加耶가 아니라 加羅가 올바른 표기고, 加羅라는 나라는 고령과 김해에만 있었으며, 이 두 加羅는 뿌리가 서로 다르다.
•
-0033 日本書紀(720)
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했다.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북쪽에 있는데 (축자와는)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남서쪽에 있다.
▐ 일본서기에서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여기서의 임나는 축자 및 계림과의 상대적 위치로 보아 남가라를 뜻한다.
이것이 임나의 첫번째 의미다.
22420
SHARED
•
-0028 日本書紀(720)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意富加羅國王의 아들이다.”
활목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본국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국명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그 국호를 彌摩那國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 任那는 みまな라 발음한다. 따라서 彌摩那는 任那와 같은 말이다. 意富加羅國은 남가라인 듯하다.
22421
SHARED
•
0289 三國志
已柢┆不斯┆彌離彌凍┆接塗┆勤耆┆難彌離彌凍┆古資彌凍┆古淳是┆冉奚┆半路┆弁樂奴┆軍彌(弁軍彌)┆彌烏邪馬┆如湛┆甘路┆戶路┆州鮮┆馬延┆狗邪┆走漕馬┆安邪┆瀆盧┆斯盧┆優中
30265
SHARED
•
0289 三國志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군에서 왜까지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서 한국을 거쳐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7천여 리이며 처음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는데 1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착한다.
❶ 삼국지(289)에는 弁辰狗邪國·狗邪韓國과 弁辰安邪國이 나오는데, 狗邪는 왜로 건너가는 바닷가다.
30276
SHARED
•
0291~0309 ❰❰ 0209 三國誤記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来請救
포상의 여덟 나라가 가라를 침입하려고 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침공을 받은 나라를 세 개의 국명으로 표기하였다.
신라본기에서는 加羅라 했고 물계자 열전에서는 阿羅國이라 했으며 이 사건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볼모는 신라본기에서 加耶에서 왔다고 했다.
16674
SHARED
•
0400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加羅 표기다.
뒤에 安羅 관련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加羅는 낙동강 하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까디
지도 加羅와 南加羅는 분리되어 표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0199
SHARED
COMMENT
•
0403(<-283) 日本書紀(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加羅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 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40198
SHARED
COMMENT
•
0405.08(<-285) 日本書紀(720)
평군목토숙니·적호전숙니를 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649
SHARED
COMMENT
•
0438 宋書(488)
찬이 죽자 아우 진이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157
SHARED
•
0451 宋書(488)
(왜왕에게)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加羅/진한/모한 육국제군사 벼슬을 더해 주었다.
▐ 왜가 요청한 6개 나라에서 백제를 빼고 加羅를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劉宋(420~479)이 加羅를 인식하게 된 것은 백제를 통해서일 듯하다.
백제가 유송에 사신을 보낸 기록은 424년,429년, 430년, 440년, 443년 그리고 450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는 없다.
40200
SHARED
COMMENT
•
0478 宋書(488)
흥이 죽자 아우 무가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加羅/진한/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했다. 478년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다. ... 조서를 내려 무에게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加羅/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의 벼슬을 주었다.
40195
SHARED
COMMENT
•
0479 南齊書(537)
加羅國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夷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加羅王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 스스로도 加羅라고 했다.
40194
SHARED
COMMENT
•
0529.04 日本書紀(720)
상신은 4개의 촌(금관·배벌·안다·위타 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다다라·수나라·화다·비지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다다라 등의 4개 촌을 노략질하게 한 것은 모야신의 잘못이다”라 하였다.
31894
SHARED
COMMENT
•
0532 三國史記(1145)
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 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39242
SHARED
COMMENT
•
0552.05 日本書紀(720)
백제, 加羅 그리고 안라가 중부 덕솔 목례금돈, 하내부 아사비다 등을 보내어 “고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39232
SHARED
COMMENT
•
0554.07 三國史記(1145)
백제 성왕이 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 삼국사기에서 加耶와 駕洛에 더하여 加良이란 표현이 등장하였다. 이때는 남가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이므로 여기에 나오는 가량은 가라를 말한다.
39230
SHARED
COMMENT
•
0557 高麗史(1451) 尙州牧
眞興王 廢州 爲上洛郡
진흥왕 때 주를 폐지하고 상락군이 되었다.
▐ 신라는 525년에 沙伐郡에 上州를 설치하고 555년에 火王郡에 下州를 설치한 바 있다. 낙동강 유역을 駕洛으로 인식하고 상하로 나누어 甘文國 북쪽에 있었던 沙伐國을 上洛이라 이름 붙였을까?
30320
SHARED
•
0562- 三國史記(1145)
干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寳伎 四曰逹已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竒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竒物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 둘째 상가라도, 셋째 보기, 넷째 달이, 다섯째 사물, 여섯째 물혜, 일곱째 하기물, 여덟째 사자기, 아홉째 거열, 열째 사팔혜, 열한째 이사, 열두째 상기물이다.
2130
SHARED
COMMENT
•
0562- 三國史記(1145)
▐ 양직공도에 상기문(上己文)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기문도 있었을 것이고 이 둘은 각각 삼국사기의 상기물과 하기물에 대응된다. 그러나 일본서기, 괄지지, 속일본기 등에 기문이라 되어 있으므로 기문으로 명칭을 통일한다.
또 삼국사기의 상가라와 하가라는 각각 일본서기의 가라와 남가라에 대응되는데 상가라와 하가라는 잘 쓰이지 않았고 삼국사기에도 남가야(南加耶)란 명칭이 나오므로 가라와 남가라로 명칭을 통일한다.
144
SHARED
COMMENT
•
0562.09 三國史記(1145)
가야(加耶)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652
SHARED
COMMENT
•
0562? 三國史記(1145)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령하여 가라국(加羅國, 加羅는 加耶로도 썼다)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때 사다함은 나이가 15~1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가 힘써 청하고 뜻이 확고하여 마침내 명령하여 귀당 비장으로 삼았다. 그의 낭도 중에서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 삼국사기에서 加耶와 駕洛 그리고 加良에 더하여 加羅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모두가 동일한 나라를 가리킨다.
655
SHARED
COMMENT
•
0562? 三國史記(1145)
眞興大王侵滅之以其地爲大加耶郡
景徳王攺名今因之
진흥왕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하였다.
경덕왕이 고친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 大加耶와 南加耶는 가라와 남가라를 구별하는 삼국사기 나름의 표기인가?
가라가 멸망한 것은 562년이고 왕조가 520년간 지속되었다고 하니 건국은 42년에 한 것이다. 마침 남가라의 건국도 42년이라고 하니 적어도 삼국사기 내에서는 가라와 남가라가 동시에 건국되었다.
656
SHARED
COMMENT
•
0594 隋書(636)
왕위가 김진평에 이른 개황 14년에 견사하여 방물을 바쳤다.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그의 선대는 백제에 부용하였는데 뒤에 백제의 고려 정벌로 말미암아 고려인이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마침내 강성하여져 백제를 습격하고 迦羅국을 부용국으로 삼았다.
40369
SHARED
COMMENT
•
0720 日本書紀
고황산이 신성한 이불로 황손 천진언을 덮어서 내려 보냈다. 황손은 천반좌를 떠나 또 하늘의 팔중 구름을 헤치고 그 위세로 길을 헤치고 나가 일향의 襲의 고천수봉에 강림하였다. 그리고 황손이 나아가는 모습은 신비한 二上산의 天浮橋로부터 내려와 떠있는 섬의 둔치가 있는 평지에 서서, 불모의 땅인 空國의 구릉으로부터 좋은 나라를 찾아나서 오전 장옥의 입협 해변에 도착하였다.
7615
SHARED
COMMENT
•
0720 日本書紀
그 땅에 한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를 사승국이라 하였다. 황손이 “나라가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여기에 나라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황손이 나아가 머물렀다.
--
사승국승장협(事勝國勝長狹)
7616
SHARED
COMMENT
•
1145 三國史記
狗邪·加羅·加良·加耶┆安邪·安羅·阿尸良·□□□┆□□·多羅·大良·大耶
2131
SHARED
•
1145 三國史記 ① 大加耶
高靈郡 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豉王(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 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為大加耶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내진주지라고도 한다)에서 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 일본서기(720)에 加羅와 南加羅가 있으므로 삼국사기에도 김해의 南加耶에 맞춰 고령은 加耶라고 해야 어울린다.
삼국사기도 이 기록 외에는 대부분 加耶로 표기했다.
650
SHARED
COMMENT
•
1145 三國史記 ① 南加耶
김유신의 12세조 首露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42년에 龜峯에 올라 駕洛의 9촌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南加耶의 시조 首露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40256
SHARED
COMMENT
•
1145 三國史記 ① 南加耶
▐ 加耶와 南加耶는 이름이 같아도 뿌리는 별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서기(720)에서도 加羅와 南加羅가 같은 뿌리였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고령의 加耶와 김해의 加耶는 우연히 이름이 같았다고 보아야 한다.
7468
SHARED
•
1145 三國史記 ① 阿那加耶
咸安郡 法興王以大兵 滅阿尸良國(一云阿郡加耶) 以其地為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함안군은 법흥왕이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아시량국(아군가야라고도 한다)을 멸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은 곳이다.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 고려사(1451)에 阿那加耶로 되어 있어 阿郡加耶는 오기로 판단된다.
7534
SHARED
•
1145 三國史記 ① 阿那加耶
▐ 삼국지(289)의 狗邪가 삼국사기(1145)에서는 加良 또는 加耶가 되었으므로 삼국지의 安邪는 삼국사기에서 安良 또는 安耶가 되어야 맞다. 그런데 阿尸兮가 安賢이 된 것을 볼 때 安은 阿尸로도 표기될 수 있으므로, 安良 또는 安耶는 阿尸良 또는 阿尸耶로도 표기될 수 있었다.
6959
SHARED
•
1145 三國史記 ① 阿那加耶
❸ 삼국지(289)에 나오는 狗邪는 일본서기(720)에서 加羅와 南加羅로 분리되었고, 삼국사기(1145)는 이를 大加耶와 南加耶로 구별하였는데, 두 나라의 뿌리가 별개라는 사실은 명확히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加耶라는 말이 나라 이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낙동강 서쪽의 소국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오인하였다.
그래서 安耶로 불러야 할 나라를 阿那加耶로 표기했고 훗날 古寧으로 개칭되는 古冬攬의 옛 소국을 古寧加耶로 표기하였다.
7467
SHARED
•
1145 三國史記 ① 古寧加耶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新羅取之 為古冬攬郡(一云古陵縣) 景德王改名 今咸寧郡
▐ 古寧은 신라에 병합된 후에 붙여진 이름이고, □□加耶란 명칭의 나라는 원래 없었으며, 삼국사기가 竒物과 今勿을 혼동하고 馬珍과 馬津을 혼동하며 比斯와 比自火를 혼동한 사례를 볼 때,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 함창에 있었다는 古寧加耶는 高靈에 있었다는 加耶의 착오일 듯하다.
7519
SHARED
•
1145 三國史記
星山郡은 본래 一利郡(里山郡이라고도 한다)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加利縣이다.
▐ 星山이란 지명은 경덕왕 때 생긴 것이므로 그 전에 星山伽耶가 있을 수는 없다.
이는 삼국사기(1145)의 古寧加耶와 유사한 모순이다.
7517
SHARED
•
1145 三國史記
固城郡은 본래 古自郡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 삼국유사(1281)에서 말하는 小伽耶의 흔적이 없다.
삼국유사는 본조사략에 있는 阿羅(咸安), 古寧(咸寕), 星山·碧珍(加利), 非火(昌寕) 그리고 金官(金海)에서 非火(昌寕)를 大伽耶(髙霊)로 바꾸고 가락국기에 나오는 6가야에 맞추기 위해 固城을 넣어 大伽耶에 대응하는 小伽耶란 이름을 붙인 듯하다.
7516
SHARED
•
1145 三國史記
火王郡은 본래 比自火郡(比斯伐이라고도 한다)인데 진흥왕 16년에 주를 두고 下州로 이름하였다. 진흥왕 26년 주를 폐지하였다.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昌寧郡이다.
▐ 非火伽耶가 있었던 흔적이 없다.
7556
SHARED
›
1145 गया(Gaya)
불교가 들어와 널리 퍼지면서 지명, 특히 산이름이 불교식으로 많이 개칭되었다. 예산의 加耶山도 그 중 하나로 加耶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गया(Gaya)를 음차한 것이다.
여기서 고령의 국명 加耶와 산이름 加耶山의 형성에도 불교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삼국지(289)의 狗邪와 삼국사기(1145)의 加耶는 발음이 비슷하고 加羅·加耶와 多羅·大耶의 변화가 같은 규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영향은 확인되지 않는다.
7246#25702
SHARED
•
1281 三國遺事 駕洛國記 ②
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 등 아홉 명의 干이 있었는데 이는 추장으로 백성들을 통솔했다.
▐ 干은 일본서기(720)의 干岐 또는 旱岐에 대응되고 九干者는 삼국사기의 駕洛九村에 대응된다.
삼국사기는 알지 설화에서 마을의 우두머리를 村長으로 표기했다.
651
SHARED
•
1281 三國遺事 駕洛國記 ③
북쪽 龜旨(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 龜旨는 삼국사기(1145)의 龜峰에 대응된다.
5562
SHARED
•
1281 三國遺事 駕洛國記 ④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此有人否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 등이 말하였다. "吾徒在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다."
6691
SHARED
•
1281 三國遺事 駕洛國記 ④
▐ 일본서기(720)의 다음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그 땅에 한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를 사승국이라 하였다. 황손이 “國在耶以不 나라가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此焉有國 여기에 나라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황손이 나아가 머물렀다.
7244
SHARED
•
1281 三國遺事 駕洛國記 ⑤
나라 이름을 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黃山江, 서남쪽은 滄海, 서북쪽은 地理山, 동북쪽은 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5474
SHARED
•
1281 三國遺事 駕洛國記 ⑤
▐ 六伽耶는 신라의 六村을 연상시킨다.
삼국사기(1145)까지도 大加耶와 南加耶는 별개의 뿌리를 가졌다고 나오는데 삼국유사(1281)는 여섯 伽耶의 뿌리가 모두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부터 加耶가 보통 명사처럼 쓰이면서 □□加耶가 여러 개 생겨났는데, 이 설화는 그것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듯하다.
29657
SHARED
•
1281 三國遺事 駕洛記 賛
5가야(가락기찬에 의하면 “한 가닥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여러 고을로 돌아가고 한 개가 이 성 안에 남았다.”라고 하였다. 즉 한 개는 수로왕이 되고 남은 다섯 개는 각각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는 것이니, 금관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본조의 사략에서는 금관국도 함께 꼽아 창녕이라고 함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30284
SHARED
•
1281 三國遺事 本朝史畧
本朝史畧云 太祖天福五年庚子改五伽耶名 一金官(為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寕恐髙霊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星山或作碧珍伽耶)
본조의 사략에 이르기를 “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1은 금관(김해부가 되었다)이요, 2는 고령(가리현이 되었다)이요, 3은 비화(지금의 창녕이란 것은 아마도 고령의 잘못인 것 같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앞과 마찬가지로 성산은 벽진가야라고도 한다)이다.”라고 하였다.
16686
SHARED
•
1281 三國遺事 本朝史畧
▐ 阿羅(咸安)┆古寧(咸寕)┆星山·碧珍(加利)┆非火(昌寕)┆金官(金海)┆일연의 주장과 비교해 볼 때, 大伽耶와 小伽耶가 빠지고 非火가 추가되어 있다. 일연은 髙霊과 昌寕을 혼동하여 大伽耶를 빼고 非火를 넣었다는데 공감이 간다.
삼국사기(1145)도 髙霊과 古寧을 혼동하여 古寧加耶를 넣은 바 있다.
27199
SHARED
•
1281 三國遺事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寕) 大伽耶(今髙霊) 星山伽耶(今亰山 一云碧珎) 小伽耶(今固城)
아라(야)가야(지금의 함안), 고령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지금의 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벽진이라고도 한다), 소가야(지금의 고성)이다.
▐ 阿羅·阿耶伽耶는 삼국지(289)의 安邪와 狗邪가 합쳐진 것이다.
7483
SHARED
•
1281 三國遺事
❹ ┆삼국지(289) 狗邪┆
➔ ┆일본서기(720) 加羅 南加羅┆
➔ ┆삼국사기(1145) 大加耶(고령) 南加耶(김해) 阿那加耶(함안) 古寧加耶(함창)┆
➔ ┆삼국유사(1281) 大伽耶(고령) 小伽耶(고성) 金官伽耶(김해) 阿羅·阿耶伽耶(함안) 古寧伽耶(함창) 星山·碧珎伽耶(성주)┆
29598
SHARED
•
1451 高麗史
京山府는 본래 신라의 本彼縣으로 경덕왕 때 이름을 新安으로 고치고 星山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뒤에 碧珍郡으로 고쳤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 碧珍이란 지명은 경덕왕 이후 생긴 것이므로 그 전에 碧珍伽耶가 있을 수는 없다.
이는 삼국사기(1145)의 古寧加耶와 유사한 모순이다.
16657
SHARED
•
① 加耶가 아니라 加羅가 올바른 표기다.
加羅라는 표기는 광개토왕릉비(414), 남제서(537), 일본서기(720)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나온다.
반면, 加耶라는 표기는 삼국사기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나라의 표기는 加羅로 하는 게 옳다.
479년에 남제에 보낸 사신을 통해 스스로도 加羅라고 칭했다.
5475
SHARED
•
② 加羅는 고령과 김해에만 있었다.
삼국사기(1145)가 首露를 소개하며 開國號曰加耶라고 하였으므로 김해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이 加耶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南加耶始祖首露라는 표현을 통해 이 나라는 南加耶로도 불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고령을 소개하며 本大加耶國이라 하였으나 대부분의 기사에서 이 나라를 加耶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이 나라도 加耶다.
10020
SHARED
•
② 加羅는 고령과 김해에만 있었다.
삼국사기가 이 두 나라를 보고 加耶를 낙동강 서쪽의 소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오인하면서 安耶에도 加耶를 붙여 阿那加耶라 했고 古寧에도 加耶를 붙여 古寧加耶라 했다.
삼국유사(1281)에 와서는 小伽耶와 星山(碧珎)伽耶가 추가되었다.
古寧과 星山 그리고 碧珎이란 지명이 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니 그 지명이 붙은 加耶도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小伽耶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6가야에 맞추기 위해 大加耶에 대응하는 이름을 붙여 끼운 듯하다.
14816
SHARED
•
③ 고령과 김해의 加羅는 뿌리가 달랐다.
▐ 일본서기(720)에는 加羅와 南加羅의 뿌리가 같다는 이야기가 없다.
삼국사기(1145)에는 大加耶와 南加耶의 뿌리가 분명히 분리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이 인용한 釋利貞傳에서는 두 시조가 형제로 나오며, 삼국유사(1281)가 인용한 駕洛國記에는 六伽耶가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되어 있다.
씌어졌다는 연대는 釋利貞傳, 駕洛國記 그리고 삼국사기의 순서이나 이야기가 부풀려지는 과정은 삼국사기, 釋利貞傳 그리고 駕洛國記의 순서다.
26632
SHARED
•
車竹以南 - 盧·邪·羅·奈·那·耶·良·洛
▐ 마한에는 盧가 6개 있었고 변진에는 盧가 2개, 邪가 2개 있었다. 반도의 재편 이후 마한의 萬盧와 변진의 斯盧는 각각 邁羅와 斯羅로 바뀌었고, 변진의 狗邪와 安邪는 백제에서 加羅와 安羅로 바뀌고 신라에서 加耶·加良과 阿耶·阿尸良으로 바뀌었다. 羅·奈·那는 백제식이고 耶·良·洛는 신라식이다.
삼국지 이후 고려와 왜 그리고 중국은 주로 백제를 통해 이들 나라를 알게 되었으므로 백제식 표기를 썼다.
139
SHARED
-