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산 지역과 일본의 복강 지역이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띠는 현상을 말한다.
남방계 고인돌, 독널무덤, 전방후원분 등에서 이 현상은 뚜렷하다.
따라서 이 두 지역은 동일한 종족적 유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반도로 유민이 들어오는 경로는 크게 두 갈래다. 전쟁과 재난을 피해 북쪽에서 내려오는 화전민이 하나의 갈래고 장강에서 산동 반도나 유구 열도를 거쳐 들어오는 논농사 주민이 하나의 갈래다. 영산과 복강은 후자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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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고인돌은 한국에서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뉘는데, 남방계 고인돌은 한강 이남 전체에 분포하지만 영산 지역에 특히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복강 지역에서만 고인돌이 출토되는데 한국의 남방계와 구조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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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0 ᑅ 甕棺墓
일본에서 옹관묘는 승문 시대부터 보이는데 승문 말기에는 동북, 근기, 구주 등 일본 각지에서 옹관묘의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크기가 작아 유아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묻히는 대형 옹관은 미생 시대에 들어와 복강 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미생 시대 후기에는 점차 쇠퇴하더니 말기에는 거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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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0 ~ 0650 前方後円墳
일본의 고분시대는 고분, 특히 전방후원분이 축조되던 시기를 말한다. 3세기에서 7세기까지다.
전방후원분은 대화 왕조가 열도를 통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방의 호족들이 통합의 의미로 채택한 무덤이다. 외형을 중시하여 열쇠 구멍 모양의 통일된 모양을 갖추었지만 널방의 구조는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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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 임나4읍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 포미지와 반고는 영산 지역으로 비정된다.
7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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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 임나4읍과 축자국 - 솔까역사
일본서기에는 신무천황이 동정에 나서 가장 먼저 축자국을 들렸는데, 이때 축자국으로부터 전혀 저항을 받지 않고 오히려 향응만 받은 뒤 안예국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축자국은 복강 지역에 있었다. 이 지역은 반도로부터 벼농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고 평야가 넓어 고대 국가로 성장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영산 지역처럼 외부 세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복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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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 0562 임나의 고고학적 양상
구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독널무덤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발달하였고 일본 전역에서 많이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된다. 무덤방 벽을 붉게 칠한다든가 돌방 안에 돌널을 넣는 것 등은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는 무덤 양식인데 이런 무덤까지 포함하면 왜계 무덤의 분포는 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영역과 비슷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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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이덕일의 영산 왜
가운데 그림은 영산강 유역에 왜가 있었다는 이덕일의 가설이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영산 복강 동조 현상과도 연결될 수 있다. 왜가 한반도에 진출할 때, 선사 시대부터 구주와 친연성이 있던 영산강 유역을 주둔지로 선택했다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곳이 선사 시대부터 광개토왕의 시기까지 왜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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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0 ~ 0550 전방후원분
한국에서는 영산 지역에서만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는데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친 짧은 기간에 축조되었다.
원래 이 지역의 무덤은 독널에서 구덩식 돌널을 거쳐 굴식 돌방으로 변천해 왔는데, 하나의 봉분에 층층으로 무덤을 쌓아올리는 특징이 있다.
전방후원분은 이러한 문화와 매우 달라 외부 세력의 유입을 의심하게 하는데 규모가 큰 것은 강력한 권력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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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 기문분쟁 직후
백제는 513년에 4현을 획득한 후 영토를 22담로로 묶었다. 이때의 백제 22담로는 훗날의 신라 웅주와 전주를 합한 것과 같다. 영산 지역은 이때까지 백제에 통합되지 않았었다. 이 지역은 훗날 신라의 무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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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양직공도 百濟국사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叛波)·탁(卓)·다라(多羅)·전라(前羅)·사라(斯羅)·지미(止迷)·마련(麻連)·상기문(上己文)·하침라(下枕羅)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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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다사진 분쟁
백제는 529년에 가라로부터 다사진(多沙津)을 빼앗는다. 이 다사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다사군(韓多沙郡)에 대응시킬 수 있다. 지금의 하동인데 섬진강 하구다. 백제가 왜로부터 이곳을 인정받을 때 조공 나루터 핑계를 대었다. 만약 백제가 영산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런 핑계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산 지역은 529년 이후에 백제에 통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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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주서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하다.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다. 도읍은 固麻城이다.
지방에는 다시 5방이 있으니, 중방은 古沙城·동방은 得安城·남방은 久知下城·서방은 刀先城·북방은 熊津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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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三國史記(1145)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자사·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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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新羅 9주5소경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거느리게 했다.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거느리게 했다.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거느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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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복강 동조현상
한국의 영산 지역과 일본의 복강 지역이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띠는 현상을 말한다.
고인돌, 독널무덤, 전방후원분 등에서 이 현상은 뚜렷하다.
고인돌은 한국에서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뉘는데, 남방계 고인돌은 한강 이남 전체에 분포하지만 영산 지역에 특히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복강 지역에서만 고인돌이 출토되는데 한국의 남방계와 구조가 같다.
독널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널리 사용되어 왔다. 크기로 볼 때 주로 유아나 성인의 유골을 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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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지역 전방후원분의 의미
(1) 한국에 없던 왜식 무덤이 출현하였다.
(2) 한 무덤에 여럿을 묻는 전통이 있는 지역에 한 무덤에 한 사람만 묻는 무덤이 출현하였다.
(3) 무기류가 많이 껴묻어지지 않는 지역에 무기류가 많이 껴묻어지는 무덤이 출현하였다.
(4) 독널의 전통이 있는 지역에 돌방이 출현하였고 주변의 독널도 돌방으로 바뀌었다.
(2)와 (3)은 여기에 묻힌 사람이 강력한 지배자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4)는 그 방증이다. (1)은 그 지배자가 왜에서 왔다는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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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지역은 왜 역사 기록에 없나?
영산 지역의 고대는 역사 기록에 거의 언급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쾌한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혹시 영산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을 분석해 보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영산 지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무덤에 여럿을 묻었고 때로는 하나의 널방에 여럿을 묻기도 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일반화되지 않은 것으로 강력한 통치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라나 신라에서도 하나의 무덤에 여러 사람을 묻기도 했는데, 이는 순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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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지역의 역사적 상상
원래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 구주와 동일한 혈통의 주민들이 발달된 벼농사 문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계 사회였고 하나의 봉분에 여러 독널을 쓰는 장례 풍습이 있었다.
그러다 450년경부터 왜인이 이 지역의 곳곳에 배치되어 이곳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529년 이후에는 영산강 유역의 통치가 백제로 넘어갔다.
백제는 이 지역의 토착 세력에게 위세품을 내려주었고 이 지역 수장의 무덤도 백제의 굴식 돌방 무덤으로 바뀌었다.
660년 이후에는 신라가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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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중국 양나라의 기록에는 백제가 지방을 22담로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되어있는데 백제가 망할 때는 지방에 37군이 있었다. 한국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을 보면 옛 백제 지역을 웅주, 전주 그리고 무주로 나누고 각각 13, 10 그리고 14개의 군을 두었다고 되어 있어 백제가 망할 때의 37군과 같다. 여기서 백제 22담로는 웅주와 전주의 23군에 대응하고 무주 14개 군은 22담로가 있을 당시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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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와 일본 토종개
한국의 풍속화에는 바둑이와 검둥이 그리고 복슬이가 많이 나온다. 머리는 길쭉하고 귀는 아래로 축 늘어졌으며 목부터 꼬리까지 긴 털이 나 있다.
반면 일본의 토종개는 대부분 털이 짧고 옅은 단색이며 귀가 쫑긋하고 꼬리가 치켜 선 특징이 있다.
이는 한국의 삽사리나 동경이 그리고 불개와도 많이 다른데, 유일하게 한국에서는 진돗개가 그런 일본 토종개를 많이 닮았다.
2926#27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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