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년에 백제는 가라가 기문을 빼앗았다고 왜에 호소하였다. 왜는 백제의 편을 들어주었고 가라는 반발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은 기문으로 침공하다 패하였고 백제의 장수는 신라에서 가라를 공격하였다. 516년에 백제는 기문을 내려준 데 대해 왜에 사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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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1 史記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築鄣塞
연나라가 그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요동외요에 소속시켰다.
漢興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屬燕
한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고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7275#30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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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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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弁辰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예·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 여기서 韓은 馬韓이다. 따라서 馬韓은 철 생산이 없거나 양이 적었을 것이다.
7275#8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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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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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日本書紀(720)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7275#3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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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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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0531 男大迹天皇
우전팔번신사의 인물화상경에는 '계미년에 斯麻가 男弟王의 장수를 기원하며 거울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귀가 있다.
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계미년도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 들어 있다.
503년 계미년으로부터 4년 뒤 무열천황이 죽자, 지방에 있던 男大迹王이 男大迹天皇으로 추대된다.
男大迹天皇은 백제에게 임나 四縣을 주었고, 己汶을 놓고 백제와 가라가 대립하였을 때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또 가라의 多沙津을 떼어 백제에게 주었다.
7275#2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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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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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日本書紀(720)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의 4현을 청했다. 哆唎國守 수적신압산이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7275#30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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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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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6 支侵·支潯·只彡
▐ 섬진강 상류는 삼국지(289)에 나오는 마한의 支侵國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땅이 되었다가 397년에 왜가 峴南, 谷那 그리고 東韓과 함께
支侵을 빼앗았다. 664년 즈음에 나타나는 웅진도독부의 支潯州가 바로 옛 支侵으로 추정된다. 이 支潯州에 巳汶縣이 소속현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己汶은 원래 백제의 땅이 맞다.
7275#8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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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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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515 日本書紀(720)
513-06 ①伴跛國 略奪臣國己汶之地 伏願 天恩判還本屬┆513-11 ②伴跛國 遣戢支獻珍寶 乞己汶之地 而終不賜┆引列百濟姐彌文貴將軍斯羅汶得至安羅辛已奚及賁巴委佐③伴跛既殿奚及竹汶至等 奉宣恩勅 以己汶帶沙賜百濟國┆514-03 ④伴跛 築城於子呑帶沙而連滿奚 置烽候邸閣 以備日本┆515-02 到于沙都嶋 傳聞 ⑤伴跛人懷恨銜毒恃强縱虐┆515-04 物部連 於帶沙江停住六日 ⑥伴跛 興師往伐 逼脱衣裳 劫掠所齎 盡燒帷幕
7275#24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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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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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515 日本書紀(720)
▐ 伴跛는 일본서기에 513년부터 515년까지 6차례만 등장한다. 加羅가 -28년부터 668년까지 37회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혼자서 백제, 왜 그리고 신라와 맞섰던 강한 나라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생겨났다 사라질 수는 없다.
마침 일본서기에 37회나 등장하던 加羅가 伴跛가 등장하던 시기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현상에서 의문의 실마리가 풀린다.
백제가 기문을 놓고 대립하던 加羅를 그 분쟁의 시기에만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伴跛로 불렀다는 이야기다.
7275#2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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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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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03 日本書紀(720)
伴跛가 자탄과 ❷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와 마수비에 성을 쌓아 마차해와 추봉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7275#3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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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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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 0529 「三國誤記」 日本書紀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수적압산신에게 “무릇 조공하는 사자는 늘 바다 가운데의 굽은 섬을 피하느라 매번 풍파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가라의 ❷多沙津을 신들이 조공하는 나루터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압산신이 듣고 아뢰었다.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 진은 官家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7275#26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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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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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03 ❰❰ 0529.03 日本書紀(720)
왜가 다사진을 백제에게 주자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고 왜를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나 의관 문제로 가라와 신라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신라는 왕녀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라는 “짝을 지어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으며 또한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하였다.
신라는 刀伽, 古跛, 布那牟羅 세 성을 함락시켰으며 북쪽 변경의 다섯 성도 쳤다.
7275#2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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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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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0539 梁職貢圖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叛波·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 일본서기(720) 외에 반파가 등장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시기적으로 기문 분쟁이 끝난 지 오래지 않은 때이고, 백제 사신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보여, 역시 백제의 기록을 광범위하게 참고한 일본서기의 반파에 관한 기록과 맥락이 같다.
7275#2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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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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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4 三國史記(1145)
十停(혹은 三千幢이라고도 이른다). 첫째는 音里火停, 둘째는 古良夫里停, 셋째는 居斯勿停으로 금장은 청색이다. 넷째는 參良火停, 다섯째는 召參停, 여섯째는 未多夫里停으로 금장은 흑색이다. 일곱째는 南川停, 여덟째는 骨乃斤停으로 금장은 황색이다. 아홉째는 伐力川停, 열째는 伊火兮停으로 금장은 녹색이다. 모두 진흥왕 5년에 두었다.
▐ 진흥왕 5년의 상황과는 맞지 않다.
7275#8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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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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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4 日本書紀(720)
일본의 길비신,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 구취유리, 加羅 上首位 ❸古殿奚, 졸마군, 사이기군, 산반해군의 아들, 다라의 이수위 흘건지, 자타한기, 구차한기가 백제에 이르렀다.
▐ 382년의 加羅國王妹 旣殿至와 513년의 伴跛 旣殿奚는 이 544년의 加羅 上首位 古殿奚와 연결되어 伴跛가 加羅라는 사실을 한번 더 뒷받침해준다.
7275#24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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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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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三國史記(1145)
干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寳伎 四曰逹已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❶下竒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❶上竒物
▐ 가라에서 上竒物과 下竒物을 주제로 한 음악이 있을 정도라면 513년에 분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가라는 己汶을 통치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397년에 백제로부터 支侵과 谷那를 빼앗은 이후로 제한된다.
7275#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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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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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括地志
括地志曰熊津河源出國東界西南流經國北百里又西流入海廣處三百步其水至清又有❶基汶河源出其國南山東南流入大海其中水族與中夏同
괄지지에 말하기를 '웅진하는 나라의 동쪽 경계로부터 나오고 서남으로 나라의 북쪽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백리이다.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폭이 넓은 곳은 30보이다. 물이 지극히 맑다. 또 기문하가 나라 안에 있는데 수원은 나라의 남쪽 산으로부터 나오고 동남쪽으로 흘러 큰 바다에 이른다. 그 水族은 중국과 같다.'
7275#3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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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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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南原小京
南原小京夲百濟古龍郡 新羅并之 神文王五年初置小亰 景徳王十六年置南原小京 今南原府
▐ 南原小京은 본래 백제의 古龍郡이었는데 신라가 병합하여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소경을 설치했다. 北原, 中原 그리고 西原이 신라가 만든 지명인 것을 고려할 때, 古龍에서 南原으로의 개칭 또한 신라때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때는 南原이란 지명이 없었고 백제 완산주의 南原(一云古龍郡)은 그냥 古龍郡이라고만 적었어야 맞다.
7275#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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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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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熊州
▐ 삼국사기에서 백제 웅천주의 今勿은 웅진도독부 지심주의 巳汶縣(夲今勿)이 되었다가 신라 웅주의 今武로 나타나고 있다. 웅진도독부 지심주에는 태안반도의 지명 뿐만 아니라 섬진강 상류의 지명도 섞여 있는데, 巳汶縣(夲今勿)은 竒物이라고도 불린 섬진강 상류의 己汶과 태안반도의 今勿을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다시말해서, 태안반도의 今勿→□□→今武와 섬진강 상류의 古龍→□□→南原 두 갈래의 지명 변천이 웅진도독부에서 巳汶縣(夲今勿) 하나로 묶인 것이다.
7275#2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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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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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新撰姓氏録
임나국에서 아뢰기를 저희들의 나라 동북에 삼기문이 있는데 상기문, 중기문 그리고 하기문입니다. 지방은 삼백리인데, 토지는 비옥하고 인민 또한 많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두고 신라와 더불어 서로 다투지만 서로 간에 능히 잘 다스리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니 백성들이 겨우 생만 유지할 뿐입니다. 저희가 청하는 것은 장군으로 하여금 이 곳을 다스리게 하여 귀국의 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 동북이라는 표현은 다른 기록들과 모순되므로 잘못된 것이다.
7275#8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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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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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7 續日本後紀(869)
우경인 좌경량 종5위상 길전숙니서주, 월중개 종5위하 길전숙니고세 등에게 흥세조신의 성을 내려 주었다. 시조 염승진은 왜인이었는데, 후에 나라의 명에 따라 ❶三己汶에 가서 살았다. 그 땅은 마침내 백제에게 예속되었다. 염승진의 8대손인 달솔 길대상과 그의 아우 소상 등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잇달아 우리 조정에 왔다. 대대로 의술을 전수하였고 아울러 문예에 통달하였다. 자손은 내량경 전촌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길전련의 성을 주었다.
7275#3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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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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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河東郡 夲韓多沙郡 景徳王攺名 今因之 領縣三
하동군은 본래 한다사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은 셋이다.
嶽陽縣 夲小多沙縣 景徳王攺名 今因之
악양현은 본래 소다사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 일본서기에 나오는 多沙, 滯沙 그리고 帶沙는 당시의 정황으로 보나 지금 남아있는 지명과의 유사성으로 보나 섬진강 하구가 분명하다.
7275#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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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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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0526~0539 양직공도 @상사문 @上巳文┆0638 괄지지 @기문하 @基汶河┆0720 일본서기 @기문 @己汶┆0815 신찬성씨록 @삼파문 @三巴汶┆0837 속일본후기 三己汶┆1145 삼국사기 @상기물 @上竒物 @하기물 @下竒物 @사문현 @巳汶縣
7275#8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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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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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림
양직공도(526~539)의 巳文, 괄지지(618~907)의 基汶, 일본서기(720)의 己汶, 삼국사기(1145)의 竒物과 巳汶 그리고 신찬성씨록(815)의 巴汶이 모두 표기가 다르므로 별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徐那伐, 雞林, 雞貴, 矩矩咤㗨說羅, 薛羅, 斯盧, 斯羅, 新盧, 新良, 新羅 그리고 志羅紀가 모두 별개의 나라라는 것과 같다.
7275#3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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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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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기문 분쟁
495년에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를 보면, 그가 解禮昆을 弗中侯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解禮昆은 解禮縣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보이고, 解禮縣은 훗날 기문과 함께 웅진도독부 지심주에 속했다. 그렇다면 495년의 시점에서 기문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12년에 백제 또한 기문을 뺏앗겼다고 주장했고 왜도 그러한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기문 분쟁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倭는 백제를 좋아했다 ...
7275#6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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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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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기문분쟁 요약
513년 백제는 문귀장군 등을 倭에 보내 오경박사를 바치며 반파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호소하였다. 몇 달 후에는 반파국도 倭에 진기한 보물을 바치며 기문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倭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백제, 신라, 안라 그리고 반파의 신하들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체사(滯沙)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크게 반발한 반파는 이듬해 성을 쌓고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며 倭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신라를 침략하여 약탈 ...
7275#6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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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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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다사진(多沙津)
가라는 529년에 다사진(多沙津)을 백제에 빼앗기게 되는데 이 다사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다사군(韓多沙郡)에 대응시킬 수 있다. 한다사군은 지금의 하동인데 섬진강 하구다. 따라서 가라는 513년에 발생한 기문 분쟁으로 섬진강 상류를 잃고 529년에 발생한 다사진 분쟁으로 섬진강 하류까지 잃게 된다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양직공도에 상기문(上己文)이 백제에 부용하였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는 상기문을 먼저 차지하고 나중에 나머지 기문을 차지한 것 ...
727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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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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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지명 표기
▐ 0526~0539 양직공도 @상사문 @上巳文 ▐ 0638 괄지지 @기문하 @基汶河 ▐ 0720 일본서기 @기문 @己汶 @체사 @滯沙 @대사강 @帶沙江 @다사진 @多沙津 @반파 @伴跛 ▐ 0815 신찬성씨록 @삼파문 @三巴汶 ▐ 0837 속일본후기 @三己汶 ▐ 1145 삼국사기 @상기물 @上竒物 @하기물 @下竒物 @사문현 @巳汶縣 @한다사군 @韓多沙郡 @소다사현 @小多沙縣
7275#8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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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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