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의 기원은 왕씨고려의 양수척인데, 양수척은 왕씨고려에 복종하지 않은 견훤백제의 잔민들이었다. 이후 북방에서 흘러온 발해, 거란, 몽골 등의 유민들도 양수척으로 분류되었다. 이씨조선에서 명칭을 백정으로 바꾸었으나 여전히 일반 백성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이씨조선때 들어온 여진인과 왜인은 향화인으로 불렸는데, 백정과 달리 이들은 비교적 잘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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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고려사절요(1452)
세자 대광현과 장군 신덕·예부경 대화균·균로사정 대원균·공부경 대복모·좌우위장군 대심리·소장 모두간·검교 개국남 박어·공부경 오흥 등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과 이름을 내려주면서 그를 왕실의 적에 붙이고,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였다. 보좌하는 신료들에게도 모두 작위를 내려주었다.
2613#6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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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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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고려사(1451) - 楊水尺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으로 있을 때에 양수척이 흥화·운중도에 많이 살았다. ... 양수척 등이 크게 원망하였다. 거란의 군사가 이르자 양수척이 맞아들여 항복하고 길을 인도한 까닭으로 ... 모두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에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종으로 본래 관적과 부역도 없었다. 수초를 따라 옮겨 살면서 일정한 거주가 없이 다만 사냥을 일삼고 또 고리를 엮어 이를 판매하여 생업을 삼았다. 대개 기생들은 본래 유기장(柳器匠)의 후예다.
2613#35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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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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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고려사(1451) - 楊水尺
흥화도와 운중도는 서북 지역의 역참로다. 삭주는 흥화도에 속했다. 고리는 유기라고도 하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한다. 楊水尺이란 명칭은 여기서 나온 듯하다.
왕건은 936년에 견훤백제를 병합하였는데, 이때 견훤백제의 도읍이었던 전주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사민시켰을 것이다. 병합에 사민이 따라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것을 이 기록과 연결시켜보면 전주의 주민들을 서북 지역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2613#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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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01.07 고려사(1451) - 契丹場
태조성무황제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때 금산왕자라는 자가 있었는데 중원의 민을 노략질하며 망한 요의 왕업을 회복하려고 도모하다가 세력이 다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도서에서 날뛰었습니다. 우리 충헌왕이 조충과 김취려 등을 보내어 병사를 원조하고 군량을 주어서 일거에 적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만세에 이르는 자손까지 오늘날을 잊지 말자고 하고서 인하여 잡은 포로를 나누어 신표로 삼으니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거란장(契丹場)이 바로 이것입니다.
2613#6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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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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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1644 명(明)
명(明)은 1368년 남중국에서 세워진 왕조로 원(元)을 몽골로 몰아내고 북중국까지 차지하였다. 1592년 일본이 이조를 침략하자 원병을 보내어 도와주었는데 이때 국력을 많이 소모한 탓에 1616년에 요동에서 후금(後金)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명(明)은 1619년 이조의 지원군과 함께 후금(後金)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청(淸)은 명(明)의 마지막 황제가 반란세력에 포위되어 1644년에 자살하자 북경을 점령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하였다.
2613#6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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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고려사(1451) 2
두목(頭目)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성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모두 10,000여 호(戶)를 얻게 되었다. 노획한 소 2,000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귀순하는 자들로 저자거리와 같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성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261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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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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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 고려사절요(1452) - 楊水尺
남녀가 섞여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도적떼가 아니라 부족의 무리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200여 마리의 말이 있었다는 점에서 농경민이 아니라 유목민이었다는 짐작도 할 수 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양수척은 1216년 기록에 나오는 양수척과 달라 보인다.
그래서 화척은 원래 흘러온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정착 농경민의 시각에는 기존의 양수척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아, 그 둘을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는 추정을 해 본다.
2613#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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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조선왕조실록
정착 농경민의 눈에는 양수척, 화척, 수척 그리고 달단 뿐만 아니라 재인도 같은 부류로 보였을 것이다. 농사를 짓지 않고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각기 달랐다. 양수척은 원래 수초를 따라 이동하며 유기를 만드는 장인이었고, 화척과 수척은 달단과 같은 유목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재인은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뿌리는 같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2613#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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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 조선왕조실록
외방 각도에서 활과 말에 능한 자는 모두 갑사와 시위에 속하게 하고 才人·禾尺 가운데 활과 말에 능한 자도 또한 시위에 속하게 하고, 그 나머지 노약한 자는 각 진에 속하게 하고서, 또 노약한 자 중에서 괜찮은 자를 골라 시위에 더 속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번진에는 단약한 병사가 날마다 감소하는데, 만일 변경이 있다면 장수가 된 자가 능히 단독으로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才人·禾尺의 무리는 모두 각 진에 속하게 하여 번병을 충실하게 하소서.
2613#35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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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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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 조선왕조실록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명하여 몰이꾼을 뽑아 보내게 하였다. 임금이 임실현 지방에 금수가 많다는 말을 듣고 순행하고자 하여, 경상도·충청도에서 각각 1천 명씩과 전라도에서 2천 명을 본월 24일에 금주 남제원에 모이도록 기약하였는데, 각각 10일 양식을 싸 오게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재인·화척과 각진의 번상한 군관과 번하한 시위군을 전부 다 뽑아 보냈다.
2613#3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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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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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조선왕조실록
영길도 도순문사 이원이 풍속을 바꿀 사의를 보고 하였다. 계문은 이러하였다.
"각 고을에 산재한 향화인(向化人)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데, 이성(異姓) 4, 5촌도 꺼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데리고 살므로 윤리를 패상합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일절 금단하여 더러운 풍속을 변화시키시되, 만약 어기는 자가 있다면 율문에 의하여 죄를 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영길도는 지금의 함경도다.
2613#35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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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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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 조선왕조실록
“함길·평안·풍해도 각 고을의 산접 생안간(散接生雁干)·소유간(酥油干)의 명목을 추고하되, 그 중에서 달달(韃靼)은 그전대로 정체하고, 평민은 모조리 군역에 붙이도록 하라.”
-- 함길도는 지금의 함경도이고 풍해도는 지금의 황해도이다. 산접간은 진상품을 모아 올리는 사람이고 생안간은 기러기를 잡아 진상하는 사람, 소유간은 낙농품을 진상하는 사람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달단은 군역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13#35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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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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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05 조선왕조실록 - 才人·禾尺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명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이숙묘·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하번 갑사, 별패, 시위패 및 수성군 영속과 재인과 화척·한량 인민·향리·일수·양반 중에서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들을 거느려,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2613#35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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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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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 조선왕조실록 - 才人·禾尺
화척이나 재인들이 농업에는 종사하지 아니하고 활쏘고 말타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양민과는 혼인도 하지 아니하고 저희끼리 한 떼를 이루어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를 한결같지 아니하며, 소나 말을 도살하여 양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하니, 청컨대, 이들을 각 지방에 나누어 두어서 평민과 혼인도 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직업에 안착하여 살도록 하고, 그래도 옛날 버릇을 고치지 않는 자는 그가 기르는 축산을 몰수하고 아울러 이정·장까지 죄를 주라 하였고,
2613#35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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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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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 조선왕조실록
“군적에 오르지 않은 재인이나 화척들은 검찰할 길이 없으므로, 이로 인하여 으슥한 곳에 모여 살면서 간음과 도적질을 몰래 행하고, 혹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니, 청컨대, 각도로 하여금 군적에 오르지 않은 재인과 화척을 샅샅이 찾아내어 군적에 등록시키고, 평민들과 섞여 살아서 농업을 익히게 하고, 3년마다 한 번씩 출생된 자손들을 찾아내어 호적에 올리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만약 출입할 일이 있거든 날짜를 한정하여 여행증을 주게 하소서.”
2613#3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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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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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 조선왕조실록
우리 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이라는 것은 전조(왕고)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도(강화도로 도읍을 옮겨갔을 때)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과 백정은 충렬왕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 현가(현악기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의 풍습과 재살(가축을 잡는 일)의 일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으며, ...
2613#3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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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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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 조선왕조실록
한 백성이 적당을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들에 나가 나무를 하다가 도적들에게 붙잡히어 적들이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산 위에 있다가 바라보고는 달려와서 적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을 고발한 것은 나이고 아버지가 아니니,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바란다.’ 하였습니다. 적들이 곧 그 아비를 놓아주고 그 아들을 결박하여 촌가에 도착하여 밥을 짓게 하고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배를 갈라 죽이고 갔다고 합니다.
2613#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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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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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08.30 조선왕조실록 - 降倭
"심 유격이 거느리고 온 왜놈들을 의리에 따라 죽이지도 못하고 중국 장수에게 구애되어 관름까지 주어가면서 머물게 하고 있으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용산(龍山)에 있는 왜적도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우리를 벗어나온 범이고 소매 속에 들어온 전갈이어서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될 것이므로 더욱 우려됩니다. 제독이 있을 적에 소위 항왜(降倭)라는 것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올라왔는데 그 수가 매우 많고, 제독이 내려간 뒤에도 또 23명이 올라왔습니다."
2613#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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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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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07.21 조선왕조실록 - 降倭
40명의 항왜(降倭)가 도성문 밖에 와 있으므로 도하(都下)의 인심이 흉흉합니다. 저들은 본디 짐승의 마음이라 혹시 분하고 원한을 품은 일이 있으면 독기를 부릴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투항한 장소에서 그대로 영남(嶺南)의 산고을로 보내 차츰 강원도로 들여보내거나 혹 함경남·북도로 보내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다시 경중(京中)으로 해송(解送)하게 할 필요는 없고 비록 지금 오는 도중에 있더라도 길을 우회하여 보내야 합니다.
2613#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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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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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09.14 조선왕조실록 - 降倭
"항왜를 처음에는 깊고 외진 곳에 들여보내려고 해서, 모두 서울로 올려보낸 뒤에 이어서 양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로에서 전송할 때 폐해를 끼치는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양계의 군읍은 한결같이 잔약하고 파괴되어 수많은 항왜를 모두 들여보낸다면 물력이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금후로는 내항하는 자들 중 재능이나 기예가 있고 공순하여 부릴 만한 자는 진중에 남게 하고, 그 나머지는 도검을 거두고 나서 한산도의 주사가 있는 곳으로...
2613#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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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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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 조선왕조실록
용인에 거주하는 향화인(向化人) 박길상 등 10여 호의 남녀 합계 80여 명이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 큰 길가에 거주해 살아온 것이 이제까지 7, 8년입니다. 그곳은 크고 작은 행인들이 밤낮으로 오고가는 곳인데, 길상 등이 수하 16, 18명을 거느리고 밤에 산행을 한다고 칭하면서, 어떤 자는 말을 타고 어떤 자는 걸으며 혹 활과 화살을 들거나 혹 장검과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행인이나 짐을 쫓아가 약탈하였는데, ...
2613#35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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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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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1912 청(淸)
1592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조선침략에 명(明)이 참전하여 국력을 소진하자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하고 1616년에 금(後金)을 세웠다.
이후 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 중국대륙마저 정복하였다.
수 백 년 뒤 청(淸)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는데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이듬해에 왕조가 해체되었다.
2613#6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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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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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성호사설 - 契丹場
염주와 백주는 해주와 개성 사이에 있다.
발해는 926년에 망했고 거란의 포로가 들어온 것은 1219년이므로 두 유민의 발생시기는 300여년이나 차이가 난다. 따라서 거란장이 생길 때 발해 유민은 정체성이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또 발해는 정착민이었고 거란은 유목민이었으니 두 유민의 속성도 달랐다. 그러나 성호사설 저자의 인식에는 발해인이든 거란인이든 똑같이 건장하고 힘쓰기 좋아하는 풍속을 지닌 북방 난민들이었을 뿐이다.
2613#6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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