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542 下韓史

布彌支·半古 ❱ 下韓(南韓) ❱ 武珍州 ❱ 武州
 
   下韓·筑紫 동조현상
下韓·筑紫 동조현상
한국의 下韓 지역과 일본의 筑紫 지역이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띠는 현상을 말한다. 남방계 고인돌, 독널무덤, 전방후원분 등에서 이 현상은 뚜렷하다. 따라서 이 두 지역은 동일한 종족적 유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2926#3685 SIBLINGS CHILDREN COMMENT 3685
 
고인돌
고인돌은 한국에서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뉘는데, 남방계 고인돌은 한강 이남 전체에 분포하지만 영산 지역에 특히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복강 지역에서만 고인돌이 출토되는데 한국의 남방계와 구조가 같다.
2926#7912 SIBLINGS CHILDREN COMMENT 7912
 
  고창 고인돌
고창 고인돌
2926#2135 SIBLINGS CHILDREN COMMENT 2135
 
  화순 고인돌
화순 고인돌
2926#2939 SIBLINGS CHILDREN COMMENT 2939
 
 支石墓
支石墓
일본의 지석묘는 승문 시대 말기에 복강 서쪽에서 나타났다가 넓게 퍼지지 못하고 복강 지역에 머물다 미생 시대 전반기에 사라졌다.
2926#7892 SIBLINGS CHILDREN COMMENT 7892
 
-2024.10.07 전라남도는 下韓
2926#31721 SIBLINGS CHILDREN OPEN
 
-0500~0200 半島と九州情勢
-0500~0200 半島と九州情勢
한반도로 유민이 들어오는 경로는 크게 두 갈래다. 전쟁과 재난을 피해 북쪽에서 내려오는 화전민이 하나의 갈래고 장강에서 산동 반도나 유구 열도를 거쳐 들어오는 논농사 주민이 하나의 갈래다. 하한과 축자는 후자에 해당된다.
2926#2909 SIBLINGS CHILDREN COMMENT 2909
 
-0500~0200
弥生時代(やよいじだい)弥生時代(やよいじだい)板付遺跡板付遺跡
 
0250- 甕棺墓
일본에서 옹관묘는 승문 시대부터 보이는데 승문 말기에는 동북, 근기, 구주 등 일본 각지에서 옹관묘의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크기가 작아 유아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묻히는 대형 옹관은 미생 시대에 들어와 복강 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미생 시대 후기에는 점차 쇠퇴하더니 말기에는 거의 사라졌다.
2926#7957 SIBLINGS CHILDREN COMMENT 7957
 
0250~0450 독널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독널 무덤이 많았지만 3세기부터 영산 지역에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큰독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큰독널은 5세기에 복강식 돌방으로 교체되었다.
2926#2948 SIBLINGS CHILDREN COMMENT 2948
 
0250~0650 前方後円墳
일본의 고분시대는 고분, 특히 전방후원분이 축조되던 시기를 말한다. 3세기에서 7세기까지다. 전방후원분은 대화 왕조가 열도를 통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방의 호족들이 통합의 의미로 채택한 무덤이다. 외형을 중시하여 열쇠 구멍 모양의 통일된 모양을 갖추었지만 널방의 구조는 다양했다.
2926#2931 SIBLINGS CHILDREN COMMENT 2931
 
0369  布彌支·半古
0369 布彌支·半古
2926#8043 SIBLINGS CHILDREN COMMENT 8043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369 布彌支·半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2926#7997 SIBLINGS CHILDREN COMMENT 7997
 
0369  임나4읍과 축자국
0369 임나4읍과 축자국
일본서기에는 신무천황이 동정에 나서 가장 먼저 축자국을 들렸는데, 이때 축자국으로부터 전혀 저항을 받지 않고 오히려 향응만 받은 뒤 안예국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축자국은 복강 지역에 있었다. 이 지역은 반도로부터 벼농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고 평야가 넓어 고대 국가로 성장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영산 지역처럼 외부 세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복종했다.
2926#11049 SIBLINGS CHILDREN 11049
 
0369 ~ 0562 임나의 고고학적  양상
0369 ~ 0562 임나의 고고학적 양상
구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독널무덤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발달하였고 일본 전역에서 많이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된다. 무덤방 벽을 붉게 칠한다든가 돌방 안에 돌널을 넣는 것 등은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는 무덤 양식인데 이런 무덤까지 포함하면 왜계 무덤의 분포는 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영역과 비슷하게 된다.
2926#7895 SIBLINGS CHILDREN COMMENT 7895
 
0369 三韓의 재편
0369 三韓의 재편
▐ 영산강 유역은 삼한이 재편될 때 백제가 차지하지 못했었는데, 369년에 왜와 합세하여 반도 남부를 정벌할 때 비로소 백제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396년에 고려 광개토왕에게 패해 58성을 바치자, 이듬해에 왜가 와서 차현 이남을 빼앗아 버렸고 영산강 유역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2926#30565 SIBLINGS CHILDREN 30565
 
0369 半古
半古 → 半奈夫里 → 半那 → 潘南
2926#30562 SIBLINGS CHILDREN 30562
 
0369 布彌支
布彌支 → 巴老彌·發羅 → 布賢 → 錦山 → 羅州
2926#30561 SIBLINGS CHILDREN 30561
 
0404 이덕일의 영산 왜
0404 이덕일의 영산 왜
가운데 그림은 영산강 유역에 왜가 있었다는 이덕일의 가설이다. 이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영산 복강 동조 현상과도 연결될 수 있다. 왜가 한반도에 진출할 때, 선사 시대부터 구주와 친연성이 있던 영산강 유역을 주둔지로 선택했다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곳이 선사 시대부터 광개토왕의 시기까지 왜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2926#11594 SIBLINGS CHILDREN 11594
 
0450 ~ 0550 돌덧널과 돌널방
0450± 신안 배널리영암 옥야리
 
0450 ~ 0550 전방후원분
한국에서는 영산 지역에서만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는데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친 짧은 기간에 축조되었다. 원래 이 지역의 무덤은 독널에서 구덩식 돌널을 거쳐 굴식 돌방으로 변천해 왔는데, 하나의 봉분에 층층으로 무덤을 쌓아올리는 특징이 있다. 전방후원분은 이러한 문화와 매우 달라 외부 세력의 유입을 의심하게 하는데 규모가 큰 것은 강력한 권력을 암시한다.
2926#2143 SIBLINGS CHILDREN COMMENT 2143
 
0498 三國史記(1145)
백제 동성왕이 耽羅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직접 치려고 武珍州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
2926#8051 SIBLINGS CHILDREN COMMENT 8051
 
0512 백제가 왜로부터 차현 이남을 돌려받다.
2926#24771 SIBLINGS CHILDREN 24771
 
0516 백제가 가라로부터 섬진강 상류를 빼앗다.
2926#30572 SIBLINGS CHILDREN 30572
 
0521 양직공도 百濟국사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叛波)·탁(卓)·다라(多羅)·전라(前羅)·사라(斯羅)·지미(止迷)·마련(麻連)·상기문(上己文)·하침라(下枕羅)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2926#3438 SIBLINGS CHILDREN COMMENT 3438
 
0522 ❰❰ 0529 三國誤記 日本書紀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수적압산신에게 “무릇 조공하는 사자는 늘 바다 가운데의 굽은 섬을 피하느라 매번 풍파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가라의 多沙津을 신들이 조공하는 나루터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압산신이 듣고 아뢰었다. ▐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댈 수 없는 핑계다.
2926#30566 SIBLINGS CHILDREN 30566
 
0529 다사진 분쟁
백제는 529년에 가라로부터 다사진(多沙津)을 빼앗는다. 이 다사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다사군(韓多沙郡)에 대응시킬 수 있다. 지금의 하동인데 섬진강 하구다. 백제가 왜로부터 이곳을 인정받을 때 조공 나루터 핑계를 대었다. 만약 백제가 영산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런 핑계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산 지역은 529년 이후에 백제에 통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2926#1163 SIBLINGS CHILDREN COMMENT 1163
 
0529~0660 きゅしゅう혈통 모계사회
영산강의 지류인 문평천 주변에는 전방후원분이 먼저 나타나고 뒤이어 모계사회라 추정할 만한 고고학적 양상이 나타난다. 지배 계층의 무덤에서 여성의 인골이 금동관이나 금동신발과 같은 위세품과 함께 출토되고 또 그들의 모계 혈통이 같기 때문이다. 또 일본 구주인과 동일한 유전적 특징도 나타나고 있다.
2926#7950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542.07 日本書紀(720)
百濟遣紀臣奈率彌麻沙中部奈率己連來奏下韓任那之政幷上表之 백제가 기신 내솔 미마사, 중부 내솔 기련을 보내어 하한과 임나의 정사를 아뢰고, 아울러 표를 올렸다.
2926#40235 SIBLINGS CHILDREN COMMENT 40235
 
0542◾下韓(南韓)
0542◾下韓(南韓)
웅진으로 쫓겨온 백제는 512년에 왜로부터 오늘날의 부여, 대전, 논산 그리고 청주에 해당되는 4현을 얻는다. 훗날의 웅천주다. 이어서 516년에는 가라로부터 오늘날의 남원에 해당되는 기문을 뺐는데, 22담로는 이때 만들어진 듯하다. 훗날의 웅천주와 완산주를 합친 것이다. 백제는 또 522년에 가라로부터 오늘날의 하동에 해당되는 나루도 빼앗는다. 이때 조공 나루를 핑계댄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훗날 무진주가 되는 영산강 유역은 차지하지 못했다.
2926#24738 SIBLINGS CHILDREN 24738
 
0543.11 日本書紀(720)
遣津守連詔百濟曰在任那之下韓百濟郡令城主宜附日本府 진수련을 보내어 백제에 명령하기를, “임나의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과 성주는 일본부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2926#25895 SIBLINGS CHILDREN COMMENT 25895
 
0544.02 日本書紀(720)
後津守連遂來過此謂之曰今余被遣於百濟者將出在下韓之百濟郡令城主 후에 진수련이 이곳을 지날 때, ‘지금 내가 백제에 파견되는 것은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성주를 내보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2926#40286 SIBLINGS CHILDREN COMMENT 40286
 
0544.11 日本書紀(720)
猶於南韓 置郡令城主者 豈欲違背天皇 遮斷貢調之路 唯庶 剋濟多難 殲撲强敵 凡厥凶黨 誰不謀附 北敵强大 我國微弱 若不置南韓 郡領城主 修理防護 不可以禦此强敵 亦不可以制新羅 故猶置之 攻逼新羅 撫存任那 若不爾者 恐見滅亡 不得朝聘
2926#40285 SIBLINGS CHILDREN COMMENT 40285
 
0544.11 日本書紀(720)
南韓에 郡令과 城主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의 뜻을 거스르고 조공하는 길을 막는 것인가? 오직 바라는 것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강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저 흉악한 무리는 누구와도 손잡으려 한다. 북적은 강하고 우리 나라는 미약하다. 南韓에 郡令과 城主를 두어 수리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이 강적을 막을 수 없다. 또 신라도 누를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하고 임나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멸망하여 아마 조공을 하지 못할 것이다.
2926#6707 SIBLINGS CHILDREN COMMENT 6707
 
0544.11 日本書紀(720)
▐ 백제는 542년 7월에 왜에 사신을 보내어 下韓에 관한 일을 전했다. 왜는 543년 11월에 백제에게 하한에 있는 백제 郡令과 城主를 日本府에 귀속시키라고 요구했다. 544년 11월에 백제가 일본부와 임나를 불러 언급한 南韓은 그 내용으로 보아 下韓이다.
2926#24737 SIBLINGS CHILDREN 24737
 
0544.11 ◾下韓·南韓
0544.11 ◾下韓·南韓
南韓은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에 가까울 거 같지 않다. 그런데도 성왕이 고려를 핑계대는 것으로 보아, 신라를 핑계대는 것도 신라에 가까워서가 아닐 것이다. 南韓은 역사 기록의 공지로 남아 있는 영산강 유역에 어울린다. 백제가 529년에 조공 나루를 핑계로 왜에 다사진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이곳은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훗날 궁예고려가 견훤백제의 이곳을 차지하여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아, 성왕의 고려 핑계는 일리도 있었다.
2926#6706 SIBLINGS CHILDREN COMMENT 6706
 
0544.11 ◾전방후원분
0544.11 ◾전방후원분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백제가 고려에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내려오던 475년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다. 만약 南韓이 영산강 유역이라면 이 지역의 전방후원분이 사라진 시기와 백제가 이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둔 시기가 일치하게 되어 어울린다.
2926#30558 SIBLINGS CHILDREN 30558
 
0636 주서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하다.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다. 도읍은 固麻城이다. 지방에는 다시 5방이 있으니, 중방은 古沙城·동방은 得安城·남방은 久知下城·서방은 刀先城·북방은 熊津城이다.
2926#8188 SIBLINGS CHILDREN COMMENT 8188
 
0660 三國史記(1145)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자사·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2926#3440 SIBLINGS CHILDREN COMMENT 3440
 
0660 백제 무진주
2926#30563 SIBLINGS CHILDREN 30563
 
0664 웅진도독부 주현
2926#8467 SIBLINGS CHILDREN COMMENT 8467
 
0686 三國史記(1145)
무주(武州)는 본래 백제의 땅이었다. 신문왕 6년(686)에 무진주(武珍州)로 삼았는데, 경덕왕이 무주(武州)로 고쳐 삼았다.
2926#3442 SIBLINGS CHILDREN COMMENT 3442
 
0757 新羅 九州五小京
0757 新羅 九州五小京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거느리게 했다.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거느리게 했다.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거느리게 했다.
2926#30559 SIBLINGS CHILDREN 30559
 
0757 新羅 九州五小京 武州
2926#30564 SIBLINGS CHILDREN 30564
 
1937 日本書紀朝鮮地名攷
南韓을 섬진강 유역의 전남 내지 경남 서남지역으로 보았다. ┆雜攷 7 上卷, p.58 ┆鮎貝房之進 あゆかい ふさのしん
2926#30584 SIBLINGS CHILDREN 30584
 
1978 任那に關する一試論
南韓을 낙동강 유역의 新羅·安羅 사이의 국경분쟁지역으로 보았다.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下卷, p.214 ┆山尾幸久 やまお ゆきひさ
2926#30585 SIBLINGS CHILDREN 30585
 
1985 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
南韓을 百濟軍이 상주하고 있던 久禮山에서 安羅측 땅에 걸친 지역으로 보았다. ┆吉川弘文館, p.193 ┆金鉉球
2926#30586 SIBLINGS CHILDREN 30586
 
1992 6세기 중엽 加耶의 멸망에 대한 연구
久禮山은 이미 新羅에 빼앗긴 상태였으므로 섬진강 유역의 전남 내지 경남 서남지역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韓國古代史論叢 4, pp.218~219 ┆金泰植
2926#30587 SIBLINGS CHILDREN 30587
 
2016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중국 양나라의 기록에는 백제가 지방을 22담로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되어있는데 백제가 망할 때는 지방에 37군이 있었다. 반도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을 보면 옛 백제 지역을 웅주, 전주 그리고 무주로 나누고 각각 13, 10 그리고 14개의 군을 두었다고 되어 있어 백제가 망할 때의 37군과 같다. 여기서 백제 22담로는 웅주와 전주의 23군에 대응하고 무주 14개 군은 22담로가 있을 당시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나온다.
2926#3399 SIBLINGS CHILDREN COMMENT 3399
 
영산 복강 동조현상
한국의 영산 지역과 일본의 복강 지역이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띠는 현상을 말한다. 고인돌, 독널무덤, 전방후원분 등에서 이 현상은 뚜렷하다. 고인돌은 한국에서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뉘는데, 남방계 고인돌은 한강 이남 전체에 분포하지만 영산 지역에 특히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복강 지역에서만 고인돌이 출토되는데 한국의 남방계와 구조가 같다. 독널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널리 사용되어 왔다. 크기로 볼 때 주로 유아나 성인의 유골을 안 ...
2926#2908 SIBLINGS CHILDREN COMMENT 2908
 
영산 지역 전방후원분의 의미
(1) 한국에 없던 왜식 무덤이 출현하였다. (2) 한 무덤에 여럿을 묻는 전통이 있는 지역에 한 무덤에 한 사람만 묻는 무덤이 출현하였다. (3) 무기류가 많이 껴묻어지지 않는 지역에 무기류가 많이 껴묻어지는 무덤이 출현하였다. (4) 독널의 전통이 있는 지역에 돌방이 출현하였고 주변의 독널도 돌방으로 바뀌었다. (2)와 (3)은 여기에 묻힌 사람이 강력한 지배자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4)는 그 방증이다. (1)은 그 지배자가 왜에서 왔다는 사실을 ...
2926#7907 SIBLINGS CHILDREN COMMENT 7907
 
영산 지역은 왜 역사 기록에 없나?
영산 지역의 고대는 역사 기록에 거의 언급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쾌한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혹시 영산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을 분석해 보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영산 지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무덤에 여럿을 묻었고 때로는 하나의 널방에 여럿을 묻기도 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일반화되지 않은 것으로 강력한 통치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라나 신라에서도 하나의 무덤에 여러 사람을 묻기도 했는데, 이는 순장이다 ...
2926#2827 SIBLINGS CHILDREN COMMENT 2827
 
영산 지역의 역사적 상상
원래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 구주와 동일한 혈통의 주민들이 발달된 벼농사 문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계 사회였고 하나의 봉분에 여러 독널을 쓰는 장례 풍습이 있었다. 그러다 450년경부터 왜인이 이 지역의 곳곳에 배치되어 이곳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529년 이후에는 영산강 유역의 통치가 백제로 넘어갔다. 백제는 이 지역의 토착 세력에게 위세품을 내려주었고 이 지역 수장의 무덤도 백제의 굴식 돌방 무덤으로 바뀌었다. 660년 이후에는 신라가 이 ...
2926#11047 SIBLINGS CHILDREN 11047
 
진돗개와 일본 토종개
한국의 풍속화에는 바둑이와 검둥이 그리고 복슬이가 많이 나온다. 머리는 길쭉하고 귀는 아래로 축 늘어졌으며 목부터 꼬리까지 긴 털이 나 있다. 반면 일본의 토종개는 대부분 털이 짧고 옅은 단색이며 귀가 쫑긋하고 꼬리가 치켜 선 특징이 있다. 이는 한국의 삽사리나 동경이 그리고 불개와도 많이 다른데, 유일하게 한국에서는 진돗개가 그런 일본 토종개를 많이 닮았다.
2926#27606 SIBLINGS CHILDREN 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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