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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 任那의 첫 번째 의미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북쪽에 있는데 (축자국과는)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❶ 일본서기에서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여기서의 임나는 축자 및 계림과의 상대적 위치로 보아 남가라를 뜻한다. 이것이 임나의 첫 번째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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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0413~0502 倭5王
왜는 438년에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했으나 송은 451년에 백제를 빼고 가라를 넣어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만 인정한다. 왜는 다시 478년에 송이 인정한 것에 백제를 넣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했으나 송은 역시 백제를 뺀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만 인정한다. 제는 이것을 그대로 이어 479년에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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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광개토왕릉비(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 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임나가라는 왜적의 퇴각 경로로 보아 남가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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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 日本書紀(720)
新羅王은 高麗軍이 모두 新羅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高麗王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任那王이 선신 반구, 길비신 소리, 난파길사 적목자에게 권하여 新羅를 구해주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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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 日本書紀(720)
▐ 任那王이란 표현은 -28년에 蘇那曷叱知를 파견했던 남가라의 왕에게 한 번 사용되었고, 464년에 신라가 日本府 行軍元帥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때 두 번 사용되었으며, 529년에 가라왕 阿利斯等에게 한 번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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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任那의 두 번째 의미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久麻那利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❷ 任那는 원래 남가라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의미가 확장되어 백제와 신라를 제외한 한국의 나머지 소국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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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任那의 세 번째 의미
任那³王 기능말다한기가 와서 조회하였다. (기능말다란 대개 아리사등이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❸ 여기에 任那王으로 나오는 阿利斯等은 다사진 분쟁 때 신라 왕녀와 결혼했던 가라왕 阿利斯等이다. 任那는 남가라가 신라에 병합된 후 가라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任那의 세번째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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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日本書紀(720)
신라가 任那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湌國 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 任那²의 구성은 계속 변하였고 마지막에는 10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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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任那의 왕족이요,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다.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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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열전 강수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그를 늦게 만난 것을 유감스러워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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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那日本府(みまなにほん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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