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369 任那 > 0513~0516 己汶

513년에 백제는 가라가 기문을 빼앗았다고 왜에 호소하였다. 왜는 백제의 편을 들어주었고 가라는 반발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은 기문으로 침공하다 패하였고 백제의 장수는 신라에서 가라를 공격하였다. 516년에 백제는 기문을 내려준 데 대해 왜에 사례하였다.
 
   @섬진강 유역
@섬진강 유역
남원은 섬진강의 상류고 장수는 금강의 상류며 운봉은 낙동강의 상류다. 금강과 섬진강의 경계는 水分峴이고 섬진강과 낙동강의 경계는 女院峙며 낙동강과 금강의 경계는 六十嶺이다. @분수현 @水分峴 @여원치 @女院峙 @육십령 @六十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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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1 史記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築鄣塞 연나라가 그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요동외요에 소속시켰다. 漢興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屬燕 한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고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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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1 @봉수 유적
▐ 소백 산맥 일대의 봉수망은 촉수가 모두 백제를 향해 뻗어 있고 가라를 향해 뻗어 있는 것은 없다. 이는 이 지역이 가라의 속국이거나 가라의 外徼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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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弁辰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예·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 여기서 韓은 馬韓이다. 따라서 馬韓은 철 생산이 없거나 양이 적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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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제철 유적
▐ 弁辰의 철은 소백 산맥 일대에서 생산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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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日本書紀(720)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서 칠지도 1자루와 칠자경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계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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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谷那鐵山
▐ 谷那鐵山이 지금의 곡성에 있었다면 섬진강 유역은 백제가 372년 이전에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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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日本書紀(720)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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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支侵
▐ 支侵과 谷那는 각각 지금의 임실과 곡성으로 비정되므로 397년 이전에는 백제가 섬진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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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고고학적 양상
▐ 섬진강과 금강 상류에서 출토되는 가라식 무덤과 흙그릇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가 397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백제가 고려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하던 때라, 가라가 그 틈을 타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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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0 日本書紀(720)
천웅장언과 구저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구저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구저 등이 “...”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❷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으로 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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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0531 男大迹天皇
우전팔번신사의 인물화상경에는 '계미년에 斯麻가 男弟王의 장수를 기원하며 거울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귀가 있다. 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계미년도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 들어 있다. 503년 계미년으로부터 4년 뒤 무열천황이 죽자, 지방에 있던 男大迹王이 男大迹天皇으로 추대된다. 男大迹天皇은 백제에게 임나 四縣을 주었고, 己汶을 놓고 백제와 가라가 대립하였을 때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또 가라의 多沙津을 떼어 백제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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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日本書紀(720)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의 4현을 청했다. 哆唎國守 수적신압산이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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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四縣
▐ 四縣은 397년에 빼앗은 峴南·支侵·谷那·東韓의 峴南에 대응시킬 수 있다. 대전, 논산, 부여 그리고 청주다. 支侵과 谷那는 아직 돌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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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6 日本書紀(720)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즉이 장군을 수적신압산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伴跛國이 저희 나라 ❶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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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6 支侵·支潯·只彡
▐ 섬진강 상류는 삼국지(289)에 나오는 마한의 支侵國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땅이 되었다가 397년에 왜가 峴南, 谷那 그리고 東韓과 함께 支侵을 빼앗았다. 664년 즈음에 나타나는 웅진도독부의 支潯州가 바로 옛 支侵으로 추정된다. 이 支潯州에 巳汶縣이 소속현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己汶은 원래 백제의 땅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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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8 日本書紀(720)
백제 태자 순타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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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11 日本書紀(720)
이 달 伴跛國이 집지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❶己汶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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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11 伴跛·叛波
백제는 기문을 놓고 대립하던 시기에 가라를 伴跛·叛波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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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11 日本書紀(720)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과 사라의 문득지, 안라의 신이해와 분파위좌, 伴跛의 기전해와 죽문지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❶己汶과 ❷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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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03 日本書紀(720)
三月 伴跛築城於子呑·帶沙 而連滿奚 置烽候邸閣 以備日本 復築城於爾列比·麻須比 而絙麻且奚·推封 聚士卒兵器 以逼新羅 驅略子女 剝掠村邑 凶勢所加 罕有遺類 夫暴虐奢侈 惱害侵凌 誅殺尤多 不可詳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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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03 日本書紀(720)
伴跛가 자탄과 ❷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와 마수비에 성을 쌓아 마차해와 추봉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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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02 日本書紀(720)
백제의 사신 문귀장군 등이 물러가기를 청했다. 이에 명을 내려 물부련(이름은 빠졌다)을 딸려 보내어 돌아가게 했다(백제본기에는 물부지지련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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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02 日本書紀(720)
이 달 사도도에 이르러 伴跛인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물부련은 수병 5백 명을 이끌고 곧바로 ❷帶沙강으로 나아갔으며 문귀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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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04 日本書紀(720)
물부련이 ❷帶沙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伴跛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물부련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문모라(섬 이름이다)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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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05 日本書紀(720)
백제가 전부의 목리부마갑배를 보내어 물부련 등을 ❶己汶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부월·옷감을 내어 국물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녹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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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09 日本書紀(720)
백제가 주리즉차장군을 보냈는데 물부련을 따라 와서 ❶己汶의 땅을 내려준 것에 사례하였다. 따로 오경박사 한고안무를 보내어 박사 단양이와 교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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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_ 己汶분쟁 직후
0516_ 己汶분쟁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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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03 ❰❰ 0529.03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수적압산신에게 이르기를 “무릇 조공하는 사자는 늘 바다 가운데의 굽은 섬을 피하느라 매번 풍파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가라의 ❷多沙津을 신들이 조공하는 나루터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압산신이 듣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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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03 ❰❰ 0529.03 日本書紀(720)
왜가 다사진을 백제에게 주자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고 왜를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나 의관 문제로 가라와 신라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신라는 왕녀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라는 “짝을 지어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으며 또한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하였다. 신라는 刀伽, 古跛, 布那牟羅 세 성을 함락시켰으며 북쪽 변경의 다섯 성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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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03 三國史記(1145) 新羅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 가야의 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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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03 @다사진 @多沙津
▐ 다사진 분쟁은, 왜가 가라가 차지하고 있던 다사진을 백제에게 주자, 가라가 반발하여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자 신라가 가라의 변경을 침공한 순서로 일어났다. 삼국사기(1145)에는 가라와 신라가 혼인관계를 맺은 시기를 522년이라고 하였으므로 왜가 다사진을 백제에게 준 것은 그 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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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03 석순응전(釋順應傳)
大伽倻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軰之女 而生太子 대가야국의 월광태자는 곧 정견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이라고 하며 신라에 결혼을 청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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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09 三國史記(1145)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신라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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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0539 梁職貢圖
백제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叛波·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❶上己文·하침라 등이 백제에 부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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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6 日本書紀(720)
근강모야신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南加羅와 㖨己呑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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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04.07 日本書紀(720)
任那³王 己能末多干岐(阿利斯等일 것이다)가 와서 조회하였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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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4 三國史記(1145)
十停(혹은 三千幢이라고도 이른다). 첫째는 音里火停, 둘째는 古良夫里停, 셋째는 居斯勿停으로 금장은 청색이다. 넷째는 參良火停, 다섯째는 召參停, 여섯째는 未多夫里停으로 금장은 흑색이다. 일곱째는 南川停, 여덟째는 骨乃斤停으로 금장은 황색이다. 아홉째는 伐力川停, 열째는 伊火兮停으로 금장은 녹색이다. 모두 진흥왕 5년에 두었다. ▐ 진흥왕 5년의 상황과는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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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0562↶ 三國史記(1145)
干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寳伎 四曰逹已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❶下竒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❶上竒物 ▐ 가라에서 上竒物과 下竒物을 주제로 한 음악이 있을 정도라면 513년에 분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가라는 己汶을 통치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397년에 백제로부터 支侵과 谷那를 빼앗은 이후로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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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括地志
括地志曰熊津河源出國東界西南流經國北百里又西流入海廣處三百步其水至清又有❶基汶河源出其國南山東南流入大海其中水族與中夏同 괄지지에 말하기를 '웅진하는 나라의 동쪽 경계로부터 나오고 서남으로 나라의 북쪽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백리이다.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폭이 넓은 곳은 30보이다. 물이 지극히 맑다. 또 기문하가 나라 안에 있는데 수원은 나라의 남쪽 산으로부터 나오고 동남쪽으로 흘러 큰 바다에 이른다. 그 水族은 중국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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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주요 하천 유역 구분도
백제의 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섬진강 밖에 없다. 따라서 기문河는 섬진강이고 기문은 섬진강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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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百濟 完山州
南原(一云古龍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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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百濟 完山州
道實郡┆礫坪縣┆堗坪縣
25603 SHARED
 
0660↶ 百濟 完山州
任實郡┆馬突縣(馬珍)┆居斯勿縣
25604 SHARED
 
0660↶ 百濟 完山州 任實郡
25335 SHARED
 
0660↶ 百濟 完山州 道實郡
25531 SHARED
 
0660↶ 百濟 熊川州
馬尸山郡 牛見縣 ❸今勿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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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百濟 熊川州 馬尸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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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 三國史記(1145)
居勿城과 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 이 居勿이 居斯勿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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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4 熊津都督府
支潯州九縣┆❶巳汶縣(夲❸今勿)┆支潯縣(夲只彡村)┆馬津縣(夲孤山)┆子來縣(夲夫首只)┆解禮縣(夲皆利伊)┆古魯縣(夲古麻只)┆平夷縣(夲知留)┆珊瑚縣(夲沙好薩)┆隆化縣(夲居斯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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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4 熊津都督府 支潯州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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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4 「三國誤記」 支潯州
巳汶縣夲今勿➔己汶縣一云竒物 기문현은 기물이라고도 한다.┆己汶은 가야에서 竒物이라고 했는데, 이 竒物과 백제 웅천주의 今勿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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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南原小京
南原小京夲百濟古龍郡 新羅并之 神文王五年初置小亰 景徳王十六年置南原小京 今南原府 ▐ 南原小京은 본래 백제의 古龍郡이었는데 신라가 병합하여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소경을 설치했다. 北原, 中原 그리고 西原이 신라가 만든 지명인 것을 고려할 때, 古龍에서 南原으로의 개칭 또한 신라때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때는 南原이란 지명이 없었고 백제 완산주의 南原(一云古龍郡)은 그냥 古龍郡이라고만 적었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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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南原小京
▐ 백제 완산주의 古龍郡은 웅진도둑부에서 사라졌다가 9주5소경에서 전주의 南原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古龍郡과 南原을 잇는 중간 단계의 지명이 웅진도독부에서 다른 지명으로 표기되었을 수 있다. 古龍→□□→南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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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尙州
禦侮縣 本今勿縣 一云隂逹 景德王攺名令因之 ▐ 이 今勿은 백제의 今勿과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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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熊州
伊山郡 夲百濟馬尸山郡 景徳王改名 今因之 領縣二┆目牛縣 夲百濟牛見縣 景徳王改名 今未詳┆今武縣 夲百濟❸今勿縣 景徳王改名 今徳豊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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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熊州
▐ 삼국사기에서 백제 웅천주의 今勿은 웅진도독부 지심주의 巳汶縣(夲今勿)이 되었다가 신라 웅주의 今武로 나타나고 있다. 웅진도독부 지심주에는 태안반도의 지명 뿐만 아니라 섬진강 상류의 지명도 섞여 있는데, 巳汶縣(夲今勿)은 竒物이라고도 불린 섬진강 상류의 己汶과 태안반도의 今勿을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다시말해서, 태안반도의 今勿→□□→今武와 섬진강 상류의 古龍→□□→南原 두 갈래의 지명 변천이 웅진도독부에서 巳汶縣(夲今勿) 하나로 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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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九州五小京 熊州 伊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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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新撰姓氏録
任那國奏曰 臣國東北有❶三己汶地 上己汶 中己汶 下己汶 地方三百里 土地人民亦富饒 與新羅國相争 彼此不能攝治 兵戈相尋 民不聊生 臣請將軍令治此地 即為貴國之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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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新撰姓氏録
임나국에서 아뢰기를 저희들의 나라 동북에 삼기문이 있는데 상기문, 중기문 그리고 하기문입니다. 지방은 삼백리인데, 토지는 비옥하고 인민 또한 많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두고 신라와 더불어 서로 다투지만 서로 간에 능히 잘 다스리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니 백성들이 겨우 생만 유지할 뿐입니다. 저희가 청하는 것은 장군으로 하여금 이 곳을 다스리게 하여 귀국의 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 동북이라는 표현은 다른 기록들과 모순되므로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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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7 續日本後紀(869)
우경인 좌경량 종5위상 길전숙니서주, 월중개 종5위하 길전숙니고세 등에게 흥세조신의 성을 내려 주었다. 시조 염승진은 왜인이었는데, 후에 나라의 명에 따라 ❶三己汶에 가서 살았다. 그 땅은 마침내 백제에게 예속되었다. 염승진의 8대손인 달솔 길대상과 그의 아우 소상 등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잇달아 우리 조정에 왔다. 대대로 의술을 전수하였고 아울러 문예에 통달하였다. 자손은 내량경 전촌리에 거주하였으므로 길전련의 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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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河東郡 夲韓多沙郡 景徳王攺名 今因之 領縣三 하동군은 본래 한다사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은 셋이다. 嶽陽縣 夲小多沙縣 景徳王攺名 今因之 악양현은 본래 소다사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 일본서기에 나오는 多沙, 滯沙 그리고 帶沙는 당시의 정황으로 보나 지금 남아있는 지명과의 유사성으로 보나 섬진강 하구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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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 0526~0539 양직공도 @상기문 @上己文 ▐ 0638 괄지지 @기문하 @基汶河 ▐ 0720 일본서기 @기문 @己汶 ▐ 0815 신찬성씨록 @삼기문 @三己汶 ▐ 0837 속일본후기 三己汶 ▐ 1145 삼국사기 @상기물 @上竒物 @하기물 @下竒物 @사문현 @巳汶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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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도
동아대박물관이 경남 사천시 삼천포 앞바다 늑도에서 발굴한 일본 야요이 토기 가마터는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에서 대량으로 토기를 만들어 일본에 공급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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徳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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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利斯等
7275#55 SHARED
 
_기문 분쟁
495년에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를 보면, 그가 解禮昆을 弗中侯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解禮昆은 解禮縣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보이고, 解禮縣은 훗날 기문과 함께 웅진도독부 지심주에 속했다. 그렇다면 495년의 시점에서 기문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12년에 백제 또한 기문을 뺏앗겼다고 주장했고 왜도 그러한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기문 분쟁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倭는 백제를 좋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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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기문 분쟁은 철을 놓고 벌인 전쟁인가?
_기문 분쟁은 철을 놓고 벌인 전쟁인가?
'가라는 소백 산맥 일대에서 철을 생산하여 낙동강 물길과 김해의 바닷길을 통해 팔아 성장하였다. 475년에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쫓겨 내려오자 가라는 백제로부터 철 생산지를 지키기 위해 소백 산맥 서쪽에 촘촘한 봉수망을 구축하였다. 그래서 장수 일대는 진나라가 조선에 설치한 遼東外徼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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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기문분쟁 요약
513년 백제는 문귀장군 등을 倭에 보내 오경박사를 바치며 반파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호소하였다. 몇 달 후에는 반파국도 倭에 진기한 보물을 바치며 기문의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倭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백제, 신라, 안라 그리고 반파의 신하들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체사(滯沙)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크게 반발한 반파는 이듬해 성을 쌓고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며 倭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신라를 침략하여 약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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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다사진(多沙津)
가라는 529년에 다사진(多沙津)을 백제에 빼앗기게 되는데 이 다사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다사군(韓多沙郡)에 대응시킬 수 있다. 한다사군은 지금의 하동인데 섬진강 하구다. 따라서 가라는 513년에 발생한 기문 분쟁으로 섬진강 상류를 잃고 529년에 발생한 다사진 분쟁으로 섬진강 하류까지 잃게 된다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양직공도에 상기문(上己文)이 백제에 부용하였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는 상기문을 먼저 차지하고 나중에 나머지 기문을 차지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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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지명 표기
_지명 표기
▐ 0526~0539 양직공도 @상기문 @上己文 ▐ 0638 괄지지 @기문하 @基汶河 ▐ 0720 일본서기 @기문 @己汶 @체사 @滯沙 @대사강 @帶沙江 @다사진 @多沙津 @반파 @伴跛 ▐ 0815 신찬성씨록 @삼기문 @三己汶 ▐ 0837 속일본후기 @三己汶 ▐ 1145 삼국사기 @상기물 @上竒物 @하기물 @下竒物 @사문현 @巳汶縣 @한다사군 @韓多沙郡 @소다사현 @小多沙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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