월군을 침범해 관청과 민호를 불태웠다. 판밀직 임성미 등을 보내어 이들을 추포하고, 남녀 50여 인과 말 200여 필을 노획하였다. -- 고려사에는 영해군으로 되어 있다. 왜적을 사칭했다는 점에서 바닷가인 영해군이 이 이야기에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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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2 고려사절요(1452) - 楊水尺
남녀가 섞여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도적떼가 아니라 부족의 무리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200여 마리의 말이 있었다는 점에서 농경민이 아니라 유목민이었다는 짐작도 할 수 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양수척은 1216년 기록에 나오는 양수척과 달라 보인다. 그래서 화척은 원래 흘러온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정착 농경민의 시각에는 기존의 양수척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아, 그 둘을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는 추정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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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9 고려사절요(1452) - 韃靼 水尺
먹는 것은 民의 하늘이고 곡식은 소의 힘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을 두었으니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두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韃靼)과 수척(水尺)은 소를 도살하는 것으로 농사를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군의 각 참에서 모두 소를 잡아서 빈객을 먹여도 금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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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9 고려사절요(1452) - 韃靼 水尺
달단은 몽골을 가리키던 타타르(Tatar)에서 나온 말이다. 농경민에게는 소가 식량을 생산하는 수단이었지만 유목민에게는 식량 그 자체였다. 수척이 도축을 일삼았다는 이 이야기는 그들이 원래 유목민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정착 농경민의 시각에서는 이런 수척과 달단이 구별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수척 중에는 달단에서 기원한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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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 조선왕조실록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을 일삼지 않으므로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여 상시 모여서 도적질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게 되니, 그들이 있는 주군에서는 그 사람들을 호적에 올려 토지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죄주게 할 것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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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 조선왕조실록
정착 농경민의 눈에는 양수척, 화척, 수척 그리고 달단 뿐만 아니라 재인도 같은 부류로 보였을 것이다. 농사를 짓지 않고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각기 달랐다. 양수척은 원래 수초를 따라 이동하며 유기를 만드는 장인이었고, 화척과 수척은 달단과 같은 유목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재인은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뿌리는 같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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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7-04-26 조선왕조실록 - 降倭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 조회를 받으니, 항왜(降倭) 나가온(羅可溫)은 조반 동8품 반두 조금 뒤에 서열하고, 섬라곡국 사람은 서8품 반두 조금 뒤에 서열하였다. 나가온에게 단자 옷 1습과 세포 옷 1습과 사모·은대·목화를 하사하고, 그 당류 12인에게도 각각 베옷 1습씩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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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7-07-21 조선왕조실록 - 降倭
항왜(降倭) 망사문(望沙門)이 세 사람을 거느리고 오니, 각각 옷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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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4 조선왕조실록
외방 각도에서 활과 말에 능한 자는 모두 갑사와 시위에 속하게 하고 才人·禾尺 가운데 활과 말에 능한 자도 또한 시위에 속하게 하고, 그 나머지 노약한 자는 각 진에 속하게 하고서, 또 노약한 자 중에서 괜찮은 자를 골라 시위에 더 속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번진에는 단약한 병사가 날마다 감소하는데, 만일 변경이 있다면 장수가 된 자가 능히 단독으로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才人·禾尺의 무리는 모두 각 진에 속하게 하여 번병을 충실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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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6 조선왕조실록
달단(韃靼) 화척(禾尺)에게 소와 말을 잡는 것을 금하도록 거듭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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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7 조선왕조실록
“... 향화를 자원하여 해변 각 고을에 나누어 둔 왜인과 흥리 왜인이 서로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므로 언설이 난잡하니, 장래가 염려됩니다. 빌건대, 육지의 먼 곳에 옮겨 두도록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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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7 조선왕조실록
소와 말을 잡는 것은 나라에 금령이 있으니, 유사가 엄하게 금하여 다스리고, 화척·재인 등이 도살로써 생업을 삼는 자는 마땅히 소재처로 하여금 모아들여 구제하게 하되, 전지를 주어 경작하게 하여 이산하지 않게 하소서. 이들 무리인들 어찌 쓸 곳이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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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0 조선왕조실록
덕릉·안릉 두 능을 옮기어 함주 달단동(韃靼洞) 언덕에 합장하였는데, 달달동은 함주 북쪽 5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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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 조선왕조실록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명하여 몰이꾼을 뽑아 보내게 하였다. 임금이 임실현 지방에 금수가 많다는 말을 듣고 순행하고자 하여, 경상도·충청도에서 각각 1천 명씩과 전라도에서 2천 명을 본월 24일에 금주 남제원에 모이도록 기약하였는데, 각각 10일 양식을 싸 오게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재인·화척과 각진의 번상한 군관과 번하한 시위군을 전부 다 뽑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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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 조선왕조실록
“국가에서 비록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의 무리들로 하여금 유이하지 못하도록 하더라도 호패가 있지 않은 까닭으로 이사하는 것이 무상하고 농업을 일삼지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비단 이러한 무리뿐만 아니라, 또 모든 백성들에게 모두 호패를 지급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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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3 조선왕조실록
명하여 면성군 한규에게 갑사 5백 인으로써 광주에 가서 사냥하게 하고, 이어서 광주에 전지하기를, “재인(才人)·화척(禾尺)을 빠짐 없이 모아놓고 대령하라.” 하니, 대개 상왕을 받들고 사냥을 구경하고자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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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4 조선왕조실록
“화척(禾尺) 등은 일찍이 농사에 힘쓰지 않고 유수(백수)로서 먹으므로 국가에서 그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재인(才人)은 저화 50장을, 화척(禾尺)은 저화 30장을 세공으로 내자시에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평민과 더불어 잡거하고, 모두 군역에 종사하니, 원컨대, 세공을 면제하여 생활을 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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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5 조선왕조실록
영길도 도순문사 이원이 풍속을 바꿀 사의를 보고 하였다. 계문은 이러하였다. "각 고을에 산재한 향화인(向化人)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데, 이성(異姓) 4, 5촌도 꺼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데리고 살므로 윤리를 패상합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일절 금단하여 더러운 풍속을 변화시키시되, 만약 어기는 자가 있다면 율문에 의하여 죄를 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영길도는 지금의 함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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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7 조선왕조실록
“함길·평안·풍해도 각 고을의 산접 생안간(散接生雁干)·소유간(酥油干)의 명목을 추고하되, 그 중에서 달달(韃靼)은 그전대로 정체하고, 평민은 모조리 군역에 붙이도록 하라.” -- 함길도는 지금의 함경도이고 풍해도는 지금의 황해도이다. 산접간은 진상품을 모아 올리는 사람이고 생안간은 기러기를 잡아 진상하는 사람, 소유간은 낙농품을 진상하는 사람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달단은 군역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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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9-02 조선왕조실록
선지하기를, “주상의 몸이 너무 무거우니, 내일은 주상과 더불어 노상왕을 모시고 동쪽 교외 광진에 가고자 한다. 또 앞으로 양근·광주에서 사냥을 할 터이니, 곧 병조로 하여금 경기도 각관의 재인(才人)·화척(禾尺)을 초벌리로 모이도록 약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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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9-03 조선왕조실록 - 才人·禾尺
상왕이 하명하여 농민을 부리지 말고 방패 5백 명과 재인(才人)·화척(禾尺) 백 명으로 몰이꾼을 삼고, 무릇 농민에게 피해될 만한 것은 일절 제거하며, 갑사 및 시위 대소 인원에게 각기 10일 동안 먹을 양식을 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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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9-05 조선왕조실록 - 才人·禾尺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명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이숙묘·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하번 갑사, 별패, 시위패 및 수성군 영속과 재인과 화척·한량 인민·향리·일수·양반 중에서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들을 거느려,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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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9-06 조선왕조실록 - 才人·禾尺
“이제 여러 도에 있는 병선이 대마도에 나가 정벌하므로 각 포구의 방어가 허술하니, 방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병선에 명령하여 요새지에 나누어 보내어 머물러 둔을 치게 하고, 육지에 또한 명령하여 하번 갑사·별패·시위패·진속 및 재인(才人)·화척(禾尺)·일수·양반에 방어할 만한 자들로 네 번으로 나누어 교체해서 방어에 나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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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9-06 조선왕조실록 - 才人·禾尺
이조는 산업의 기반이 농업이었다. 그래서 이 농사를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전쟁이나 사냥에 재인과 화척이 동원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재인과 화척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접할 기회가 농민보다 많았다. 그래서 농민보다 전쟁이나 사냥에 더 적합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http://qindex.info/i.php?f=2613#6229
 
 1420 조선왕조실록 - 才人·禾尺
화척이나 재인들이 농업에는 종사하지 아니하고 활쏘고 말타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양민과는 혼인도 하지 아니하고 저희끼리 한 떼를 이루어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를 한결같지 아니하며, 소나 말을 도살하여 양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하니, 청컨대, 이들을 각 지방에 나누어 두어서 평민과 혼인도 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직업에 안착하여 살도록 하고, 그래도 옛날 버릇을 고치지 않는 자는 그가 기르는 축산을 몰수하고 아울러 이정·장까지 죄를 주라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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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1 조선왕조실록
황해도·평안도에 수유적이 있는데, 스스로 달단(韃靼)의 유종이라 하면서 도축으로 직업을 삼고 있었다. 매 호에 해마다 수유(酥油) 한 정을 사옹방에 바치고는 집에 부역이 없으니, 군역을 피하는 사람이 많이 가서 의지하였다. 이를 다 폐지하니, 모두 수백 호나 되었다. -- 1417년에도 수유간 문제가 불거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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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2 조선왕조실록
“군적에 오르지 않은 재인이나 화척들은 검찰할 길이 없으므로, 이로 인하여 으슥한 곳에 모여 살면서 간음과 도적질을 몰래 행하고, 혹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니, 청컨대, 각도로 하여금 군적에 오르지 않은 재인과 화척을 샅샅이 찾아내어 군적에 등록시키고, 평민들과 섞여 살아서 농업을 익히게 하고, 3년마다 한 번씩 출생된 자손들을 찾아내어 호적에 올리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만약 출입할 일이 있거든 날짜를 한정하여 여행증을 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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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3 조선왕조실록 세종 05년
재인과 화척(禾尺)은 본시 양인으로서,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다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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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2 조선왕조실록
“향화인(向化人)으로서 우리 나라의 관직을 받은 자가 과전을 받고자 하옵는데, 그 족파를 상고하온즉, 그 근본을 알지 못하여 족류를 가릴 수 없사오매, 과전을 주는 것은 법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어떻게 처리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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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3 조선왕조실록
“용성에 거주하는 향화인(向化人)을 단천·북청 등처에 옮기기를 청하나이다.” -- 용성, 단천 그리고 북청은 모두 함경도에 있는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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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3~1444 4군 6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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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5 조선왕조실록
“향화(向化)한 왜인 마삼보로가 광주 호장 이간의 양자가 되어 성을 이씨로 가칭하고는 양주의 호장 한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이근을 낳았사온데, 이근이 글을 읽어 이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청하옵건대, 그의 응시를 허용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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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6 조선왕조실록
강석덕을 이조 참판으로, 이승손을 인순부 윤으로, 이계린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의지를 한성부 윤으로, 신기를 호조 참의로, 성봉조를 공조 참의로, 김고을도개(金古乙道介)를 첨지중추원사로, 김조를 경상도 도관찰사로, 이사임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양후를 충청도 도관찰사로 삼았다. 고을도개는 향화한 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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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6 조선왕조실록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달(韃靼)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 지금도 대소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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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9 조선왕조실록
우리 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이라는 것은 전조(왕고)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도(강화도로 도읍을 옮겨갔을 때)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과 백정은 충렬왕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 현가(현악기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의 풍습과 재살(가축을 잡는 일)의 일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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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7 조선왕조실록
이보다 먼저 장연 백령도·대청도 등에 황당인(荒唐人) 40여 명이 와서 정박하고 집을 크게 짓고 대장간을 설치하여 배를 수리하였는데, 잡아다가 나누어 가두었었다. 이 장계에 ‘장연 등의 관아에 갇혀 있는 왕준 등은 중국에서 부역을 피해 도망온 사람들이 분명하니 함부로 심문을 가할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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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4 조선왕조실록
제주 목사 남치근과 전라 우수사 김빈이 왜변을 치계하였다. "... 25일 황당인(荒唐人)이 부서진 배의 판자를 타고 떠내려 오기에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왜인 23명과 중국인 2명이 부서진 배의 판자를 타고 떠내려와 해안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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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9 조선왕조실록
한 백성이 적당을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들에 나가 나무를 하다가 도적들에게 붙잡히어 적들이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산 위에 있다가 바라보고는 달려와서 적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을 고발한 것은 나이고 아버지가 아니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바란다.’ 하였습니다. 적들이 곧 그 아비를 놓아주고 그 아들을 결박하여 촌가에 도착하여 밥을 짓게 하고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배를 갈라 죽이고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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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2 국조보감(國朝寶鑑)
해서의 포악한 도적 임꺽정(林巨正) 등이 주벌을 받았다. 임꺽정은 양주(楊州)의 백정인데, 성품이 교활하면서도 사납고 용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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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1598 조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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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3-08-30 조선왕조실록 - 降倭
"심 유격이 거느리고 온 왜놈들을 의리에 따라 죽이지도 못하고 중국 장수에게 구애되어 관름까지 주어가면서 머물게 하고 있으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용산(龍山)에 있는 왜적도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우리를 벗어나온 범이고 소매 속에 들어온 전갈이어서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될 것이므로 더욱 우려됩니다. 제독이 있을 적에 소위 항왜(降倭)라는 것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올라왔는데 그 수가 매우 많고, 제독이 내려간 뒤에도 또 23명이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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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06-03 조선왕조실록 - 降倭所
"항왜소(降倭所)를 그곳에 그대로 두면 후환이 있을 것 같고, 데려와 경중(京中)에 두면 진(晉)나라 때 잡호(雜胡)가 혼란을 일으키듯 할 것 같고, 내지(內地)에 분산하여 두면 때를 틈타 봉기하여 말할 수 없는 걱정이 생길까 염려된다. 다른 묘책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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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07-21 조선왕조실록 - 降倭
40명의 항왜(降倭)가 도성문 밖에 와 있으므로 도하(都下)의 인심이 흉흉합니다. 저들은 본디 짐승의 마음이라 혹시 분하고 원한을 품은 일이 있으면 독기를 부릴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투항한 장소에서 그대로 영남(嶺南)의 산고을로 보내 차츰 강원도로 들여보내거나 혹 함경남·북도로 보내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다시 경중(京中)으로 해송(解送)하게 할 필요는 없고 비록 지금 오는 도중에 있더라도 길을 우회하여 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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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09-14 조선왕조실록 - 降倭
"항왜를 처음에는 깊고 외진 곳에 들여보내려고 해서, 모두 서울로 올려보낸 뒤에 이어서 양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로에서 전송할 때 폐해를 끼치는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양계의 군읍은 한결같이 잔약하고 파괴되어 수많은 항왜를 모두 들여보낸다면 물력이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금후로는 내항하는 자들 중 재능이나 기예가 있고 공순하여 부릴 만한 자는 진중에 남게 하고, 그 나머지는 도검을 거두고 나서 한산도의 주사가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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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9 조선왕조실록
용인에 거주하는 향화인(向化人) 박길상 등 10여 호의 남녀 합계 80여 명이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 큰 길가에 거주해 살아온 것이 이제까지 7, 8년입니다. 그곳은 크고 작은 행인들이 밤낮으로 오고가는 곳인데, 길상 등이 수하 16, 18명을 거느리고 밤에 산행을 한다고 칭하면서, 어떤 자는 말을 타고 어떤 자는 걸으며 혹 활과 화살을 들거나 혹 장검과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행인이나 짐을 쫓아가 약탈하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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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6-1912 청(淸)
1592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조선침략에 명(明)이 참전하여 국력을 소진하자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에 금(後金)을 세웠다. 이후 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 중국대륙마저 정복하였다. 수 백 년 뒤 청(淸)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는데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이듬해에 왕조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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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6 조선왕조실록
영광에 사는 향화인(向化人) 25명이 물에 빠져 죽고, 전주에서는 민가 여러 10호가 불에 타 사람 네 명이 타 죽었는데, 모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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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0 조선왕조실록
고창의 유학 유신우가 상소하여, "... 이른바 향화인(向化人)이란 자들은 옛날 중국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우리 땅에 이르러 이내 우리의 백성이 된 자입니다.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백성이 된 지가 몇백 년이 되었는지 모르는데, 늘 향화인이라 일컫고는 어업을 하는 자나 농사를 짓는 자 모두 신역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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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7 조선왕조실록
이른바 향화인(向化人)은 본디 다른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특별히 고휼하여 역사를 부과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충청도 연해의 고을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선척이 있는 자들에게 예조에서 매년 사람을 보내어 어속을 받아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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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 성호사설 - 蠻子
충렬왕 때에 원 나라에서 만자군(蠻子軍, 남송 유민으로 구성된 원나라 군대) 1만 4천 명을 보내어 해주ㆍ염주ㆍ백주의 3개 주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만자군은 남만 지방의 해귀족(海鬼族)이다. 지금 무과 시험에서 굳센 활을 당기어 먼 데까지 쏘는데 거의 황해도에서 독차지하여 서울 사람으로서는 상대하지 못하니 아마 그들의 후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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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 성호사설 - 蠻子
전쟁이 끝나면 외국군도 돌아간다. 설령 머물렀다해도 활쏘기 문화가 500여년 가까이 이어질 수는 없다. 물론 활쏘기 실력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성호사설 저자의 설명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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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 성호사설 - 向化村 契丹場
삼포의 왜적을 토벌한 후에도 그 종자가 아직도 많아 지금도 연해에 향화촌(向化村)이라고 이르는 마을이 이루 손꼽을 수 없으니 고려 때의 글안장(契丹場)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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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 성호사설 - 契丹場
발해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글안이 망했을 때도 그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것을 거란장(契丹場)이라 하므로 서쪽 사람들은 대체로 건장하고 힘쓰기를 좋아하여 옛날 풍속이 없어지지 않았다.
http://qindex.info/i.php?f=2613#35859
 
 1740 성호사설 - 契丹場
염주와 백주는 해주와 개성 사이에 있다. 발해는 926년에 망했고 거란의 포로가 들어온 것은 1219년이므로 두 유민의 발생시기는 300여년이나 차이가 난다. 따라서 거란장이 생길 때 발해 유민은 정체성이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또 발해는 정착민이었고 거란은 유목민이었으니 두 유민의 속성도 달랐다. 그러나 성호사설 저자의 인식에는 발해인이든 거란인이든 똑같이 건장하고 힘쓰기 좋아하는 풍속을 지닌 북방 난민들이었을 뿐이다.
http://qindex.info/i.php?f=2613#6243
 
 1804 계산기정
의무려산 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나라에서는 달단(韃靼)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과 중화를 한계지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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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왜(降倭)의 후손 김원봉
김원봉은 우록 김씨다. 우록 김씨의 시조는 임진왜란때 투항한 さやか인데, 그는 김씨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이라 고쳤다. 김충선은 일본과 여진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민족해방투사였다. 그는 유사좌파들이 떠들어대는 토착왜구인 셈인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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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평사 운동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이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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